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기 전에 먼저 구름이 낀다. 구름은 비의 가시적인 조짐이다. 광주사태도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라, 먼저 광주민중봉기의 조짐들이 이처럼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대중과 데모꾼들이 1980년 봄에 민주화운동을 하였는지 아니면 종북좌파 운동을 하였는지를 알아보려면 먼저 김대중의 거리정치 단체였던 국민연합이 어떤 성격의 단체였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1980년 봄에 김대중은 아직 정당이나 정당 소속이 없었고, 그의 거리정치 단체인 국민연합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국민연합은 그 거창한 명칭과 달리 실제로는 국민이 없는 단체였다. 일본 조총련 산하 한민통의 한국지부였던 이 단체는 한민통과의 관계가 노출되지 않게 하려는 지하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김대중의 한민통 청년 동지 문세광이 1974년 광복절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 이래 한민통과 김대중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1980년 4월 7일 김대중이 신민당 입당을 취소하고 국민연합에 복귀하겠다고 기자 인터뷰를 한 지 불과 사흘 만인 4월 10일 날 오후 8시 경에 북악파크호텔(북악스카이파크 호텔) 501호실에서는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국민연합 10 여명의 간부들이 대권 경쟁에서 김대중이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를 이기는 방법을 논의했다. 3월에 야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하여 김대중은 그 해로 예정된 제5공화국 대통령 선출 대선에 출마할 자격을 상실하였는데 어떻게 김영삼을 이길 수 있는가? 그 방법은 이란의 호메이니를 모방한 민중봉기를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킨 후 스스로 집권하는 것이었다. 광주의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요원 윤상원이 이미 윤한봉의 추천으로 사무국장에 내정된데 이어 그날 국민연합은 신속하게 김대중의 홍위병들을, 즉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복학생 장기표를 조직국장, 복학생 심재권을 홍보국장, 복학생 조성우를 중앙위원에 각각 임명했다.
국민연합이 5월 3일에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7일에 '민주화촉진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선언문에서 "노동자, 청년, 학생들의 민주-민권 운동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각계각층의 민주 애국시민은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등의 문구는 김대중의 말이 아니라, 북한 대남공작기관의 선동 어구들이었다. 폭력시위하면 남북통일이 되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는 것인가? 국민연합 중앙위원 조성우는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 윤한봉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 선언문은 국민연합 중앙상임위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그 선언문 작성자는 소년빨치산 출신으로서 김일성에게 충성하던 박현채였다.
국민연합과 윤한봉의 관계는 훗날 1993년 그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였을 때 국민연합이 서울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준 환영식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윤한봉, 『운동화와 똥가방』, p. 25 참조). 정용화는 그의 증언록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에서 자신이 광주사태 당시 자신이 갑자기 현대문화연구소장직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직을 겸직하여 맡게 되었던 경위를 이렇게 서술한다:
김대중이 광주에 정치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협조한 윤한봉은 오늘날 많은 광주시민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김대중의 충복은 아니었다. 1982년 12월 미국에 온 김대중을 이듬해 여름에 만난 후의 그의 일성이 "김대중은 과대망상증 환자다"였다. 그는 한마당에서 1996년 발행한 그의 회고록 『운동화와 똥가방』 138~139 쪽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회고한다:
윤한봉의 회고록은 광주사태의 내막을 살짝 밝힌 회고록이었다. 그러나 책머리에 그가 쓴 글은 김대중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표현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는 회고록 집필의 이유를 "DJ의 중상모략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나를 경계하고 있는 분들에게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늘 김대중과 앙숙 관계였다. 그는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지는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망자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1980년 봄 김대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로 알려졌던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소외받는 인물이었다.
윤한봉뿐 아니라, 박효선 등 다른 광주운동권들도 김대중은 광주사태에 모르면서 광주사태 강연을 했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김대중과 그의 광주 동지들 사이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분명한 시각차가 있다. 김대중과 윤한봉의 경우 처음부터 동상이몽이 있었다. 그래서 1993년 미국에서 만나자마자 갈라졌고 앙숙이 되었다. 그럼에도 1980년 5월 초에 김대중과 광주의 종북좌파 운동권 사이에 내란 혹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동맹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김대중과 광주 종북좌파 운동권간의 가장 큰 연결고리는 국민연합 중앙위였다. 중앙위 상임위원장 문익환 목사의 결정이 바로 김대중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의 손발이 조성우 중앙위원이었다. 조성우는 1980년 5월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민주청년협의회는 유령단체이고, 그 실제 명칭은 ‘전남민주청년협의회’라고 부를만 했다. 그만큼 민청협 회원들이 서울이 아닌 전라남도에 많이 있었다. 어째서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광주사태 혹은 광주민주화운동과 동의어가 되었는가? 민청협이 김대중의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 주축이었는데, 민청협 회원 구성원 수가 서울보다 광주에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 그 주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보아야 어째서 1980년 5월 17일 오후 10시부로 실행된 치안본부의 예비검속 대상에 김상윤 등의 광주운동권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글에서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광주사태 당시에는 '학원소요 배후조종'이란 명칭으로 일컬어졌었다. 즉, 국민연합과 민주청년협의회가 그 배후조종 세력이었으며, 그 핵심인사들이 예비검속 대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도대체 민주청년협의회가 어떤 단체였는지를 알아야 광주사태의 내막을 파악할 수 있다. 민주청년협의회는 사실상 유령단체에 가까웠기에 국민들 중 그런 단체 이름을 들었거나 기억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운동권에서조차 그런 단체가 언제 생겼으며 언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민주청년협의회'란 이름은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방한일이 가까울 무렵인 1979년 5월 11일의 운동권 성명서「카터의 방한을 반대한다」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그후 '11.24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 재등장하였으며, 이어 12월 9일 조성우가 민주청년협의회 위원장 명의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한다 (1970年代 民主化運動 IV. p. 1711-1715). 유령단체 대표답게 조성우는 어떤 때는 회장, 어떤 때는 위원장 명의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그 고문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민주청년협의회 결성이 시도되었다가 흐지부지되었다. 그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민청협은 속빈 강정이요, 유명무실한 단체였다.
그런데 이 유령단체가 1980년 5월 8일 다시 등장하여 김대중과 광주 종북좌파 운동권 사이에 폭력시위 동맹을 맺게 하였다. 여기서 그 내막이 중요한 것이다. 윤한봉의 여성동지였던 고경희는 월간중앙 1988년 5월호에 기고한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에서 민주청년협의회는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 산하 부서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또한 현대문화연구소는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면서 비교회운동과 현장운동에 대한 접근을 꾀하였고 산하 부서 안에 양서조합, 민주청년협의회, 여성들의 송백회, 그리고 근로여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들불야학」 과 문화패「광대」(당시 대표 김정희)를 두고 있었다." 김성 광주일보사회부기자도 월간지 예향 1988년 11월호에 "광주ㆍ전남‘의식권’탄생주역 윤한봉"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1978년 출옥한 윤한봉이 "공개적으로 민주청년협의회를 구성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1980년 봄에 민주청년협의회의 실체는 전라남도 지하조직 ‘전남민주청년협의회’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1980년 5월에 '민주청년협의회' 명의로 최규하 정부의 헌정질서를 중단시키려는 김대중 일당의 음모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을 때 그 몸통이 전라남도 지하조직이었던 것이다. 1993년에 윤한봉이 귀국하였을 때 국민연합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한 것은 그의 옛 동지 조성우 등이 주선한 것이었는데, 민주청년협의회 회장 직함을 사용하던 조성우가 국민연합 중앙위원이었다.
우리는 이런 전후관계에서 윤한봉의 동지 조성우가 5월 8일 국민연합 중앙상임위원장인 문익환 목사의 지시를 받고,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폭력시위 행동지침을 결의한 사실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여기서 확대회의란 서경원 카톨릭농민회 회장과 노금노 총무도 참석하는 회의를 말한다. 당시 전남 운동권으로 구성된 농민회 명칭이 카톨릭농민회였으며 그 약칭이 카농 혹은 가농이었다. 그리고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 대부분이 카톨릭농민회 회원들이었다. 서경원 카농회장이 누구인가? 9년후 밀입북하여 김일성에게 공작금을 받았던 간첩 서경원이었다. 서경원은 함평 사람이면서도 광주 운동권 거물이었다. 광주 운동권 중에는 해남의 남민전 간부 이강도 있었기에 광주운동권을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혹은 약칭으로 전남민청협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서울에서 하려는 시위 행동지침을 전남민청협, 즉 광주운동권이 마련하였는지 실로 이상한 일 아닌가! 그리고 "조속한 시일 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각 대학은 학교별로 출발하여 광화문 네 거리를 점령하고 중앙청을 비롯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한다. 데모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각 대학별로 각목, 돌멩이, 화염병을 준비한다"는 이 지침은 데모 저지선을 폭력시위로 돌파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하라는 지침이었다.
5월 8일의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에는 조성우뿐만 아니라, 장기표 등 여러 명의 김대중의 홍위병도 참석하였는데, 그 회의에서 결의한 폭력시위 지침은 5월 15일 그대로 적용되었다. "최규하 물러나라!" "신현확 물러나라!" "최규하 하야!" "신현확 퇴진!" "신현확내각 퇴진!" 등의 시위 구호를 외치던 십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차량 3대를 방화했고, 시민버스 등 민간차량 4대를 탈취하여 한 줄로 선 경찰 저지선을 향에 돌진하여 여러 경찰관이 사상케 하였다. 아직 전경 수가 적었던 때라 수적 열세에 몰린 경찰은 오직 청와대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로 배치됐고, 정말로 광화문 네거리를 시위대가 점령하였다. 석유위기로 최규하 대통령은 중동 순방 중이었는데, 날이 저물 무렵 시위대는 금방이라도 청와대로 쳐들어갈 기세였고, 실로 국가가 언제 전복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운동권이 그 시위를 "1980년5월15일 서울역회군"이라 명명하는가? 국가를 전복시킬 절호의 기회를 변절자 심재철 때문에 아깝게 놓쳤다는 뜻으로 그들은 그렇게 부른다.
김대중의 홍위병 출신들의 해설에 따르면 그 날 5월 15일의 시위 지도부는 대학생 지도부였던 매파 유시민과 비둘기파 심재철의 주장으로 갈라진다. 유시민은 그날 청와대를 점령하자는 주장을 지지하였으나, 심재철은 그 와중에 김종환 내무장관과 통화하고 이미 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일단 시위대를 귀가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는 지휘차량인 마이크로 버스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혼란이 올 수 있다. 밤이 깊어가고 내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학생회장단 연석회의가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자." 그날 김대중은 경호원들까지 한 명도 안 남기고 동교동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시위를 선동하였으나, 심재철의 이 한마디가 청와대 진군론에서 해산론으로 기울어지게 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돌이켜보건대, 심재철은 그날의 시위 주동자였으나, 배후세력의 과격한 주장에 떠밀려 가지않고 순발적인 기지를 발하여 우리나라가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운동권의 시각에서는 심재철은 변절자로 보이므로 지금껏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는 5월 15일에 갑자기 돌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김대중의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이 5월 15일에 이미 행동으로 옮겨졌다. 서울의 5월 15일 사건 배후에 광주의 사회주의 혁명가 윤상원이 있었다. 5월 15일 청와대를 접수하려 했던 운동권의 계획과 5월 21일 윤상원 등 광주 좌파 주도 하에 괴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접수한 사건은 동일선상에 놓여있던 사건이었다.
남한에서는 잊혀져가고 있는 5월 15일 사건의 중요성을 북한은 인식하고 있기에 1982년도의 5.18도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67쪽에서 그 날의 시위를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의 생각은 기껏헤야 "누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몰고가 순경들을 깔아죽였을까?" 하는 질문에서 맴돌았는데, 북한의 분석은 정확하다. 남대문 경찰저지선이 차량 테러로 뚫린 후 겁에 질린 경찰은 여기저기서 역포위당한채 무력해졌으며, 김종환 내무부장관은 만약 데모대가 청와대로 진격하면 청와대를 사수할 여력이 없었다. 오죽하면 그가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 국방부장관에게 치안 유지를 지시하여 달라고 호소하였겠는가. 그러면 김대중과 광주의 사회주의혁명 그룹이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기 위한 동맹을 맺은 것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민주청년협의회 회의에 조성우와 장기표와 심재권 등 세 명 이상의 국민연합 임원들이 참석하였다는 것은 실로 비민주적이고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정치권인 국민연합 간부가 청년 운동권 단체 간부를 겸직하였다는 것은 민주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편법이었다. 중앙위원과 총무국장과 조직국장, 홍보국장 등 실무 간부직이 조성우와 이현배와 장기표와 심재권 등 당시로서는 거액의 월급을 김대중으로부터 (문익환 목사의 북한 자금으로) 받고 있던 김대중의 홍위병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김대중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운동권 대학생들만으로 국민연합 실무임원직을 채워놓으면, 그 단체는 처음부터 편견에서 출발하는 단체요, 그런 단체는 치우친 주장을 강요하는 단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문익환 목사 등 중앙상임위원 전원이 머리 속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생각만 가득찬 자들이요, 실무 간부들 전원이 김대중의 홍위병들이었을 때 그 단체는 이미 김대중 일당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 4월에 김대중의 홍위병 혹은 사조작화된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가 5월 8일에 끝난 후 장기표 국민연합 조직국장과 심재권 국민연합 홍보국장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12일에 김대중에게 제출했다: "5월8일,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동시에 폭력시위를 벌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거할 계획이며 이렇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어 차기정권까지 장악할 수 있다." 그때 장기표는 이렇게 말했다:
홍위병 장기표의 이런 보고를 들은 김대중은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장기표가 보고한 폭력시위 방법을 보충 설명하면 이러하다.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이 말은 학생들을 교문밖으로 유도하여 폭력시위를 벌이면 경찰 저지선도 뚫고 폭력시위를 민중봉기로 격상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 말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면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민중봉기로 전복시킨 다음 사후 수습 명분으로 김대중이 과도정부를 이끌면 김영삼씨와 대권 경쟁할 필요 없이 5공화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민주제도연구소'란 김대중이 5월 20일에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킨 후 스스로 집권하고 임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내각의 예비명단을 지칭한다.
4.19 20주년에 즈음하여 제2의 4.19 상황을 만들자는 이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논리는 폭력시위로 도저히 군경이 발포하지 않을 수 없는 함정을 파놓자는 전략을 깔아놓고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든 군경이 발포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하면 전국적으로 폭동이 일어나 관공서를 점령하고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각본에 따라 5월 21일 오전 11시경, 광주시 일원에 전남민주학생총연맹 명의로 "4·19 의거로 연결하자"라는 제목의 전단이 살포되었다. 그 유인물이 뿌려진 직후 무장난동자들의 장갑차가 군인들을 깔아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군경이 살기 위해 공포를 쏘지 않을 수 없는 함정을 파놓으려는 고의성 범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폭력시위로 제2의 4.19 상황을 연출하자던 김대중과 그의 홍위병들의 도시 게릴라 방법이 남한에서 전민봉기가 일어나길 학수고대하던 북한이 노리고 있던 것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남파되어 6개월간 광주사태 일으킬 공작을 하였던 북한군 특수부대 안창식 대위와 내연의 부부관계였던 탈북여성은 광주사태를 배후조정했던 북한이 노렸던 두가지 목적을 이렇게 서술한다:
그 무장봉기 거사계획이 전남대 내 김대중의 사조직이었던 기획위 위원장 송선태가 5월 13일에 기록한 무장폭동계획서(위장명칭 일명, "자유노트" 13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농촌 파급효과를 위해 공용 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14시부터 18시 사이에 [카농]조직을 이용하여 죽창 [밧데리]등을 준비해서 폭동을 일으킨 후 방송국과 공공건물 및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한다." 여기서 [카농]이란 서경원이 당시 회장이던 카톨릭농민회의 약칭이다. 함평에서 농민운동하던 서경원이 1988년 김대중의 평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0년대에 문익환 목사는 서울에서, 서경원은 전남 함평에서 북한 자금을 지원받고 있었다. (북한 자금으로 간첩 활동을 하였던 문익환과 서경원 모두를 나중에 김대중 정부는 5.18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주었다.) 1988년 12월에 김일성은 문익환 목사에게 평양으로 오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문익환이 누구였던가? 김대중의 홍위병들이 문익환의 졸개들이었다. 1980년 5월 8일 조성우에게 폭력시위 방법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던 인물도 문익환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기 앞서 서경원이 방북하여 김일성이 직접 주는 6만 불을 받아서 김대중에게 방북 및 김일성과의 면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1만불을 주었다. 김대중은 서경원이 자기에게 전달한 1만원은 김일성이 준 간첩공작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하지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