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 조작으로 판명되다

   드라마에서는 해방이 되는 날 모두가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사람들이 태극기 제작 방법을 몰랐다. 우리는 일제시대의 조선인들이 모두 애국가를 알고 있었다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애국가를 전혀 몰랐다. 생전 들어보지고 불러보지 못한 애국가를 어떻게 알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일제시대에 불러보지 못한 애국가를 해방의 감격과 더불어 마음껏 불렀으리라고 우리는 상상하고 싶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해방된지 여러 달 지나서야 공식행사에서 처음으로 지금의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지금처럼 TV가 있는 때도 아니요, 라디오 생산공장이 있었던 때도 아니었다.  애국가 악보도 가사도 구할 수 없었던 때라 아직 대다수 국민들은 아직 애국가를 들어보지 못했었다.  이러한 때에 육사에서는 박정희가 처음으로 애국가를 보급하였다.

   우리 민족이 해방된지 1년 하고도 두어달 지난 1946년 가을이었다.  아직 대한민국 건국 이전이지만 국토 경비를 위해 미 군정청이 창설한 태능 육군사관학교(아직 4년제 육사가 시작되기 전의 단기과정)에서는 제 2기생 교육 중이었다.  사관학교장은 이치업 육군 대위였는데, 그는 명색이 국군의 간성을 교육하는 육사교장이면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애국가를 알지 못해 답답한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생도들에 애국가 가사를 쓰라는 문제를 내고 시험을 치루었던 것이다.  생도 전원이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는데 딱 한 명의 생도가 애국가 4절 가사를 정확하게 써냈다.  그가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치업 교장이 박정희 생도를 불러 애국가를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박정희는 대구사범 졸업 후 교편을 잡는 동안 학생들에게 몰래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대답했다.  가사는 현재와 같으나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별의 노래)'을 차용해 불렀을 때였다. 안익태 곡의 애국가는 그 뒤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육사에서 비로소 애국가가 불려지게 됐다. (이치업.스티븐 엠.딸프 공저 '번개장군' : 2001 원민)  

   이치업 당시 교장의 이 증언은 문경의 그의 제자들의 증언으로 확증된다.  이영태(李永泰)는 스승 박정희가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고 증언한다.  그는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의 ‘박정희’ 79쪽).

   박정희가 애국가와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증언들을 위의 오디오는 뒷받침해준다.  신세대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러 노래들을 작사, 작곡하여 국민에게 보급하셨는데, 위의 오디오에서도 애국가 다음에 들리는 "나의 조국" "잘살아 보세" "맹호부대 군가" 등 세곡의 노래가 모두 박정희가 작사, 작곡한 노래들이다. 나의 조국이란 노래를 다시 들어보라. 과연 그 어느 시인이 저런 가사를 작사할 수 있으며, 그 어느 음악가가 저런 곡을 작곡할 수 있는가?물론 우리 모두 우리의 조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 그러면 어째서 만주국은 결코 일본군일 수 없는지 설명해 보자.  만약 사기꾼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민족문화연구소는 박정희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두차례나 입학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박정희를 일본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약 일본이 박정희가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다면 무엇하러 나이 트집을 잡아 두차례씩이나 불합격시켰겠는가?  박정희는 1940년 2월 불온교사로 찍혀 문경의 교사직에서 면직되었고, 바로 그 다음 달, 즉 1940년 4월 4일에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3수하려면 2~3년 걸리는데 어떻게 3월 한 달 사이에 3수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일본이 일본군 장교를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국가관에 관한 신원조회였다.  불온교사로 찍혀 면직된 박정희는 다시는 그 어느 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을 수 없었다.  그의 불온교사 경력은 그 어느 직장에 취직하는데도 불리했을 경력이었다.  하물며 국가관이 가장 중요한 일본군 장교로 그를 선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분경에서 교필을 잡던 박정희가 1940년 2월 갑자기 면직된 사유는 그가 불온교사였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교사를 면직할 때 그 사유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박정희가 일본인 몰래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동안 한 학생이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웠다 (황실광의 증언).  천황에게 신사참배하는 것이 강요되던 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순희씨에 따르면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제자 이순희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60쪽)

   만약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이런 불온교사 경력의 박정희는 신원조회에 걸려 절대로 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곧 입학이 취소되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국은 일본의 신원조회망을 벗어난 철저한 제3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자, 다시 위의 오디오의 두번째 노래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서, 박정희가 어떻게 그런 가사를 작사할 수 있었을까?  그 실마리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 유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강산으로 수학여행가서 박정희 학생이 쓴 여행소감에 나라없는 민족의 恨이 배어 있었다.  "금강산아, 너의 자태는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데, 우리는 왜 ..................." 무슨 일인지 끝을 맺지 못한 그의 글에 그의 아픔 마음이 이렇게 배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1939년 3월 31일자 ‘민주신문’ 기사의 사본을 공개했을 때 지난 수년간의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은 조작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기사가 보도한 일곱 단어의 혈서는 군관후보생이 되려는 각오를 표현한 "一死以テ御奉公"이다.  도대체 여기 어디 진충보국이란 낱말이 있다는 말인가?  박정희의 지원서가 일본 천황에게로 배달되었다는 종전의 주장과 달리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의 하급 계원에게로 그 지원서가 배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 썼다는 그간의 사기꾼들의 주장도,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여덟 자의 혈서를 썼다는 주장도 모두 새빨간 거짓말들이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무엇이 미개인의 논리인가?  "원숭이 궁덩이는 빨갛다.  사과는 빨갛다.  고로 원숭이 궁덩이는 사과다"는 것이 미개인들의 논리이다.  만약 생물학자 홍길동이 원숭이 궁덩이는 빨갛다고 말했고, 우리가 그의 주장을 트집잡으려면 원숭이 궁덩이는 새빨간 것이 아니라 붉으스럼하다는 말로 트집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노사모가 생물학자 홍길동이 원숭이 궁덩이는 사과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은 조작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자 홍길동은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한 혈서 해프닝이다.  박정희가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를 썼다며, 그 원문 기사를 공개했는데, 盡忠報國은커녕 그 비슷한 글자도 없다.  분명 생물학자 홍길동이 한 말은 "원숭이 궁덩이는 빨갛다"였는데, 민족문화연구소는 홍길동이 "원숭이 궁덩이는 사과다"라고 말했다며 남의 말을 제멋대로 조작하여 발표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가 위의 영상물에서 보듯이 민족문제연구소측은 지난 2004년에는 조선족 작가를 돈으로 매수하여 책 내용까지 조작한 바 있다.  박정희가 1939년 독립군을 토벌한 공로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책을 출판함과 동시에 친일청산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지난 5일 공개한 신문은 박정희가 1939년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또한번 입증한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측이 벼룩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난 2004년 그렇게 책 내용을 조작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을 국민에게 사과하는 말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 반성조차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자, 이 사기꾼 집단이 박정희 혈서 기사라며 신문을 공개했으니, 그 공신력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만주신문의 공신력에 문제가 있다. 만주신문은 창간된 적도 창간호도 없는 신문이었다.  만주신문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만주국 국민들도 전혀 안 보는 신문이었으며, 일본인들도 안 보는 신문이었다. 만주신문은 만철 기관지였으며, 만철 기관지는 민족문화연구소측에서는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되는 신문이었다.  신문 자체의 공신력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사가 조작 투성이라는 것은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미련한 좌빨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공개한 박정희의 서신 내용 전체를 박정희가 혈서로 썼다고 주장하거니와, 그것이 불가능함을 좌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박정희의 친필 서신의 한 예가 바로 아래에 있는 서신 사진이다.  서신이 너무 길어 여기 전체를 올리지 못하나 원문 전체를 https://www.bookstore21.net/korean/photo/park-jh/park-letter-lee.jpg 에서 볼 수 있다.

   위에서 우리가 보듯 한국어가 국어인 우리도 흘려쓴 필체 때문에 박정희의 친필 서한 중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종종 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지원을 위해 문의 편지를 썼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만주국 관리들은 일본어를 몰랐는데, 박정희가 어느 언어로 서신을 보냈는지조차 그 기사만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입학지원서의 일부인 지원자의 서신을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가 신문사로 보내는 것이 가능한가?  혈서가 있다면 왜 혈서 사진도 없고 혈서 목격자도 없는가?  왜 기자가 보도하지 않고 정체 불명의 편집자가 보도하는가?  도대체 편집자 눈으로 직접 혈서를 본 것인가 못 본 것인가?  만주국 관리가 입학지원서를 만주신문에 보낸 것이 아니라면 신문 편집자도 그 혈서를 본 바 없고, 단지 만주국 하급 관리가 보낸 메모를 보도했다는 말인가?  혈서 사진도 없고 혈서를 목격했다는 기자도 없다.  그리고 혈서와 함께 보냈다는 서신도 조작된 채 인용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그 편지에 (전략) (중략) (후략) 등의 글자들이 계속 여러 차례 반복된다.  즉 서신을 발췌 공개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발췌 공개할 때 그것이 바로 조작이다.  발췌 인용은 할 수 있어도 발췌 공개는 할 수 없다.  부득이 발췌 공개할 때는 원문 사진을 반드시 공개하여야 한다.  원문 사진이 없으면 출처가 없고, 출처가 없으면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신문 편집자가 남의 서신을 편집하면 그것은 이미 사실 보도가 아니라 기사 조작이다.  그리고 과여 그런 조작 기사를 근거삼아 박정희를 친일명부에 넣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위의 2004년 3월 2일자의 MBC 뉴스동영상에서 징병과 징용을 선동, 강요한 행위 등이 반민특위 조사 대상이라고 보도되었음을 우리는 본다.  그러면 여운형과 김대중을 조사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면 되는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동시대 여운형의 글에는 사진들이 있다. 그 이유는 그 글들이 지금껏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여기 여운형의 학병 권유 격문이 실린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사진이 있다.


▲ 그리고 여기 '반도이천오백만동포에게 호소함'이라는 격문 제목과 '여운형씨 수기'라는 필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왜 동시대 박정희의 서신을 공개한다면서 서신 목격자도 없고 서신 사진도 없고, 민족문제연구소 편에서는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될 만철 기관지에만 여기저기 삭제되고 조작된 채로 보도되었다는 말인가? 

   여운형이 저렇게 격문 쓴다고 조선의 학도들이 선동되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은 학생 연설에 선동된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대중처럼 일제시대 말기에 학생회장이었던 자들은 일본의 조선인 황국신민화 정책의 앞잡이들이었다고 한다.  김대중이 목포상고 학생회장 시절 일본군복을 입고 황군 입대 지원 권유 유세를 하였다.  (아래의 목포상고 졸업 앨범 사진들에서 일본군복을 입은 김대중의 모습이 주목된다.)

  

   황국신민화 정책에 앞장서 출세한 인물이 바로 김대중이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목포 선박회사 사장이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측에 물어보자.  도대체 김대중이 친일의 댓가로 일본인들로부터 선박회사를 받은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가 불온교사로 찍혔듯이 불온학생으로 찍혀서 그런 큰 선물을 받은 것인가?  김대중은 1997년 대선 유세 때 자신이 경제 대통령이라는 착각을 국민에게 주기 위하여 목포 선박회사 운영 경험을 국민들에게 자랑하였었다.  그런데, 그 회사는 하의도라는 섬 출신 김대중이 땀흘려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본군복 입고 설치면서 일본인들의 총애를 받아 얻은 것이었다.  

   김대중은 사람들에게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수법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김정일에게 몰래 8억불을 송금한 후 2000 년의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과 악수하는 장면으로 전세계인이 어떤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이처럼 김대중은 사람들이 착시현상에 빠져 선동당하게 하는 잔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잔재주를 일제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다.  자, 여운형이 딱딱한 글로 학도병 지원 권유를 한다고 청년들이 입대하는가?  김대중이 학생회장 직함을 달고 연설하며, 일본군복 입고 유세하니 김대중 자신도 인기를 끌고, 학생들 눈에 일본군 군복 입은 모습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아래 사진은 그로부터 근 반세기가 지난후 김대중이 여전히 히로히토 일왕에게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보도한다.

   그때도 우리는 일본왕을 일왕으로 칭하였다.  그런데, 목포상고 시절의 친일근성이 몸에 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더니 운동권 독재자다웁게 일왕 호칭을 천황으로 바꾸었다. 

    자,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 정책을 폈을 때 박정희와 김대중 두 젊은이가 있었다.  박정희는 학생시절에는 황국신민 관력 학과목에 백지 답안을 체출함으로 항거하였다.  불온학생 박정희가 시골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자, 그때 조선청년들이 할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우리말을 가르치고, 애국가를 가르치고, 태극기 제작법을 가르치고,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 말을 보존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간직하며,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한 우리 가슴 속에는 민족 혼이 간직되고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빼앗긴 조국을 위해 험난한 길을 택했던 박정희와 달리 김대중은 목포상고 시절에 이미 일본에 부역하던 출세주의자였다.  만일 당시 조선인 청년으로서 할 수 있었던 일, 즉 조선어와 애국가와 태극기 제작법과 우리 역사를 가르친 인물이 친일파라는 논리이며, 그 논리는 황국신민화 정책 부역자로서의 학생회장이었던 김대중이 학도병 지원 권유 연설을 하며, 일본 군복을 입고 일본인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공연을 한 것은 항일이었다는 논리인가?

   그러면 김대중이 목포상고 시절 어떤 연설을 하였었는가?  여기 아래 김대중처럼 일본을 위해 부역하였던 민주당 신기남 의원의 부친 신상묵이 쓴 글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공개한 기사는 물론 조작 기사임에도 박정희는 결코 천황폐하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황폐하한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은 민족문제연구소 관련 인물들이었다.  만주국군은 그 누구도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신상묵처럼 경성과 평양 훈련소에 입소한 자들이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자신을 일본남자로 간주하는 위의 신상묵의 글에서 "우리들이 폐하의 군인이 되는 것은"이란 문구가 보인다.  이것은 입학지원을 위해 개인 서신이 아니었다.  이것은 출판된 글이었다. 

   어찌 민족문화연구소측 친일파 세력이 단지 여운형과 김대중과 신상묵뿐이었겠는가?  김희선 의원의 부친 김일련은 또한 어떠하였는가?  일제시대에 면장을 지낸 유시민의 아버지 유태우와, 훈도노릇을 하던 유시민의 백부, 훈도였던 김근태의 아버지, 일본유학파 출신 청양면장이었던 총독부 공무원 이해찬의 아버지, 일본군 오장이었던 이미경 의원의 아버지, 조선인으로 일본 천황의 경호원이 됐던 일본헌병 장교 이봉권, 나석주 의사를 사살한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조합의 직원으로 20년 근속한 정진철, 정동영의 부친 등 민족문화연구소측 친일파 세력의 수는 무수히 많건만 왜 모두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져있는가?
 

2009년 11월6일 <오마이뉴스>는 지난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기구로 발족했던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해당 매체와의 통화에서 “박 전 대통령은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1939년자 <만주신문> 기사를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만주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자(1939년 2월24일)와 혈서 관련 기사(3월31일)의 순서가 모순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실상 사장됐다. [시민일보 2012년 12월 5일자]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 기사 조작

☞ 북한 지령으로 제작된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