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 <행동강령>무기를 제작하라!...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우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등의 살벌한 문장들로 가득한 5월 20일자의 대자보는 북한군 534부대가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분명한
사실은 전남대에는 학생 혁명군이라는 것도 학생혁명위원회라는 것도 없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라는 제목의 위의
대자보와 삐라는 불순세력이 제작한 것이었다. 광주사태에 불순세력의 개입이 있었다. 그러면 그 불순세력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
1980년 5월 18일 시작된 광주사태는 김대중의 전국연합 조직이 야기하였으나. 5월 19일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5월 21일
노골화된 무장폭동에 북한군이 개입되어 있었다.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보았던 광주사태의 발단은 1979년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의 북한의 남침 계획이었다. 무엇이 광주사태였는지 광주사태(광주인민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1979년 11월
중순부터 반년간 했었던 한 특수부대 지휘관의 고백을 통해 들어보자.
광주사태 때 여러 조의 특수부대들이 광주에 투입되어 있었는데, 그 중 534부대가 주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증언의 신빙성을 위해 남한의 독자들은 과연 534부대가 있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이 부대 타격대장 안창식 대위와 내연
관계였던 탈북 여성은 이 부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후에 소문났지만) 부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73쪽)
광주사태 때 투입되었던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에게는 이토록 뛰어난 투검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처음 듣는 정보이다.
그런데 1996년 5.18재판이 막 마무리되었을 무렵이었던 1996년 9월에도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체포된 북한군 역시 타격대 소속이었다. 아래 동영상 5:25~5:36에서 우리는 이미 그해 1996년 9월에 비슷한 증언이 있었음
확인한다: "10미터 앞에 있는 표적은 백발 백중 제압할 수 있는 투검 능력이 있고."
자신의 실명을 밝히는 전 북한군 하사관 빅행운은 534부대와 신천복수여단 등이 광주에 침투하였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사건에
참가하였던 534부대와 신천복수여단 등 부대들은 그때 당시에 북한군 특수부대들 중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고 능력이 신비할 정도로
인정받는 최정예 게릴라 부대이기도 하였다" (210쪽). 전 북한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도 534부대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에 김정일이 북한 평강도 지구에 비밀리에 조직되어 있는 534특수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401쪽). 이처럼 여러 탈북자들이 534부대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특수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
534부대 타격대장 안창식 대위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낳은 탈북 여성은 전민봉기 노림수로서 광주인민봉기(광주사태) 준비
작업으로서 534부대 2개 조가 1979년 11월 중순에 잠수함을 타고 목포에 침투하였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대다수
남한 독자들에게는 기상 천외한 증언이나, 놀랍게도 당시 조선일보 기사인 "남민전 , 적화되면 게양할『기』까지 제작"이란 제목하의
11월 14일자 기사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북괴 및 재일조총련의 지령을 받는 남민전이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킨 후
중앙청에 게양할 기까지 제작해 놓았다가 26명이 추가검거되었다. 그러나 잔존세력이 있었으며, 이듬해 2.29복권조치로
사면된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광주사태 배후 세력이자 지휘부였던 것이다.
이 탈북여성은 안창식 대위의 고백을 계속해서 이렇게 전한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째어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79쪽)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시대 상황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김대중이 정당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김대중에게는 정당이 없었고 남민전 관련자들 등 운동권이 그의 지지기반이었다. 그리고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이전에는
지하조직들이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북한의 자료는 10.26 대통령 시해사건을 민중봉기로 남한 정부를 전복시킬 기회로
삼으려 했음을 밝힌다. 남한의 자료들 역시 똑같은 사실을 입증한다. 김대중이 그 배후였던 당시 운동권의 모든
대자보들은 10.26사건을 그들이 유신잔당으로 규정한 최규하 대통령 정부 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선동하였던 것이다.
안창식 대위가 고백하는 광주사태의 팩트 중의 하나가 자폭서약 및 자폭이다. 2차 대전 당시 가미가제 특공대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가미가제 특공대는 자폭서약을 한 일본군 공군을 일컫는다. 우리는 북한군이 남한에
침투하기 이전에 자폭서약을 한다는 것을 몰랐었다. 그러나, 위 동영상이 보여주듯 1996년 5.18재판이 마무리될
무렵에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으며, 탈북자들이 증언하듯 이것이 광주사태의 한 팩트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군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맨위의 5월 20일자 선동대자보에서 말하는 특공대 의미가 파악될 것이다. "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 죽으라고 선동한다. 자폭 정신이 저 대자보에 흐른다.
누가 선동했겠는가? 김대중 그룹이 그렇게 선동했겠는가? 전남대생들이 그렇게 선동했겠는가? 북한군은
자폭서약을 한 후 광주에 침투하였으며, 실제로 자폭한 사건들이 있었다. 물론 당시 여러 대자보들은 김대중 그룹이 제작한
것이었으나, 저 특정 대자보는 그 문구들이 북한군의 자폭서약 및 실천을 연상시킨다.
위 사진에서 총을 든채 지프에 올라앉아있는 두 복면 시민군의 손을 눈여겨 보라. 어디 저 손이 전남대 선비의 손인가?
저 손은 여러 해 특수훈련 받은 자의 손이다. 저 자세를 보라. 군기가 들어있는 저 자세가 어디 광주시민의
자세일 수 있겠는가? 주변의 광주시민들이 저 두 무장시민군을 바라보면서 "민주화운동가들이다"라고 말했던가?
아니다. 저 험악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지 한 시민은 손으로 눈을 가렸으며, 한 시민은 고개를 찌프리며
얼굴을 돌렸다. 그 어느 표정에도 이들을 민주화운동가로 바라보는 표정은 없다. 그리고 저 광주시민들에게 이
무장시민군의 복장을 입혀보라. 절대로 이런 일당 백의 투사의 모습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복면 시민군은
북한군이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맞다는 심증이 가는 것이다.
조총련이 데리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힌츠페터는 5월 20일 저녁에 광주에 들어와 만 하루도 채 못된 21일 오후 광주를 떠났는데,
5월 20일 광주로 들어오면서 그는 (광주 외곽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민군이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5월
21일 광주를 떠나는 날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급박한 상황을 조선일보 서청원 기자는 아래와
같이 송고하였다.
5월 21일 오전에 공수부대 병력이 전남도청 앞에 배치되었던 이유는 그날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광주경찰서와 광주시청이 도청 기밀서류를 안전한 곳에 올릴 때까지 지켜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었다. 광주시민들은 도청을
공격하거나 함락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어느 세력이 도청 함락 전략을 세우고 주도하였는가가 의문이다.
아래 힌츠페터의 영상물에서도 관찰되듯이 무장시민군의 도청 함락작전은 하나의 완벽한 군사작전이었다.
위 영상물 2:26에서 "싸우다 모두 죽자"는 멘트가 들린다. 작전 목적은 도청 함락이면서 그 선동 구호는 "싸우다 모두
죽자"였다. 모두 죽자는 말은 모두 자폭하자는 말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더러 죽으리고 하는 것인가?
전남대생들이 부모뻘 시민들에게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라고 한 것인가? 아니었다. 바로 전날 구호가 전 맨위 대자보에서 보인다.
그 제목은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요, 그 함성은 "싸우다 죽자"였다. 그렇다면 광주시민들이 "싸우다 모두 죽자"고
외쳤던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폭정신무장은 본래 북한군 특수부대의 정신무장이었다.
요컨대, 5월 21일 오전 도청 함락을 목적으로 집결한 무장시민군 사이에 외쳐진 "싸우다 모두 죽자"는 구호는 북한군이 선창한
구호였던 것이다. "싸우다 모두 죽자"는 정신이 바로 저 위 동영상에서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말하는 "총폭탄 정신"이다.
"싸우다 모두 죽자"는 정신으로 무장된 군대는 최강의 군대이다. 깡패가 무서운 이유는 자기 몸 다치는 것을 겁내지
않고 달겨들기 때문이다. 같은 군인들이라도 행정병보다는 보병이, 보병보다는 공수부대가 그런 패기가 강하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군인들이라도 "싸우다 모두 죽자"고 외치지는 않는다. 서청원 기자가 송고한 위의 기사가 보여주듯
시민군 버스에 순경 4명이 깔려죽은 것을 본 공수부대원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남한에서도 군대갔다온 이들은 6주간의 훈련, 몇달간의 신병 생활, 한주간의 유격훈련 등 군복무 중 있었던 특별한 경험들을
수십 년이 지나서도 이야기한다. 안창식 대위는 광주인민봉기(북한에서 광주사태를 지칭하는 용어)를 일으키기 위해 남한에
8개월간 머물러 있었다.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남한 내 좌익세력과 더불어 6개월간 준비했으며, 광주인민봉기가
끝난진 51일후 북상 복귀하였다.
그는 광주에서 자기가 일으킨 교전중 무릎 아래 관통상을 입고 북한에 복귀한지 여러해 후 그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 연인에게 다리를
절단한 사연을 이야기하느라 광주인민봉기와 얽힌 8개월간의 이야기들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가 고백한 광주사태의 사실
중에 자폭서약의 사실이 있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76쪽).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82쪽)
[82쪽 주: 북한군이 광주에서 벌인 작전은 게릴라 작전이었는데, 이것을 소부대작전이라 칭한듯 하다]
전 보위부 반탐부장은 1980년 4월 김대중이 서울에서 지휘하던 민중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했던 조가 자폭훈련을 받았음을
증언한다. "그들이 남조선침투 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자폭훈련이었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 (317쪽).
그는 북한군이 실제로 자폭을 실천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아마도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상대가 몰랐다고 해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하였다.>> (321쪽)
전 북한 3·13공장 지배인도 북한군 자폭 사실들을 이렇게 증언한다. "밥을 먹던 일행 중의 한사람이 광주인민봉기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묻자 그 친구는 자기도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영웅이 말하는데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전투현장에서 죽은 즉시로 남조선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380쪽). 전 남포시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도
이것은 북한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북한으로 돌아와서
영웅칭호를 받았다는 상세한 내용들과 어떤 사람은 중상을 당해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정체가 노출될 것을 염려한 동지들이
그를 사살하고 시체를 불태워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 등 광주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터져 나왔다"
(418-419쪽).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극도로 위험한 순간에도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하였으며,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껏 참전용사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북한군은 부상당한 전우를 자폭시킬 수 있으며, 시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자폭시킬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런 북한군 자폭 사건이 1996년 9월, 즉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이 여론몰이로
5.18(인민)재판을 마무리해가던 때에도 있었다.
http://cafe.daum.net/issue21/5304/110 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아래의 동영상은
1996년 9월의 강릉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11명의 북한군이 자폭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광주사태 바로 알기
질문 포인트
* 누가 광주사태의 주동세력이었는가?
* 북한군 광주 침투 방법에 대하여 탈북자들은 무어라고 증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