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목포사태와 5·18유공자 이준규 전 목포서장


    수학 논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5.18사기꾼들의 주장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5월 21일 오전에 초보 운전 난동자들이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군용차량을 과속으로 몰며 무기탈취하러 다니다가 광주에서 낸 대형교통사고로 수십 명이 사망하자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를 지어낸 것이다. 문재인의 경찰영웅 선정 논리 역시 황당하다. 목포사태는 광주사태와 동시에 발생하였었다. 1980년 5월 21일 120명의 무장괴한들이 목포경찰서를 습격하자 이준규 서장은 자신도 도망갔을 뿐만 아니라 부하 경찰관들도 모두 도망가게 하였다. 지난 2018년에 문재인 정부는 그것을 공적의 근거로 이준규 전 목포서장을 5·18유공자로 인정해 주더니 지난 10월 21일 오전에는 충남 아산의 경찰인재개발원에서 열린 제 75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이 고 이준규 서장을 경찰 영웅에 선정했다 (뉴스1 2020.10.21). 즉, 지금도 무장괴한들이나 난동자들이 경찰서에 침투하면 항복하고 도망가는 것이 경찰관의 영웅적인 행동이라는 것이 문재인의 논리이다. 목포에서 무장난동자들이 단지 경찰서를 점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해안경찰서를 파출서를 전부 파괴하였다. 해안경찰서가 파괴되면 북한군이 목포를 안방처럼 드나들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5∙18유공자요, 경찰영웅이라는 것이 문재인의 논리이다.

    광주사태 40주년 전자도서 5∙18(오발) 유공자 무용담 197쪽 이하에는 목포사태 당시 목포에서의 북한군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목포사태 때 목포에서 북한군들이 활약했다는 것은 문재인 정부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보훈처에서 5.18유공자 명단 공개를 안해 주면 목포경찰서를 습격하고 목포 해안 초소들을 점령했던 무장괴한들의 정체가 광주시민들이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째서 문재인 정부는 그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부하는가? 그것은 목포사태를 일으킨 자들 중에서 광주시민이 아닌 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1980년 5월 21일과 22일 양일간에 걸쳐 목포경찰서를 습격하고 점거하였던 무장괴한들 중에서 분명히 북한군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있었음을 5∙18(오발) 유공자 무용담 197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5월 22일 오후 8시 5분경에 목포시 상락동 한국양복총판 앞 노상에서도 전날 나주에서 이종연 군이 당한 교통사고와 똑 같은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 즉 목포에서도 관공서를 접수하여 해방구를 설치한 시민군 차량들이 날이 어두워진 후에도 도로를 질주하며 차량 퍼레이드를 하다가 시민군 군용트럭에서 22세가량되는 청년이 떨어져 사망하였다. 그는 아스팔트 도로에 머리가 부딪히는 순간 입은 뇌타박상으로 인한 호흡 및 순환중추마비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즉시 목포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사고발생후 불과 5시간 만인 익일 새벽 1시 15분에 사망하였다 (5∙18사료 20:359).
    안타깝게도 이 시민군은 나주 청소년 이종연 군과 같은 5∙18유공자가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민군들이 누군지 모르는 그는 지문으로도 국민 신분 확인이 안되었다.

5∙18(오발) 유공자 무용담 197쪽
▲ 5월 21일 목포에 침투한 시민군들 중에 북한군이 있었음을 밝혀져 있는 "5∙18(오발) 유공자 무용담" 197쪽.

    2006년 12월부터 탈북군인들이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증언하기 시작하자 2008년 11월 조갑제 기자는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제목의 글을 쓴 이래 지금껏 조 기자는 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조 기자와 탈북자들의 증언의 차이는 목포사태이다. 탈북자들은 목포사태에 대하여 증언하고, 탈북자들의 증언을 부정하는 조갑제의 주장에서는 목포사태는 부정된다. 목포사태를, 즉 목포에서도 무장폭동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탈북자들의 5∙18증언, 즉 북한군 서해안 침투설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갑제는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었으므로 북한군 서해안 침투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최규하 권한대행이 선포한 계엄령은 물계엄이었다. 조갑제의 주장은 마치 광주사태 당시 계엄군이 빽빽하게 경비하고 있었다는 착각을 주는데, 이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정보 역시 일종의 허위정보이다. 목포에는 단 한 명의 계엄군도 없었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 때 서해안 경비를 해양 경찰이 담당하고 있었다. 1980년 광주사태 때도 목포 해안 경비는 목포경찰서 관할이었다. 목포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갑제는 계엄 하에서는 경비가 철통 같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에 조갑제 주장대로 이준규 전 목포경찰서장이 서해안 경비를 철통같이 하였으면 문재인 정부가 그를 5∙18유공자로 인정해 주고, 문재인이 금년 10월 21일에 그를 경찰영웅으로 선정해 주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서해안 경비가 철통같았었다는 조갑제의 허구 소설과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무장괴한들이 출현하자 경찰 병력이 모두 해안 경비를 포기하고 도망갔다. 이준규 목포경찰서장과 경찰이 모두 도망갔을 때 조선일보 목포주재기자는 박홍서였다. 박홍서 기자는 서해안 경비가 철통같았었다는 조갑제 기자의 소설과 달리 실제 상황은 경비는커녕 해안경찰서와 시내 파출서가 무장폭도들에 의해 모두 파괴된 상황이었음을 본사에 다음과같이 송고하였다.

경찰서가 무장폭도들에게 점령당한 목포 상황
▲ 5월 22일 새벽 두 시경에 목포에서는 해안경찰서와 파출서가 전부 파괴되었음을 송고한 박홍서 기자 취재일지.

    광주시민들에게는 목포 해안경찰서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었을 터인데 멀리 목포까지 가서 해안경찰서와 파출서들을 밤새도록 파괴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광주사태에 대하여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즉흥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이 역사라고 평생 우기는 조갑제는 광주사태 당시에는 경비가 삼엄하여 사람들이 광주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였고, 광주에서 외부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였다고 주장한다. 만약 5월 21일과 22일 상황이 조갑제 주장대로 무장단체가 전혀 광주와 목포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목포경찰서를 습격한 무장단체는 어디서 온 무장단체였는가?

    광주사태 때 서해안에 가본 적이 없는 조갑제 기자는 마치 당시 삼면 해안이 물샐틈 없이 경비가 삼엄하였던 것처럼 소설을 쓰고, 직접 광주에 침투했었던 탈북군인은 전남 백수해안을 통해 침투하였다고 증언한다. 아래 동영상은 광주사태 현장에 있었던 계엄군으로서 광주사태 이후 15년간 서해안 섬에서 근무했었던 김덕수 대위의 백수해안 답사 동영상이다.

▲ 광주 토박이 계엄군 출신 김덕수 대위가 2019년 2월 16일 전남 백수해안에 답사하여 북한군 침투 가능성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조갑제 기자는 5∙18성명서를 전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광주사태 발생 한 주 전에 무장폭동계획서를 작성하였던 문재인 정부 5∙18진상조사위 위원장 송선태는 아래의 5월 20일자 성명서에서 학생혁명회 위원이 누구인지를 밝혀주어야 한다. 이 성명서를 보면 무장폭동은 원래 서울, 대구, 마산, 전주, 군산. 이리, 목포 등 전국에서 일으키라는 지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조갑제 기자는 여태껏 5∙18성명서를 전혀 읽어보지 않고 있기에 탈북군인들의 증언이 사실과 부합함을 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5월 20일자 5∙18성명서.
▲ 5월 20일자 5∙18성명서를 작성한 학생혁명위원회의 이념적 정체성이 몹시 수상하다.

    목포에서 무장난동자들이 경찰서와 파출서를 파괴하는 것조차 막지 않고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 경찰병력을 모두 철수시켰을 때 광주에서 김대중의 사조직 핵심인물 윤상원은 아래의 유인물을 제작하여 대량 유포하였다. 그 내용은 이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승리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투사회보는 적화통일단체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기관지이다. 무장폭동이 전라도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이 투사회보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광주시민의 민주. 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 오고 있다.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5월 22일자 5∙18성명서.
▲ 광주의 김대중의 사조직의 제작한 5월 22일자 무장폭동 선동 유인물

    2009년 9월 하순에 북한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단체에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라는 제목의 5∙18증언록을 출간하였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특수군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7개월간에 걸처 조별로 잠수정을 이용하여 남한에 침투하였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74~75쪽).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88쪽). 그들 조는 1980년 3월 말경에 남조선으로 침투할 데에 대한 임무를 받고 한 달 정도의 가상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다음 1980년 4월 말경에 출발하여 남포항에서 구소련에서 들여온 디젤잠수함에 승선하였고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안(어느 지역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음)에 상륙하여 서울시내로 침투하였다 (p.316).

    조갑제 기자는 광주사태 북한개입이 없었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로서 목격자가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 조갑제는 민간의 복장의 북한군들이 옷에 북한군 표식을 달고 다녔을 것이고 생각하는가? 탈북자들의 증언은 정반대이다. 남한에 침투한 북한군은 북한군 침투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p.76).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p.82).
    그들이 남조선침투 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자폭훈련이었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 (317쪽). 그는 아마도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상대가 몰랐다고 해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하였다 (p.321).
    밥을 먹던 일행 중의 한사람이 광주인민봉기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묻자 그 친구는 자기도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영웅이 말하는데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전투현장에서 죽은 즉시로 남조선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p.380). 누구는 죽고 누구는 북한으로 돌아와서 영웅칭호를 받았다는 상세한 내용들과 어떤 사람은 중상을 당해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정체가 노출될 것을 염려한 동지들이 그를 사살하고 시체를 불태워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 등 광주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터져 나왔다 (Pp.418-419).

    1996년 가을 김영삼 정부의 여론몰이 5.18인민재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북한의 다음 관심사는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였다. 그리고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동해안 암초에 걸려 북한군 작전은 실패하였고, 한 택시운전사의 신속한 신고로 조기에 북한군 정체가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들이 잠수함으로 침투하고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5.18증언을 뒷받침한다. 새터민들은 또한 광주사태 때 시민군으로 활동한 북한군은 정체가 탄로나면 자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하거니와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던 1996년의 강릉무장간첩 침투사건 때는 실제로 북한군들이 자폭을 하였다. 아래의 두 뉴스 동영상은 1996년 9월 18일 MBC가 방송했던 영상 뉴스이다.

    <<오늘새벽 1시를 전후해 이곳 해안으로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20명 가운데 11명은오후 2시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5km정도 떨어진 강릉시 강동면 청학산 정상부근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잔당 가운데 한명인 31살이 강수는 인근 지역에서 생포되고 8명이 현재 계속 군경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숨진 채 발견된 11명은 침투조가 아닌 승무원으로 추정되며, 비무장의 광부복장으로 머리에 총살을 입고 있어서 자살했거나 도주한 잔당들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체발견에 앞서 오전 10시 20분쯤 청학산 부근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 교전으로 한때 오인이 됐지만 이때 11명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5_6172.html)

<<처음엔 무장간첩과 군경의 교전소리로 알려졌던 이 총성은 간첩들이 자살하면서 낸 소리로 밝혀졌습니다.

● 현장목격 장병: 오전 중에 총성을 들었고 저희들은 교전중인 걸로 알았는데 교전중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라는 것을 올라와서 확인했습니다.

● 기자: 현장에는 수류탄 2발과 권총 1자루가 발견 되었습니다.

군경은 이들 무장간첩이 궁지에 몰리자 수류탄 자폭과 권총 자살 중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당한 것으로 보고 계속 현장 주변을 위주로 매복과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6_6172.html)

● 앵커: 이번 동해안 침투 간첩단 가운데 유일하게 생포된 31살 이강수는 잠수함 승무원이었으며 침투 간첩은 모두 20여명이라고 밝혔습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7_6172.html)

당초 주민들이 신고한 지점들이 말해주듯이 침투한 간첩들은 최초 강동면 임곡 2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 산등성이를 따라 자살한 잠수정 승무원들과 아직 검거되지 않은 일당, 즉 공작원들 2패로 나뉘어 태백준령으로 도주했습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8_6172.html)  

● 신상길 준장(합참 작전차장): 금일 17시경에 육군 68사단 173연대 수색병에 의해 최초 침투지점으로부터 서남방 5km 떨어진 청학산 부근에서 북괴 무장간첩 11명이 자폭한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1명을 생포, 조사 중이며 우리 軍은 나머지 잔당을 계속 추적 중에 있습니다.

● 기자: 또 생포된 간첩의 신원은 최종적으로 인민 무력부 정찰부 소속 이강수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9_6172.html)

● 앵커: 북한 잠수함이 발견되고 나서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3시간 반이었습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0_6172.html)

● 기자: 오늘 발견된 잠수함은 북한이 지난 86년 기존의 상어급소형 잠수함을 변경해 자체 개발한 것입니다.

비정규전이나 특수 공작용으로 만들어진 이 잠수함은 길이가 34m, 폭이 3.8 m이고 물위에서는 7노트, 수중에서 12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특히 물위에서보다 물속에서 속도가 훨씬 빨라 침투에 용이하다는 것이 이 잠수함의 큰 특징입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 잠수함이 원산에서 발진할 경우 강릉까지는 4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1_6172.html)

부산 청사포항 무장간첩선 격침사건 등 7∼80년대에도 무장 공작원의 도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70년 이래 모두 3백여 건의 대남 침투 사례가 있었습니다.

한해에 10여건 꼴입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3_6172.html)

● 기자: 새벽 1시 35분 5km가량을 급히 달려 이진규氏는 강동파출소에 도착했고 잠수함의 위치를 경찰에 알렸습니다.

● 이진규氏(최초 신고자): 신고를 해야 되겠다고 돌고래 같은 물체가 있는걸 보니제가 잠수함은 보지도 못했는데 잠수함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https://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3_6172.html)

 * 위의 뉴스동영상은 단 몇시간의 사건 진행과정만을 보여주나 51일간의 대간첩작전 전모는 https://cafe.daum.net/issue21/5304/110 에서 영화로 볼 수 있다.

(2020년 10월 2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