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씨는 80년 5월 11일 전북 정음에서 열린 동학제에 참석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연설을 한 것으로 아는데 이날의 연설내용과 분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나는 것은 없으나 대략 '동학혁명이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를 하고 주의주장을 건의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이며 . '박정권 18년간 가장 큰 과오는 신라통일 이후 지방색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 이라고 하는 등 선동적이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김대중씨는 그날 시간관계상 현지인사들과 따로 회합한 사실은 없으나 연설이 끝나고 청중들이 귀경하는 김 대중씨의 차량행렬 따라 시위와 구호를 외치는 등 분위기는 한껏 고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5월 11일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문재인 정부 5∙18진상조사위 위원장 송선태가 무장폭동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날이 바로 5월 11일이었다. 당시 전남대 국어학과 4학년 학생이었던 송선태가 복학생 정동년의 지시를 받아 무장폭동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날이 바로 5월 11일이요, 정동년도 전남대 박관현 학생회장 등을 데리고 정읍에 김대중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 전라남도 광주 전남대 학생들이 멀리 전북 정읍까지 김대중의 연설을 들으러 가야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왜 바로 그날부터 전남대 내 김대중의 사조직이 무장폭동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김대중이 정읍에서 무장반란으로서의 제2의 동학난을 일으키라고 선동하는 연설을 한 날이 왜 하필 그 날이었는가?
김대중은 광주사태 발생 한 주 전에 전라북도 정읍에 가서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연설을 하였다. 경호원으로서 김대중을 수행하고 정읍에 같이 갔었던 함윤식이 15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김대중의 정읍 연설을 몇마디로 요약하여 증언하였다. 함윤식은 김대중이 제2의 동학란을 선동하는 연설을 하였다는 증언을 하였으나, 아쉽게도 그의 증언에는 김대중이 도시게릴라전을 선동한 것은 빠뜨렸다. 광주사태 40주년 구글 전자도서 5∙18(오발) 유공자 무용담 158 페이지 이하에는 함윤식이 빠뜨린 김대중의 정읍연설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제2의 동학군을 조직하여 도시게릴라전, 농촌게릴라전을 하라고 선동하였던 김대중의 정읍 연설을 들으면서 우리가 5.18사기꾼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그때 김대중이 자신의 연설 청중에게 누구와 싸우라고 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김대중이 전두환과 싸우자고 하였는가? 아니다. 그때는 아직 국민이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때였으며, 김대중은 최규하 대통령 및 최 대통령 정권에 충성하는 자들과 싸우라고 하였다.
훗날 1996년에 김영삼 정부의 5.18재판 때 채동욱 검사와 최환 검사는 광주시민군은 최규하 대통령 수호세력이므로 헌법기관이었다는 법리를 만들어내었다. 만약 너무도 황당한 이 법리가 잘못된 것이라면 이 법리에 의거한 재판도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이 최규하 정부 전복을 선동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어떻게 광주시민군이 최규하 대통령 수호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인지는 앞으로 채동욱과 최환이 역사가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할 몫일 것이다.
한가지 첨언하면 김대중은 게릴라전으로 무장폭동을 일으켜도 "미군이 여기 주둔해 있는 한 북한공산군의 전면남침은 불가능하다"라는 논리로 무장폭동을 선동하였다. 그런데 "북한공산군의 전면남침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에는 "북한군 게릴라의 침투는 가능하다"는 여운이 있다.
—80년 계엄사 발표에 따르면 김대중씨는 정동년씨에게 광주사태를 일으키도록 지시하고 거사자금으로 5백만원을 주었다고 했는데 김대중씨는 그후 이 사실을 부인하고 88년 13대 국회 개원 직후 대표 연설에서 '정동년씨와는 처음부터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미국 갔다와서 처음 만났다'고 하여 그와의 관련설을 전면 부인했는데요.
그러나 당시 군 검찰관으로 재판에 관여했던 정기용 변호사는 88년 11월의 국회 청문회에서 김씨가 체포된 후 모든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정선생'이라 부르며 "정선생. 날 살려만 줘요. 난 죽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정선생의 은혜는 꼭 갚겠소 "하며 통사정을 했다고 하는데 - .
▲ 그 얘기는 저도 후문으로만 들었습니다. 80년 재판은 김대중씨와 다른 피고인들이 분리되어 받았기 때문에 저도 김대중씨의 재판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 기억으로는 정동년씨는 분명히 5 · 18이 나기 전 동교동을 두 번 다녀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방안에서 두 사람만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또 거사자금이 전달되었는지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동년씨 뿐만 아니라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 10여명이 5. 18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동교동을 다녀간 사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5백만원을 줬다고 해서 그런 어마어마한 사태를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 80년 당시 김상현, 조연하씨등 측근 참모들과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강경일변도로 나가면 군부가 개입할 빌미를 줄 수 있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게 좋겠다' 고 했으나 김대중씨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고 이를 일축해버리고 장외 투쟁으로만 치달았습니다.
김대중씨는 80년 3월 26일의 YMCA연설을 시작으로 하여 한신대, 동국대 등에서 선동적인 연설로 일관하여 집회가 끝나고 나면 데모로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김씨 측에서 동원한 청중들이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들은 연설도중 군데군데에서 '옳소' 와 박수를 연발하며 분위기를 잡고 청중들을 흥분시켰습니다.
특히 YWCA집회에서 김대중씨는 미국대통령 토마스제퍼슨이 한 민주주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인용하여 과격하고 선동적인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연설내용은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책자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5 · 18이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5 18이 일어나도록 상황을 몰고 간 사람은 김대중씨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전두환씨도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밝혔지만 저는 그 때 김대중씨의 과격한 노선이 없었다면 군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전복 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5월 12일에는 북악파크호텔에서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동, 문익환, 심재권, 계훈제, 김종완, 이현배, 장기표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회의까지 마친 후 최규하 대통령 정부에게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국무총리의 퇴진, 정부 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 등을 요구하고 5월19일까지 확답을 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등 공공연히 선전포고까지 한 걸로 되어 있는데요.
▲ 10만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학생데모의 절정을 이루었던 5월 15일의 서을역앞 집회 때 동교동은 크게 고무되어있었고 김대중씨의 비서들은 모두 다 서울역으로 달려 나가 동교동에는 단 1명의 비서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현장의 상황은 속속 동교동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동교동에는 저만 남아 쉴새없이 걸려오는 이들의 전화를 받기에 바빴습니다.
—88년에 서울대 교수로 있던 노재봉씨가 "광주사태는 김대중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이라고 말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과연 노씨가 말한 김대중씨의 노련한 기술' 이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습니까.
▲ 글쎄 저도 노재봉씨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김대중씨가 근본적으로 의회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민중혁명에 의한 집권을 지향하는 그의 정치노선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김대중씨는 그 때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군부 타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씨의 과격한 정치노선은 80년 3월 26일 YWCA에서 행한 연설전문을 기록한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 책자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