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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북한군이 시민군 향하여 발포하다
See how the rioters of the Kwangju Uprising created all kinds of
false rumors. Are there anything in pro-democratic when these rioters
cruelly killed policemen and soldiers by the cars and tanks they stole?
This way they killed five policemen including one soldier on May 20,
1980. And these rioters set the broadcasting companies for reporting the
objective facts. Is there anything pro-democratic in this barbarian
violence?
아래 동영상에서 1988년 8월 4일 목요일 밤 강성구 아나운서가 MBC 뉴스데스크를 시작하려던 참에 갑자기 어느 청년이 뛰어들어
자기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장면을 본다. 무엇이 사실이었는가? 김대중의 도청공화국 시절도 아니었던
1988년에 MBC가 이 청년 귓속에 도청장치를 넣었을리 있는가?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기에 이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여겨져
체포되지 않았다.
이름 : 채수봉 [SUBONG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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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 줄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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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계엄군으로 참가했던 초급장교로서 비무장한 시민에게 집단 발포로 연출한 것은 사실 왜곡이며 군 명예를 훼손했기에 법적 도움을 준단면 실명으로 고발하겠다.
-1980
년 5월 21일 최초 발포(듣기로는 그 전에 계엄군 장갑차가 시동이 꺼지자 시위대가 돌로 유리를 깰려하자 공포)시에 희생자는 장갑
차에 깔린 공수부대원 이었다.시민 시체는 한 구도 보지 못했으며 당일 아침 도청 바로 앞에 군 모포에 덮인 4~5구의 전경 시신
만 보았다.)
-계엄군(11공수)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포가 나가고 시민과 군은 철저히 분리되었으며 일방적으로 무장한 시민군에게 쫒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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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bbs.imbc.com/cwb/cwb-bin/CrazyWWWBoard.asp?mode=read&num=89012&db=2005_pd3&page=1&backdepth=1
)
당시 광주시민으로서 전경으로 근무했으며, 훗날 5.18측 증인이 된 곽형렬 역시 똑같은 증언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대 버스가 들어온 것이다. 결국앞에서 있던 전경들은 양옆으로 피해 버리고 앉아 있던 경찰들이 차에 깔려버렸다.
나는 뒤쪽에 앉아 있어서 혈장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2구의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밤늦은 시각까지도 상무관 앞에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3기동대 소속인 병력이 몇 명 정도 남아 있어서 그들에게,"동료들이 죽었는데 이대로 놔둘 수 있느냐 모포라도 가져다가
덮어주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318&page=48
)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왜 시민군 눈에는 시민 시신만, 군경의 눈에는 군경 시신만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실은
전옥주가 신역에서 발견한 두 구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지프로 끌고 다니는 행위 자체가 비도의적 행위였다. 중상을 입은 사람이나 갓
사망한 사람을 보았을 때는 즉시 병원으로 후송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그 더운날 지프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다섯 시간 넘도록 시체
장사하였다. 그 후에는 그 두 구의 시체를 나주에서 무기 탈취하는데 활용하였다.
전옥주가 지프를 타고 있었다. 북한군이 21일 새벽 신역에서 시위선동용 시신 두 구를 마련해 놓자마자 전옥주가 탄 차가 신역으로
왔다. 어째서 전옥주는 시위대가 순경 4명을 차량으로 깔아죽인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방송을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조총련이
일본에서 데리고 온 힌츠페터 역시 시위대가 순경 4명을 차량으로 깔아죽인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도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전옥주와 힌츠페터가 동시에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 전옥주는 그 시신을 리어커에 실어 자기 방송차 뒤에 연결하였으며
힌츠페터는 그 광경을 촬영하였다.
여태껏 5.18측은 시민군이 5월 21일 한시 반 이후에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했다는 거짓말로 무기탈취를 정당화하여 왔다.
그렇다면, 이미 무기 탈취조가 오전 10시경에 또 그 두 구의 시체를 끌고 나주로 가 정오에 나주에 도착하여 폭동 선동 및
무기탈취에 이용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주에서 무기를 탈취한 후에 신북과 영암과 해남 등지의
경찰서들을 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이다. 시민군이 그 두 구의 시신을 영암과 해남까지 끌고다닌 것인지, 아니면
나주에서 그 두 구의 시신을 팽겨쳤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든 정말로 친구를 사랑한다면 친구의 시신을 이 도시 저
도시로 끌고 다니며 시체 장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선량한 광주시민은 절대로 자기 가족이나 친구 시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주로 그 두 구의 시신을 끌고간 자들이 누구였겠는가?
5월 21일 오후 1시 경의 집단발포라는 것은 시민군의 선제 발포하자 놀란 공수부대원들이 1분간 공포를 쏜 사건을 일컫는다.
여태껏 5.18측은 시민군이 오후 1시의 집단발포 이후에 무기탈취를 시작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수레에 실린 저 두 구의
시체가 이제 그들의 거짓말을 입증한다. 시민군은 오전 10시 경에 저 두 구의 시체 수레를 끌고 나주로 출발하여 12시 경에
나주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그곳에서 탈취한 무기들을 가지고 전라도 각 지역 경찰서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습격하였기 때문이다. 낮 12시 경 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의 거리가 계속 좁혀지고 있던 때에 이미 그 두 구의 시신은 나주로
운반되어 있었으므로 군경 편에서는 그 두 구의 시신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5.18측이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에 대하여 허위주장을 해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화순에서의 무기 탈취 사건이다. 오후 2시경이
아니라, 오전 11시경에 이미 시민군 무기탈취조가 화순을 향하여 출발하였음을 "광주민중항쟁 총일지"는 이렇게 입증한다:
"버스와 트럭에 탄 시위대들이 오전 11시경 화순으로 향했다. 우리가 화순경찰서에 도착하자 무기고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재빨리
도망갔다. 그곳에서 카빈을 탈취하여 그곳 주민과 함께 화순군내를 돌아다니며 차량시위를 했다. 그날 밤은 화순에서 자고 22일
새벽에 광주로 와서 전남대 의대 부근에 있는 시민들에게 탈취한 무기를 나눠줬다." (구술 : 이상배, 현사연 조사)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7&page=69
)
시민군 문관도 상당히 많은 시민군 병력이 이미 오후 1시경에 화순에 도착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오후 1시쯤
광주에서 시위대가 넘어왔다는 말이있어 화순경찰서 앞에 나가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버스 2대와 군용트럭외에도 여러 종류의 차들이
15대 정도 와 있었다. 시위대는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면서 구호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광주에서 난리가 났으니 젊은 혈기 있는 사람은 모두 차에 타시오>(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
/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68&page=38 )
김대중의 내란음모 증거물은 이것이다.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시민군 5월 21일 작전상황을 보도하는 투사회보
2호이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8.html 에 그 전문이 있는 위의
투사회보에서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는
문장이 있다. 그런데 나주에서 차량과 무기 탈취는 위의 수레에 실린 시체 두 구를 끌고 오전 10시경에 나주를 향하여 떠난
시민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이미 21일 오전에 상당히 많은 병력의 시민군이 전라도 전 지역에 퍼져 경찰서들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5월 21일 광주시민군이 전라도 전 지역의 경찰서와 관공서 및 심지어 때로는 군부대까지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하고 있었음을 오직
북한 당국만이 실시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장시민군 속에 끼어있던 북한군들조차 자기 조 외의 활동은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대중의 사조직 역시 전라도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무장봉기 상황을 실시간 파악하고 있었다. 즉, 전라도 각 지역에서의 무기와
차량 탈취, 경찰서 파괴 및 관공서 함락 현황 등을 김대중의 사조직이 실시간 보고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로 반입된 무기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우연히 광주시민군이 5월 21일 오전부터 전라도 전 지역으로 흩어져 무기를 탈취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사전 계획에 김대중의 사조직이 연루되어 있었음을 입증한다.
5월 21일 오전 전라도 전 지역을 향하여 출발한 시민군이 동시다발적으로 각 지역 경찰서들을 초토화하고 있던 시각에 또 하나의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었음을 시민군 이재의는 이렇게 증언한다:
"오늘밤 상무대 병력이 돌고개 부근을 향해 진입할 가능성이 많다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또 31사단 병력이 오치를 거쳐 서방으로
공격해 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 이런 말은 악성 유언비어이다. 상무대 병력, 즉 31사단 병력은 광주향토사단 병력이다.
광주향토사단이 광주를 공격할 리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광주시민들이 국군에 적대감을 품게 하는 자들이
있었다. 또 이런 표현이 수상하지 아니한가: "지금 준비되어 있는 아군의 병력 중 LMG와 기관총 3정은 아세아극장 옥상에 1정,
그 밑 도로변 양옆에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 1정씩 배치하십시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77&page=37
) 북한군 외에 또 누가 국군을 적군으로 간주한다는 말인가?
북한군 침투 사실의 보다 분명한 증거는 위의 시체 두 구를 끌고 나주로 가서 정오부터 무기탈취를 하였던 광주시민군이 신북과 영암을
거쳐 해남과 완도의 경찰서 및 군부대 습격 후 73대의 대병력으로 광주로 돌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군용트럭으로 73대의 시민군
병력이면 가히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한 병력이었다. 당시 진압봉만 든 공수부대 병력이 10 대의 트럭으로 동원된 것에 대해서
광주의 원성이 그토톡 높았다면 73대 트럭의 중무장한 시민군 병력은 가히 엄청난 병력이었다. 훗날 월북한 윤기권이 대동교 박행삼의
제자였는데, 해남으로부터 이런 시민군 대병력을 끌고 광주를 향하여 오던 박행삼은 당시 시민군 대다수는 시민군이 낸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쳤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73대의 차를 이끌고 노안을 거쳐 송정리에 도착했다. 노안과 송정리 사이에 다리가 있었는데 기중기 한 대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해 있었다. 차들을 멈추고 사람들과 다리 아래로 갔다. 추락한 차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즉사했고, 한 사람은
빠져나왔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차에 끼여 있어서 도저히 우리들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차는 아세아자동차에서 빼내온
차라고 했다. 차에 낀 사람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노안국민학교에서 줄다리기 할 때 쓰는
줄을 빌려왔다. 기중기를 묶어 위에서 트럭 세대가 끌었는데 기중기는 끄덕도 하지 않고 밧줄만 끊어져버렸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227&page=54
).
그리고 그 다음날 5월 22일 07:50 의 상황이다.
- 폭도 3백 명 탑승한 군용차 45대 송정리역 집결, 공포 발사. (전교사 작전일지)
이 상황에 대한 5.18측 증언은 이러하다.
- 전날 시외곽으로 나갔던 차량들이 광주로 진입하려다 효천지역에 주둔한 계엄군의 사격으로 길이 막히자 나주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송정리로 이동한 것이다. (현사연 조사 종합)
자, 시민군 군용차 73대 중 3대는 무기반납을 조건으로 먼저 광주로 들어오고, 45대가 송정리역에 집결하였다. 같은 시각
전옥주는 연고생 3백 명이 송정리쪽에서 오고 있다고 방송하였다. 여기서 연고생이란 서울에서 온 연고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인 해남과 완도에서 온 무장시민군을 말한다. 그들이 광주로 들어오려 했으며, 전옥주는 광주시민군을 동원해 그들이 올 수
있도록 지원하려 하였다. 물론, 전옥주는 김대중의 사조직과 간첩이 주는 쪽지대로 방송하였을 뿐이지만, 이것은 북한세력끼리는 연락이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해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탈북군인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시민군 이용일의 증언이다. 이용일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시민군들이 총탄이 시민군 편에서 날라왔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이용일은 5월 21일 오후 1시 이전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라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언한다.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것없이 총을 들었다. 그 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옆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 쪽으로 나뉘어 모두 흩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아예 밟혀버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총을 한 자루 던져주었는데 그는
필요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 장갑차는 얼마쯤 앞으로 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그외에도 몇 대의 차가 도청을 향해서 나가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차 뒤에는 몇몇 사람들이 낮은 포복자세로 따라갔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총을 배급받은 사람들은 총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었다. 한편 사람들은 낮게 떠다니는
헬기를 맞추겠다고 하늘을 향해서 공포를 쏘기도 했다. 나도 총을 받았다. 비록 그 이전에는 쏘아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폼을 잡고 가톨릭센타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 여기에는 군인들이 건물 중심부
쪽 약간 올라온 곳에 철모만 덮어놓고 왔다갔다 하면서 이곳의 동정을 저쪽에다 알려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내가 쏜 총은 그 반동
때문에 울려서 상체가 뒤로 젖혀졌고, 가톨릭센터 건물의 꼭대기를 빗맞고 나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총알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광주은행 새 건물의 옥상과 12층에서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저놈들도 연락병일 것이니까 다 죽여버리고 저 건물을 태워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나이 든 어른들이 이번에 지은 새 건물인데 태우지
말자며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page=10&sn1=&diu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1
)
시민군이 배식차가 못 다니게 하여 며칠째 굶다시피한 공수부대원들과 달리 5월 21일 시민군의 푸짐한 점심식사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그렇다면 "점심때가 좀 지나서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채 차에서 내렸다"는 사실은 일반 시민군을
대상으로 한 무기지급도 이미 낮 12시 경에 시작되었음이 밝혀진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다고
증언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이용일의 증언으로 밝혀진다.
누가 금남로의 시민군을 향하여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발포하였는가? 이것이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사실임을 공감하는 5.18측 논객
이데아는 그 지형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가톨릭센터는 도청 앞에서부터 시작 금남로 1가의 끄트머리 즉, 도청
앞에서 전방으로 1Km 이내의 좀 떨어진 장소입니다.
이곳은 사거리이고, 이 사거리 한모퉁이에 가톨릭센터가 도청을 바라보는 쪽으로 위치해 서있으며, 양쪽길이 각각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으로 갈립니다." (http://cafe.daum.net/issue21/3Fdk/4629
)
이것이 중요한 난제이다. 다수의 시민군 부상자들은 정면이 아니라, 고층건물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았다고 증언한다.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울린 총성이 있었으며, 이것이 첫번째 총성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쏘았는가? 도청 앞에서 전방으로 1km 떨어진 시민군
점령지역은 그 시간대에는 공수부대원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탈북군인들은 군복차림의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시민군과
계엄군 양편을 향하여 총을 쏘며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총격전을 부추겼다고 한다. 그러면, 과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계엄군 쪽을
향해서도 총을 쏘았는가? 그 사실을 위의 채수봉님이 이렇게 확증한다:
"건너편 고층 건물 15층 정도에서 흰 y셔츠를 입은 사람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아 은행(중간크기 나무)잎을 스치면서 땅을 튕겼다."
이름 : 채수봉 [SUBONG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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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언해서 설명합니다.공포가 있자, 철저히 계엄군과 시민은 분리 되었으며 중앙에 장갑차를 중심으로 바리케이트가 쳐치면서 우리 팀은 도청을 왼쪽으로 두고 정비소 담벼락에 기대어 쉬고 있으면서 본 광경은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중간에 노인네가 길을 가로 질러 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건너편 고층 건물 15층 정도에서 흰 y셔츠를 입은 사람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아 은행(중간크기 나무)잎을 스치면서 땅을 튕겼
다.저격수의 맞대응으로 주저앉음(공포가 나가기전 군 트럭,장갑차,예비군 소총이 탈취된 것으로 추정됨)
-100m 왼쪽 전방에 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버스 앞으로 몽둥이 휘두르면서 2,3명의 젊은이가 오자 장갑차에서 2발 정도 사격을 가하자 사라졌다.
-잠시후 폐허의 거리를 따라(일부 공포) 조선대학교로 퇴각하여 밤새도록 무등산 뒤로 쫒기며 도망만 다녔다.
-우린 시민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
이로써 탈북자들의 증언대로 실제로 시민군과 계엄군 양편을 향하여 발포한 무장폭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시민군과 계엄군
양편을 향한 첫 발포는 5월 21일 12시 58분경에 있었으며, 이른바 집단발포라는 사건, 즉 시민군 진영 총소리에 놀란
공수부대가 1분간 공포를 쏜 사건은 이렇게 빚어졌던 것이다.
역사학도 2010. 2. 16
☞ 세계기록유산이 될 5.18 대자보: 미
항공모함 유언비어
☞ 북한판 5.18도서가 암시하는 시민군 윤기권의 월북 이유
☞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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