박정희의 독립운동 자료 메모

  전교조가 교육만 받은 이들에게 최규히 대통령이 허수아비

장준하.  일본에서 6년이나 신학대학을 다녔으면 학도병 지원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지원하였다.  더구나 가장 먼저 지원하였다.  그리고 세번 탈영.  일본이 한창 이기고 있었을 때 입대 지원하여 복무하다가 일본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였을 때 중국군에 붙었다.  그는 광복군 탈영병? 

  박정희는 평북대대 중대장으로서 근무하다가 환국.

  1974-07-24 독립군가 보존회 설립 - 문공부에 사회단체 등록필 회장 : 박노일

1976-03-01 초대회장 사망으로 2대회장으로 광복군3지대 동지 장호강님 추대

1976-08-30 주간시민 : 특종 햇빛 본 독립군노래 흩어지고 잊혀졌던 독립군가 50편 처음 집대성 - 26곡 가사 발표
1977-12-10 독립군가곡집 출간 사업계획 결의, 광복군 생존지사 및 각계각층의 독립군가 자료소지자에게 제보 요청(광복회보 게제 등) 및 직접 탐방하여 독립군가 가사 및 구전곡을 카세트에 녹음하였음
1986-08-06 국군방송 : 군가무대 프로출연 독립군가의 역사적 배경 및 보존회 설립, 수집.
1986-08-13 국군방송 : 독립군가음반 청취 독립군가방송
1988-08-15 독립군가 카세트 테이프제작 (15곡) 각계각층에 보급함. 수록곡명 : 독립군가. 용진가 .고난의노래 .최후의결전. 조국행진곡. 소년행진곡. 앞으로행진곡. 장검가. 압록강행진곡. 애국지사의노래. 기전사가. 선봉대가. 광복군제2지대가. 광복군제3지대가. 광복군행진곡

박정희는 광복군이 해체될 때까지 기다렸다.  박정희가 무장해제당한 이유.  광복군과 건국동맹 사이에 연합작전이 있었는가?

민족문제연구소 좌빨들이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기사를 발견하엿을 때 그들은 환성을 지르키는커녕 처절하게 절망하였을 것이다.  만주일보는 없었다.  진충보국이란 혈서도 없었다.  왜 신문에 실렸는가?  외국인 학생 지원자는 처음이었다.  일본인 거류자들도 지원자격을 얻으려 했다.  5년후에 그들에게 닥칠 운명을 생각해 보라.  40년을 열심히 일했다.

박정희 작전지도 http://cafe.daum.net/issue21/5NiW/59

1939년 만주국 입국 증명서.  톈진 조약.  1939년은 소련이 만주국을 재침략하려 했던 해.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박정희 교사는 학교 바로 밑에 있는 김순아(金順牙)라고 하는 아주머니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는 남편을 잃고 임창발(林昌發)이라는 아들하나를 데리고 하숙을 치며 사는 여인인데 인정이 많고 성격은 남자처럼 호탕한 편이었다. 박 교사가 하숙에 든 다음 달에 문경군청의 농회(農會)기사인 허동식(許東植)이 하숙생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집에서 하숙을 하다보니 친하게 지냈고 퇴근 후면 술친구가 되었다. 당시의 생활에 대하여 허동식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왔다. 박 교사의 첫인상은 꾀죄죄했는데 눈빛만은 빛나고 다부진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곧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매일 집에서 술을 마신 것 같다. 술마신 것이 기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와서 쪽박을 띄워놓고 허연 배추속과 된장을 안주 삼아 밤새도록 마셔댔다. 하숙집 주인도 가끔 끼어들고 했는데 박정희는 평소에 말이 없다가 술만 한 잔 들어가면<왜놈들><왜놈들>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순신(李舜臣)이나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노래는<황성옛터>가 십팔번이고 방학 때도 집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한 줄은 전혀 몰랐다. 집안 이야기는 도통 꺼내지 않았다.
그 는 늘 스파이크를 갖고 다니며 애지중지했고 아침 6시에는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어김없이 나팔을 불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이 나팔소리가 들리면 문경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하고 일어날 정도였다.

박 교사는 누구보다도 대일감정(對日感情)이 좋지 않았다. 말끝마다<왜놈들>이 튀어나왔으며 의식적으로 일본말을 회피하는 눈치가 역연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그 새끼 때려 죽이려다가 놔주었다. 왜놈이면 다여!"하면서 아리마(有馬)교장을 패주고 와서는 씩씩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은근히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 "학생 여러분!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된다. 우리는 남을 이길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하면서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제자 이영태(李永泰)의 증언이다.

(http://cafe.daum.net/issue21/5NiW/46 )

또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도 문경 교사 시절처럼 민족주의적 경향을 나타 냈습니다. 그는 1기생 이기건에게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 라고 되풀이하여 말하곤 했습니다. 한국인 들끼리 술자리 모임에서 어느 날은 벌떡 일어나 "선배님들, 이런 노래 모르시지요." 라며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 노래를 불렀습니 다. 박정희의 친구인 이한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결심을 밝히 기도 하였다. 우리 사이는 혈우라고 할 만했다. 특히 나에게 감명을 준 것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그 불굴의 정신이었 다" 고 말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시절 선배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 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 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박 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 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8.15 해방을 8월 17일 같이 근무하던 중국인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으로 맞이했 다. 박정희가 소속된 보병 제8단은 주로 중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당제영(唐 際榮) 단장 역시 중국인이었다. 박정희는 바로 중 국인 단장의 부관겸 기수로 근무했으며, 1945년 7월 1일에는 중위로 진급한 상태였다. 박정희는 8월 9일 소련의 참전 사실 을 현장에서 맞기도 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인 또는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보복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서 당제영 상교(대령)는 제8단에 소속된 조선인과 일본인의 무장을 해제하여 자신의 부대에서 분리시키고 남은 중국인 병사들을 규합하 여 장개석 군대로 합류시킬지 모택동 군대로 합류시킬지를 엿보는 상황이 되었다. 그만큼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졸지에 소 속부대를 상실한 박정희와 이주일 신현준은 봉천을 경유하여 국내로 귀국할 수도 있었지만 육로는 피하기로 했다. 그곳에는 이미 소련군 이 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이 같은 귀로선택은 이 당시 그가 여운형의 ‘건국동맹만주분맹’이나 공산주의와 무관했다는 것 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그들은 일단 북경을 향하기로 결정했고, 9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 당시 북경을 비롯한 중국 각 도 시에는 수 십만의 한국 사람들이 몰려 들어 귀국 배편을 기다렸다. 여기서 박정희 일행은 상해임시정부가 주도하고 있던 광복군에 들 어 갔다. 박정희는 ‘광복군 제3지대 주평진대대 2중대장을 맡았고 중대원들에 대한 훈련도 실시했다.

해방 후에 초래 된 좌 우익 대립은 광복군 내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밤을 새워 사상논쟁을 벌이고 중대장 박정희의 명령에서 이탈하기 도 했다. 이 시기 박정희가 어떤 사상적 입장을 취했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여운형을 줏대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 어 떤 사람이 “중대장 동무!”라고 부르자 “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 라고 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미군정 당국 은 수송선단을 배치하여 한국으로 가기 원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실어 날랐다. 주평진대대 사람들은 1946년 4월 29일 북경을 떠 나 당고항을 경우하여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장충단 근처에 있던 귀국자 임시수용소 에 머물다가 구미로 내려갔다.
고향 구미에서 약 4개월을 보낸 박정희는 서울에 올라와 1946년 9월 24일 3개월 과정의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1945 년 12월 8일

[1945 년 12월 10일 오전 11시 경, 광복군 평진대대는 야외훈련중 무장한 중국군부대의 습격을 받고 전원 체포되고 북신교(北新橋)의 막사까지 연행되어, 부대원들은 모두 해산되고 간부들은 영창에 감금당합니다. 몇 시간 뒤 모두 풀려났지만 부대내에 침투한 연안파(延安派 중국 공산당계)의 모함의 결과였음이 판명됩니다. 동족간의 이념투쟁은 구걸의 삶을 이어가던 남의 나라 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보기였습니다. 얼마 뒤 박정희를 중대장동무라고 부르며 시비를 걸어오는 연안계 부대원들의 도전을 받는 일도 있게 됩니다. 박정희가 좌익사상에 대해서 냉소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http://cafe.daum.net/issue21/5NiW/30

박정희가 만주육사에 들어가기전 대구사범 시절 이순신 전기를 읽다가 일본 사람에게 책을 빼앗긴 적이있고 만주군 시절 제8단 에서 중 국 공산당 팔로군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중국인 친구 고인경은 박정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박정희 소위는 겉 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한것 같았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우리가 평천진 이란 곳에 있을때 어느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 인 자리에서 " 여러분! 일본과 공비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는 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 기 어렵다." 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시절 학교 선후배가 모인 자리에서 독립군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광복군 에 참여 하려 했으나 광복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준하가 박정희의 일본군 장교 경력을 문제 삼고 반대를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육사 시절 그의 동기 이섭준의 말을 들어보면 그때 나는 거의 일본인이 다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좀 달랐다. 일본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많았다. 
"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것은 군사학 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한다."고 했을때 "독립이 무었인가?" 라고 물었더니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 증언에서 보듯이 박정희는 일본육사 시절에도 조국의 자주적 독립에 대한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정신은 후에 자립 이라는 새마을 정신으로 이어지고 자주국방 이라는 정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지 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때부터 이순신,나폴레옹 전기를 읽으면서 애국심을 길렀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 의 과학 문명과 군사학을 배워서 힘을 기른다음 일본군과 공산주의자를 몰아내고 남의 나라의 간섭을 안받는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 하려 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정신이 해방후 1961.5.16 군사혁명,반공,새마을운동,자주국방으로 이어진 것이다. 

http://cafe.daum.net/issue21/5NiW/80

동 기생 이섭준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 때 나는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한문성생님은 박정희의 글 속에 무엇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군사학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동기생 이한림 장관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놈을 배워야 왜놈을 이긴다고 하더라"

그 사 이 박정희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이 일어났고 그 사건의 여파로 “건국준비위원 회 구미지부장”을 맡고 있던 셋째형 박상희가 경찰에 살해된 것이다. 10월 1일 대구에서 좌익들이 “쌀배급 일급제 반대, 박헌 영 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 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동을 일으키고, 미군정에 의해 대구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폭동은 주변 농 촌 지역으로 광역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산군 민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조직) 사무국장겸 선산인민위원회 내부부장이던 박상희 는 2천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폭동에 참여하였다. 박상희는 이 과정에서 인간적 포용력을 발휘하여 군중의 폭도화를 방지하여 우익 유지 들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충청도에서 지원 나온 경찰 병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이 박정희에게 어떤 영향 을 미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며, 나중에 형의 피살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 와 그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탐문하여 돌아다니기도 했다. 박상희와 박정희는 나이를 먹으면서 가정적 이념적 갈등을 빚기 도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갈등이요, 시대적 불확실성에서 오는 일시적 마찰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박상희는 박정희의 둘도 없 는 정신적 지주였다. 집안의 실질적 리더였던 박상희는 박정희의 둘도 없는 정신적 지주였다. 집안의 실질적 리더였던 박상희는 부모형 제에 대한 박정희의 모든 걱정을 덜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박정희가 남로당 가입을 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만약 가입을 했다면,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박정희의 좌익연루는 사상적 신념에 의한 전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가 빈농출신이었다는 계급적 배경, 식민지 지식인을 유혹하였던 당시의 지적 분위기, 그가 유일하게 존경하였던 셋째형 박상희의 죽음 이 남로당의 가입을 유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가난을 비롯 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그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엘리트주의적이며 하향적이었다.

우선 숙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당시 숙군 실무 책임자였던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자술서를 직접 읽어 본 몇 안되는 사람이다. 그의 증언을 들어 보자.

“ 박 소령은 육사 재학 시절 형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돼 구미에서 경찰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내려가 보 니 형 친구인 이재복이 유족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더랍니다. 이재복은 박정희에게 ‘공산당 선언’ 등 불온 책자를 건네주면서 남로 당 가입을 권유했고, 또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부추기더랍니다. 자술서 내용으로 보면 박정희는 인간 관계에다 형님에 대한 복수 심이 매우 강했던 것 같았습니다”
  

 

박정희가 일본 천황을 굴복시켰다. 

   김대중이 근 30년 동안 자기를 위해 기사를 썼던 손충무 기자를 1년간 감옥에 보내고, 아주 추운 곳에서 오래 옥살이를 한 손 기자가 병을 얻어 입원하였을 때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으나,

박정희는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하고 순국 선열들의 미기록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하였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하였다.
김희선 열린 우리당 의원이 자신의 백부라고 환부역조 사기 행각을 벌였던
조선 독립군 영웅 김학규 장군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박정희는 제 2 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박정희의 비밀광복군설 역사학적 사실.

 

  

 

 연합국에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될 군사기밀을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김대중이 근 30년 동안 자기를 위해 기사를 썼던 손충무 기자를 1년간 감옥에 보내고, 아주 추운 곳에서 오래 옥살이를 한 손 기자가 병을 얻어 입원하였을 때 

여태껏 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1950년 6월 29일에 처음으로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또 하나의 상륙작전 준비가 1945년 8월에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1945년 4월 하순 독일의 항복 직후 연합국 지휘관들은 태평양 전쟁은 아직 그 끝이 먼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하였으나, 일본 지상군의 위력을 일본과 연합국 모두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전과 달리 지상전에서는 미국이 몹시 불리하였다. 지상전을 위해 지상군을 미국 본토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수송할 방법이 없었으며, 또 그런 느린 병력 수송으로 막강한 일본군 사단들과 전투를 치룬다는 것은 몹시 불리한 여건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해병대 상륙 작전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으며 중국 본토 상륙을 위한 파트너로 광복군을 선택하였었다. 그리고 8월 중에 광복군과 미해병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예정이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6일 전에 러시아군이 만주국을 침략하여

광복군 비밀요원 설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김구 선생이 청년 박정희가 유망함을 보고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권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점은 실제로 박정희가 고향을 떠나 중국 대륙을 여행한 시점, 그리고 광복군이 창군된 시점과 일치하기에 충분히 그 개연성이 있다.

박정희는 만주국 보병8단 작전참모

자,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대륙의 일본군 동향 정보를 광복군에 의존하여야 하였다. 더욱이 8월 하순에 예정되어 있었던 미해병대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아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그러면, 김구 선생은 일본군 정보를 어디서 입수하였을까? 첩보 없는 광복군의 존재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첩보는 일본군 주둔 위치 지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는 박정희 뿐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작전참모였기에, 그리고 지리학과 지도와 측량 분야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였기에 그의 만주국 보병8단 사무실에는 팔로군, 만주군, 일본군, 러시아군 등 각국 군대의 진 배치도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의 편지와 증언이 박정희의 독립운동설을 뒷받침한다.  1995년 봄에 오마이뉴스는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려는 민족문화연구소를 지원하기 위한 특집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기자들을 대거 그의 고향에 보냈다. 그러나 증언은 뜻밖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뿐이었다. 박정희는 일본인들 몰래 학생들에게 한글과 애국가를 가르쳤으며,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민족의 긍지를 일깨워주었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그러면 대구사범학교 교련 교관이 본 박정희는 누구였는가?  수학에도, 문학에도, 미술에도, 음악에도, 운동에 천재였던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꼴찌를 유지하였다. 남들은 비웃었겠지만 그 이유를 대구사범 교련 교관이었던 일본이 아리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교과과정이 황국시민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박정희는 백지 답안으로 항거하였다.

이 짧은 유언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직업적 군인은 이런 편지를 쓸 줄 모른다. 이것은 군인 정신에 관한 것이다. 박정희에게 군인이 되는 길을 열어준 이는 아리카와 대좌였다. 그리고, 만주국이 아닌 조선을 위한 군인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기에 해방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암시가 있었다.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는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뛰어든 것을 알고 아리카와 대좌는 자기 제자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독립운동을 위해 준비할 때임을 유서로 남겼다.
 

그러면 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는가? 1960년대는 이것은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많은 비밀을 묻어 두었다. 본래 한일회담이 기술 이전을 위한 한미일간의 합의였으므로 일본 기술을 최대한 빼와야 할 시기에 묻어두어야 할 비밀이 있었다. 미련한 노무현처럼 반일정서를 권력 장악에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경제 전략이 아니었던 시대였다. 만약 그 시대 대통령이 노무현처럼 나불거렸으면 일본은 전자기술은커녕 제철소 건립 기술조차 한국 대통령에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광복군은 어떻게 일본군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에 전달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조선인이 장교가 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가 일본군 핵심 정보를 광복군에 전달하였을까? 관동군 동맹군이었던 만주국 작전참모로서 박정희는 고급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신뢰할 국가관을 가진 청년으로 일본군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박정희 외에 또 다른 이가 있었을까?

 

던 것은 아니었다.  2차대전 후에 CIA로 재편된 OSS는 정말로 있었으며, 광복군 OSS, 즉 비밀광복군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의 두 개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다.  수년전 미국은 광복군 OSS 상륙훈련작전 영상물을 공개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이 사실 위에서 독립운동 사료들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몽당연필이란 말을 아는가?  지금은 필기류들이 흔하디 흔할 것이나, 1960년대 초만 해도 국산 필기도구라는 것이 없었다.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은 연필 한자루 생산할 능력이 없는 나라였다.  당시 연필이란 생나무를 깍고 구멍을 내어 흑심을 박은 것이었다.  그런 연필로 글을 써보았는가? 석탄가루 만진 모양 손이 금방 시꺼매졌으며, 글씨를 쓸때마다 훅심 잔가루가 당시 누렇던 공책 종이 위에 훝어졌다.  그나마 한 자 쓸때마다 흑심이 부러져 글자 몇자 쓰기 위해 당시 무딘 칼로 몇번이나 연필을 깍아야 했다.  그래서 제대로 사용할 만한 연필 한 자루 생산할 능력이 안되던 나라에서는 외제 몽당연필도 귀중품이었다.

만주국은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자립국방이 불가능하였다.

조선인은 만주군곤학교에 지원할 수 없었다.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조작
 

   대한민국을 미군이 건국하였다고 우기는 이들이 만주국을 관동군이 세웠다고 우긴다.  이런 거짓말이 만악의 뿌리이다.  러시아군이 다시 남하하고 있어서 언제 또 다시 러일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던 때에 만소국경 경비는커녕 관동주 자유항과 만주철도 수비하기에도 벅찬 겨우 일만 명의 병력으로 국토가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합친 것보다 몇 배이며, 조선 인구의 여러 배나 되는 큰 나라를 건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좌익이 1931년의 관동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싶어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만주에 그런 큰 대국을 금새 건국하는 일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에게도 불가능하다. 

   만주국 건국의 주체는 수십년간의 무장한족의 철권통치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던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었으며, 관동군은 단지 보조적인 역할로 건국에 한 기여를 했을 뿐이었다.  미국 건국기에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과 화란 등 유럽 제국의 이주민들로 구성된 여러 소수 민족들이 각각 건국에 한몫의 기여를 했었다.  결코 조지 워싱턴이란 영국군 장교 혼자서 미국을 건국한 것이 아니었다.  훗날 대한민국 등 여러나라들의 건국 모델이 되었던 만주국 역시 다민족 국가였으며, 만주족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힘을 합쳐 건국한 나라였다.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이 영국인들과 나란히 미국 건국의 주체였던 것처럼 조선족과 일본족이 만주족과 나란히 건국의 주체였다.  결코 전체 인구의 50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던 일본족 단독으로 건국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역사논리는 이런 사실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만주국은 최단시일 내에 국가제도가 아주 잘 정비된 나라였다.  만약 우리나라가 옛 왕조들처럼 국가 제도 정비에 긴 세월이 걸려야 했었다면 신생국 대한민국은 곧 소멸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주국이란 건국 모형이 있었다.  비록 신생국 만주국은 건국초부터 시작된 러시아군과 중공군의 침략을 이십 년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53년 중국에 합병되었지만, 그 성공적인 건국 모형은 남한과 북한의 건국 및 국가운영에 그대로 응용되었다.  조선족으로 중학교 중퇴 학력의 김일성은 무식하였으나 그는 만주국 건국을 방해하던 공산주의자 입장에서 한 신생국 만주국 건국과정을 견학하며 배울 수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 체제가 여태껏 북한에서 굳건한 이유는 그 체제가 레닌식 공산주의 체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비록 김일성이 나쁜 방향으로 공산주의 독재국가 건설에 응용하였으나, 그 건국 모형 및 국가운영 방식은 만주국 모형을 본딴 것이었다.

  

  1979년 12월 18일 보통 군법회의에서 비공개로 행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에서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는 "5.16도 10월 유신도 범법이 아니라면 자연히 10.26의 혁명도 범법이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투쟁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10.26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혁명이 되고 맙니다"라고 말하였음을 위의 1996년 9월 18일자 MBC 뉴스동영상은 보여준다.  이때 김연석 기자의 멘트 "김재규는 이 최후진술에서 이른바 서울의 봄과 광주시민항쟁을 예고해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가 들린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16_6172.html )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김재규가 예언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운동권 변호사들이 시키는대로 말했음을 반영한다.  김재규의 최후진술 직전 면회한 운동권은 그렇게 말해야 그도 운동권도 혁명의 명분을 얻게 된다며 그를 설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 김재규의 부하 정승화가 참모총장이었던 1979년 김영삼씨는 군인이 정치하면 안된다고 말했고, 정승화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1987년 12월 김영삼씨가 말을 싹 바꾸어 정승화를 신민당 고문으로 추대하며 정승화의 신민당 입당 환영행사를 성대하게 치루었다.  그로부터 8년후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은 위헌을 해가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너뜨리며 12.12특별법을 제정케 하여 1996년 12.12-5.18 재판이 마무리될 무렵 월간지 신동아 10월호가 김재규의 최후진술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고, MBC가 방송했다. 즉, 운동권의 어거지 역사 논리의 승리를 자축한 것이다.

  무엇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 정승화의 손을 들어준 12.12-5.18 재판의 잘못된 역사 논리였던가?  12.12사태는 정승화에게 김재규 공범의 의혹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키려 한데서 비롯되었다.  김재규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정승화는 대통령의 권한을 침범하여 합수부장을 해임시키고,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로 좌천시키려 했다.  합수부장 해임을 합수부의 사실상의 해체를 의미하며, 김재규를 수사하던 수사기관의 해체는 김재규의 사면복권을 의미하였다.  그러기에 김재규를 소리없이 도왔던 정승화의 손을 들어준 판결은 가히 운동권이 김재규를 10.26혁명 열사로 미화시키는 작업이 가능케 하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로 이제 김재규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무엇이 12.12-5.18 재판의 역사논리였던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을 체포하였으며, 수사한 것은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의 유신정권에 반기를 든 행위였다는 것이요, 광주시민들이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의 유신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논리였다.  쉬운 예로,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반역자요,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충신이었다는 어거지 주장에 비유될 수 있는 논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1980년 5월의 전민봉기 논리였던가?  북한군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5월 21일자의 아래 대자보를 보라.

   5월 21일 아침 발행된 위 대자보는 "저 악랄한 유신독재자 박정희놈의 하수인 최규하, 신현확, 전두환놈의 악랄한 만행을 보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이 문구는 전혀 박정희-최규하의 4공화국 헌정을 수호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없다.  도대체 일국의 대통령을 최규하놈이라고 부르는 말투는 어느 나라 말투인가? 

   무슨 이유에선지 전남대 5.18연구소는 이 대자보 발행인 명칭을 "전·조대학생혁명 위원회"로 수정하였다.  자, 여기서 혁명위원회라는 명칭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위의 김재규의 발언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박정희 대통령만 희생시키면 된다는 주징임에 비해, 이 혁명위원회는 국가 전복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저런 혁명위원회가 전남대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5.18연구소도 너무 이상했던지 발행인 명의를 "전·조대학생혁명 위원회"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유령단체일 뿐이다.  대자보 원문에서는 그 명의가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인데, 아마도 이것은 북한군이 실수로 북한식 표현을 쓴 듯하다.  광주사태 때 비협조적 광주시민들에게 화를 내면서 북한군 입에서 북한 말씨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정체가 노출될까 하여 광주시민들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광주에 해방구는 설치할 수 있었으되, 이처럼 아직 노골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1980년 봄의 거의 모든 대자보 문안들은 힉생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배후 세력이 작성한 것이었다.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 등의 표현은 군대식 명령이지, 전남대 학생들의 표현이 아니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부모뻘, 혹은 조부모뻘 어른들에게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군대 명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나라식 군대 명령이었던가1  그 단서가 발행인 명칭에 있다: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  남한말에 아직 서툴렀던 간첩은 "전국대학생혁명위원회"라는 의미의 명칭을 사용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조선 대학생이란 표현은 북조선 대학생과 남조선대학생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를 함축한다. 

   자, "광주는 부른다"라는 글귀가 보이는 아래 포스터는 광주사태 당시 북한의 포스터이다.  이 포스터는 남조선 학생들이 광주에서 북조선 학생들을 부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 아래 동영상 4:30 에서부터 북한에서 광주사태를 생중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주사태와 때를 같이하여 북한 말로 북조선 학생들이 광주인민봉기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자, 위의 대자보를 하루 전인 20일의 대자보와 비교해 보자.  20일에는 그 명의가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가 아니라 학생혁명위원회였다.  왜 이렇게 작성자 명의가 자주 바뀌었는가?  이것은 그 명의가 얼굴 없는 명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요, 남한에 그 실체가 없는 명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만약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 혹은 학생혁명위원회 등의 단체들이 실재했다면 이것은 김대중 홍위병들의 내란 음모가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나 전남대에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가 있었는가?  광주 학생들이 부모뻘 시민들에게 "무기를 제작하라!...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우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등의 군대식 명령을 내렸는가? 

   시민군 대장이 그런 군대식 명령을 광주 시민들에게 내렸는가?  아니다.  박남선씨가 정체불명의 인물들로부터 시민군 대장으로 지명받은 때는 위의 두 대자보가 유포된지 훨씬 후였다.  학생 혁명군은 시민군 대장조차 모르는 군대이다.  전남대 학생은 그 누구도 학생 혁명군이란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학생 혁명군이란 명칭은 하나의 군대 조직을 지칭한다.  그리고 모든 군사 조직은 군사 지휘관이 있을 때에만 통솔과 운용이 가능하다.  자, 시민군 대장조차 누가 무기 탈취를 지휘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시 정비공이었던 박남선씨는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따라서 시민군 배후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만이 설명해 줄 수 있느 사건들이 있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어디서 왔는가?  북한은 5월 18일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생방송 중계를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오후 7시부터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매일 광주사태를 생방송 중계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그 누구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사람들이 6월 24일에 드디어 내일 6.25 전쟁이 터진다는 정보를 알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6.25라는 명칭은 훨씬 나중에 붙은 것이고, 그 당시에는 북한군이 휴전선을 침범하는 일이 늘상 있었기 때문에 국방장관조차도 그날의 전투가 전면전의 시직인 줄 알지 못했었다.  

   광주사태 초기에도 그 누구도 그것이 광주사태인 줄 알지 못했다.  5월 18일 오후 1시 반경 김대중 조직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이것이 광주사태의 서막이라고 광고했던 것이 아니다.  유언비어에 속은 수백 명의 시위대가 두어시간후 순경 45명을 납치하였을 때 이것이 광주사태의 서막이라고 광고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사흘 전 서울에서는 십만 명이 운집한 시위가 있었으며,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였는데, 그와 비슷한 사건은 광주에서 5월 20일 밤에야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광주사태라는 단어도 개념도 없었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은 5월 22일 목포의 북한군이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어 서울의 김대중 홍위병들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발행하였고, 언론이 그 대자보 명칭대로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3일 이후였다.

   신군부라는 용어도 김일성이 처음 지어낸 용어였듯이, 광주사태라는 말도 북한군이 처음 사용하였다.  광주사태의 어원은 5월 22일 목포의 북한군이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한데서 비롯된다.  무엇이 목포사태였던가?  목포 주재 박홍서 조선일보 기자조차도 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같이 본사로 송고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래 기사에서 보듯 5월 23일자 조선일보 7면 왼편에서 목포에 복면부대가 등장하여 총쏘며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그런데 위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루 전에 목포에서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자보가 등장한다.  이 대자보에서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가 두번 사용되고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한번 사용된다.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는 순간이다.  자, 5월 21일 전남도청 등 주요관공서들이 시민군에 함락됨으로 그날 오후부터 경찰이 시민군 지휘 하에 들어가는 해방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목포의 대자보가 경찰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누가 누구에게 군대식 언어로 명령을 하달하는 것인가?

http://www.doklipkunga.co.kr/doklip/

  

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

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

☞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광주사태 바로 알기
질문 포인트

*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들이 전투 용어들로 가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 광주사태라는 용어는 어느 세력이 가장 먼저 사용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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