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8일 보통 군법회의에서 비공개로 행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에서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는 "5.16도 10월 유신도 범법이 아니라면 자연히 10.26의 혁명도 범법이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투쟁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10.26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혁명이 되고 맙니다"라고 말하였음을 위의 1996년 9월 18일자 MBC 뉴스동영상은 보여준다. 이때 김연석
기자의 멘트 "김재규는 이 최후진술에서 이른바 서울의 봄과 광주시민항쟁을 예고해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가 들린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16_6172.html
)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김재규가 예언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운동권 변호사들이
시키는대로 말했음을 반영한다. 김재규의 최후진술 직전 면회한 운동권은 그렇게 말해야 그도 운동권도 혁명의 명분을 얻게
된다며 그를 설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 김재규의 부하 정승화가 참모총장이었던 1979년 김영삼씨는 군인이 정치하면 안된다고 말했고, 정승화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1987년 12월 김영삼씨가 말을 싹 바꾸어 정승화를 신민당
고문으로 추대하며 정승화의 신민당 입당 환영행사를 성대하게 치루었다. 그로부터 8년후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은 위헌을
해가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너뜨리며 12.12특별법을 제정케 하여 1996년 12.12-5.18 재판이 마무리될 무렵 월간지
신동아 10월호가 김재규의 최후진술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고, MBC가 방송했다. 즉, 운동권의 어거지 역사 논리의 승리를 자축한
것이다.
무엇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 정승화의 손을 들어준 12.12-5.18 재판의 잘못된 역사 논리였던가?
12.12사태는 정승화에게 김재규 공범의 의혹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키려 한데서 비롯되었다.
김재규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정승화는 대통령의 권한을 침범하여 합수부장을 해임시키고,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로
좌천시키려 했다. 합수부장 해임을 합수부의 사실상의 해체를 의미하며, 김재규를 수사하던 수사기관의 해체는 김재규의
사면복권을 의미하였다. 그러기에 김재규를 소리없이 도왔던 정승화의 손을 들어준 판결은 가히 운동권이 김재규를
10.26혁명 열사로 미화시키는 작업이 가능케 하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로 이제 김재규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무엇이 12.12-5.18 재판의 역사논리였던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을 체포하였으며,
수사한 것은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의 유신정권에 반기를 든 행위였다는 것이요, 광주시민들이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의 유신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논리였다. 쉬운 예로,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반역자요,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충신이었다는 어거지 주장에 비유될 수 있는 논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1980년 5월의 전민봉기 논리였던가?
북한군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5월 21일자의 아래 대자보를 보라.
5월 21일 아침 발행된 위 대자보는 "저 악랄한 유신독재자 박정희놈의 하수인 최규하, 신현확,
전두환놈의 악랄한 만행을 보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이 문구는 전혀 박정희-최규하의 4공화국 헌정을 수호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없다. 도대체 일국의 대통령을 최규하놈이라고 부르는 말투는 어느 나라 말투인가?
무슨 이유에선지 전남대 5.18연구소는 이 대자보 발행인 명칭을 "전·조대학생혁명 위원회"로
수정하였다. 자, 여기서 혁명위원회라는 명칭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위의 김재규의 발언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박정희 대통령만 희생시키면 된다는 주징임에 비해, 이 혁명위원회는 국가 전복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저런 혁명위원회가 전남대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5.18연구소도 너무 이상했던지 발행인 명의를
"전·조대학생혁명 위원회"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유령단체일 뿐이다. 대자보 원문에서는 그 명의가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인데, 아마도 이것은
북한군이 실수로 북한식 표현을 쓴 듯하다. 광주사태 때 비협조적 광주시민들에게 화를 내면서 북한군 입에서 북한 말씨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정체가 노출될까 하여 광주시민들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광주에 해방구는 설치할 수 있었으되, 이처럼 아직
노골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1980년 봄의 거의 모든 대자보 문안들은 힉생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배후 세력이 작성한
것이었다.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 등의 표현은 군대식 명령이지,
전남대 학생들의 표현이 아니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부모뻘, 혹은 조부모뻘 어른들에게 "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군대 명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나라식 군대 명령이었던가1 그
단서가 발행인 명칭에 있다: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 남한말에 아직 서툴렀던 간첩은 "전국대학생혁명위원회"라는 의미의
명칭을 사용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조선 대학생이란 표현은 북조선 대학생과 남조선대학생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를 함축한다.
자, "광주는 부른다"라는 글귀가 보이는 아래 포스터는 광주사태 당시 북한의 포스터이다.
이 포스터는 남조선 학생들이 광주에서 북조선 학생들을 부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 아래 동영상 4:30 에서부터 북한에서 광주사태를 생중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주사태와 때를 같이하여 북한 말로 북조선 학생들이 광주인민봉기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자, 위의 대자보를 하루 전인 20일의 대자보와 비교해 보자. 20일에는 그
명의가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가 아니라 학생혁명위원회였다. 왜 이렇게 작성자 명의가 자주 바뀌었는가? 이것은
그 명의가 얼굴 없는 명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요, 남한에 그 실체가 없는 명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만약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 혹은 학생혁명위원회 등의 단체들이 실재했다면 이것은 김대중 홍위병들의 내란 음모가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나 전남대에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가 있었는가? 광주 학생들이 부모뻘 시민들에게 "무기를 제작하라!...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우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등의 군대식 명령을 내렸는가?
시민군 대장이 그런 군대식 명령을 광주 시민들에게 내렸는가? 아니다. 박남선씨가
정체불명의 인물들로부터 시민군 대장으로 지명받은 때는 위의 두 대자보가 유포된지 훨씬 후였다. 학생 혁명군은 시민군
대장조차 모르는 군대이다. 전남대 학생은 그 누구도 학생 혁명군이란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학생
혁명군이란 명칭은 하나의 군대 조직을 지칭한다. 그리고 모든 군사 조직은 군사 지휘관이 있을 때에만 통솔과 운용이
가능하다. 자, 시민군 대장조차 누가 무기 탈취를 지휘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시 정비공이었던 박남선씨는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따라서 시민군 배후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만이 설명해 줄 수 있느
사건들이 있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어디서 왔는가? 북한은 5월 18일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생방송 중계를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오후 7시부터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매일 광주사태를 생방송 중계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그 누구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사람들이 6월 24일에
드디어 내일 6.25 전쟁이 터진다는 정보를 알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6.25라는 명칭은 훨씬 나중에 붙은
것이고, 그 당시에는 북한군이 휴전선을 침범하는 일이 늘상 있었기 때문에 국방장관조차도 그날의 전투가 전면전의 시직인 줄 알지
못했었다.
광주사태 초기에도 그 누구도 그것이 광주사태인 줄 알지 못했다. 5월 18일 오후 1시
반경 김대중 조직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이것이 광주사태의 서막이라고 광고했던 것이 아니다. 유언비어에
속은 수백 명의 시위대가 두어시간후 순경 45명을 납치하였을 때 이것이 광주사태의 서막이라고 광고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사흘 전 서울에서는 십만 명이 운집한 시위가 있었으며,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였는데, 그와
비슷한 사건은 광주에서 5월 20일 밤에야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광주사태라는 단어도 개념도 없었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은 5월 22일 목포의 북한군이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어 서울의 김대중 홍위병들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발행하였고, 언론이 그 대자보 명칭대로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3일 이후였다.
신군부라는 용어도 김일성이 처음 지어낸 용어였듯이, 광주사태라는 말도 북한군이 처음 사용하였다.
광주사태의 어원은 5월 22일 목포의 북한군이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한데서
비롯된다. 무엇이 목포사태였던가? 목포 주재 박홍서 조선일보 기자조차도 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같이 본사로 송고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래 기사에서 보듯 5월 23일자 조선일보 7면 왼편에서 목포에 복면부대가 등장하여 총쏘며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그런데 위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루 전에 목포에서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자보가 등장한다. 이 대자보에서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가 두번 사용되고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한번 사용된다.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는 순간이다. 자, 5월 21일
전남도청 등 주요관공서들이 시민군에 함락됨으로 그날 오후부터 경찰이 시민군 지휘 하에 들어가는 해방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목포의 대자보가 경찰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누가 누구에게 군대식 언어로 명령을 하달하는 것인가?
"군과 경찰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당장 색출하여 가차없이 처형하라" -- 복면무장단체가 이렇게
지시한 것인가? 목포의 모든 파출소들과 주요 관공서들을 파괴하고 쑥대밭으로 만든 범죄자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지시를
하는 것인가? 이런 고압적인 지령은 전혀 민주적 의사전달 방식이 아니다. 그리고 학생혁명위원회 명의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들과 그 작성자가 동일인이었음의 관찰되는 목포의 이 대자보는 목포가 북한군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아지트였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자료 중 하나이다. 동일 배후세력이 광주에 뿌린 삐라에서는
목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으니 싸우다 죽으라고 선동하고, 목포에서는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이 있으니 순경들을 즉결 사형에 처하라고
선동한다. 즉, 국가전복의 수순으로서 광주에서 유혈무장폭동을 선동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목포사태라는 말을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으나, 목포에 광주사태
선동을 위한 북한군 아지트가 있었다는 탈북여성의 증언을 읽고 남한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목포사태라는 것이 있었으며, 광주사태의
전개과정에 대한 중요 단서들이 목포사태에 있었다.
탈북자들의 5.18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에서 그녀는 부마사태, 목포사태, 광주사태
배후에 동일 북한군 조직이 있었음을 이렇게 기술한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79쪽).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81쪽).>>
그리고, 부마사태가 10.26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이어졌으며 부마사태와 광주·목포사태
사이에 세개의 김재규 사건이 있었다. 김재규의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가 첫번째 사건이었으며, 김재규 부하들과
합수부간의 충돌로 야기된 12.12사태가 두번째 사건이었으며, 5월 하순으로 예정된 김재규 사형 집행이 그 세번째 사건이었다.
1995년 5월1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 1부 장윤석 부장검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낸 서면질의에 대한 소견과 논평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당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5월 하순의 김재규 처형 예정일에 맞춘 남한의 대규모 시위와 더불어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었음을 이렇게 기술한다:
<<▲1980년 5월 10일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으로부터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남침첩보에 대한 보고를 받았음.
▲당시 중앙정보부가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북한 남침제보의 내용은,북한은 한국정부가 80년 4월 중순경에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하고, 김재규 처형시에는 항의 데모사태가 발생하여 남침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하여
남침시기를 4월 중순경으로 예정하였으나 김재규의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이를 연기하여 오던 중, 80년 5월 들어 학생과
노동자의 소요사태가 격화됨에 따라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80년 5월15일에서 5월20일어간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었음 (http://www.study21.org/518/document/president_reply.htm).>>
그런데, 이 남한 자료가 탈북 여성이 전해주는 북한 자료와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사북탄광사태 배후에도 동일한 북한군 조직이 있었음을 밝히는 이 여성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술한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78쪽).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79쪽).>>
그녀의 증언을 더욱 확증해 주는 북한 자료 중에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교시가 있다: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
1980년 5월 광주사태 직전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는 왜 북한군이 작성한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들에서는 "학생 혁명군" "학생혁명위원회" 등의 명의가 들어있었는지를 시사한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한국논단
2007년 2월호 )
여러 탈북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광주사태 전에 이미 여러 달 체류하며 무기탈취 준비 등 간첩
역할을 한 북한군 특수부대가 있었다. 그런데, 5월 18일경 잠수함을 타고 남한에 침투해 봉기군과 합세하다가 25일 경
갑자기 북상복귀한 300 명씩 두 떼거리의 북한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은 1995년부터 시작된 탈북자들의 일치된
증언이기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2005년 5월 17일 기자 출신 한영진 등 세 명의 탈북인이 쓴 기사에서 "북한의 특수부대 한 개 여단이 잠수함을 타고 서해로 들어가 무장 봉기군과
합세했다"는 말이 광주사태 당시 북한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증언한다. (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300&num=5488.)
맨위의 1996년 9월 18일자 뉴스에서 우리는 성경섭 기자의 이런 멘트를 듣는다. "또
오후 6시 45분쯤에는 잔당으로 추정되는 거동 수상자 2명이 캐피탈 승용차를 타고 대관령 방향으로 달아났다는 신고도 들어와
있습니다. 이들이 타고 간 차량은 캐피탈 승용차 강원 2다의 4440호입니다. 혹시 이 차량을 발견하거나
거동수상자를 대관령 부근 지역에서 발견한 주민들은 즉각 인근 군부대나 경찰로 신고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17_6172.html ).
아마 과민한 반응에 의한 신고였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거동이 수상하다고 하는가? 무장간첩 잔당 두
명에 대해서도 이처럼 온 국민이 불안해 했다. 그러나 (탈북자들의 증언이 사실일 경우) 1996년 9월 침투한북한군의
수는 1980년 봄에 광주 등에 침투해 있던 북한군의 수에 비해 지극히 적은 것이다. 그럴진대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가.
본래 광주시민군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당시 전남대생들에게 물어보라. 모두 무기
반납을 원했다. 운동권 학생들조차 무장봉기에 반대했으니, 시민군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1일
저녁~22일 새벽부터 복면무장단체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과격파 시민군이 등장한다. 그리고, 5월 26일 갑자기 시민군
수가 확 줄었다. 남한 자료만으로는 풀지지 않는 이런 의문의 수수께끼의 퍼즐 맞추기를 탈북자들이 전해주는 북한 자료가
해주지 아니하는가!
전옥주는 누군가가 (간첩이) 주는대로 쪽지를 받아 선무방송을 했지만 300명씩 두 떼거리의 연고생이
광주시민군 합세하기 위해 광주로 오고 있다는 말을 자신도 믿을 수 없다. 더구나 한 떼거리의 연고생 300명은
목포쪽에서 온다고 하니 그때는 그렇게 방송했지만, 속은 느낌이라고 훗날 증언했던 것이다. 만약 연고생 300명이
위장용어였다면 북한 자료가 맞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머지 300명은 북한 동해안 신포지역의 馬養島(마양도)에서
출발해 잠수함을 타고 전남 지역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찰국 5부장이 공해상에서 대기 중인 배에 타고 현장을 지휘했다고
한다"는 북한 자료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http://study21.org/518/discuss/nk300.htm) 백 명 단위의 복면무장단체가 목포에 출현한 것을 박홍서 기자가 먼저 확인하였고, 이어 그들이 광주에도 등장한
것을 김영택 기자가 확인하였다. 날자와 장소 및 사건 등의 정황이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목포의 북한군
아지트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으며, 몇몇 광주사태 선동 삐라 및 무기탈취 등의 사건 배후에 목포 아지트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