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민주주의 발전은 사상의 발전이다. 그래서 미국 고전문학에는 민주주의 사상가들의 글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광주사태에 관하여 우리가 가지는 의문점은 이것이다. 만약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도대체
5.18 단체들이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들을 꽁꽁 숨겨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광주사태 발생원인으로 5.18측이 흔히 하는 주장이 김대중을 석방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대중의 구속된 시점은 광주사태가 끝난 후였으므로 사실 그런 주장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김대중이 열흘 뒤
구속되었다 하더라도 5월 18일 0시 경에 연행된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아래의 결사 투쟁 선동 대자보는 김대중이 연행되기 근 이틀 전인 5월 16일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두환이 박정희-최규하의 4공화국에 반역했다고 단정하면 그 귀결은 그 반대 선상의 김대중이 4공화국,
즉 유신정권에 충성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 논리는 성립이 불가능하므로 1996년 12.12 재판 판결에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오늘날 역사토론이 과제이다. 분명 광주사태 당시의 운동권의 공격논리는 전두환이 박정희의
양자였다는 것이지, 결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역자였다는 것이 아니었다.
12.12사태와 광주사태를 한묶음으로 묶는 주장의 또 하나의 그릇된 관념은 광주시민들이 신군부와
대항하였다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커녕 그런 용어조차 없었다. 신군부라는 용어는 1979년 12월
김일성이 김재규 부하들이 아닌 이들을 지칭하여 사용하였다고 하는바, 남한에서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그 용어가 그대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나, 운동권이 임의로 이 사람 저 사람을 신군부로 분류하였기에 전혀 정확성이 없는 용어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신군부라는
것이 있었다면 어찌 운동권이 그 당시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유신잔당으로 분류하였겠는가?
광주사태 선동가는 전두환을 박정희의 양자 혹은 유신잔당으로 불렀다. 광주사태 직전 5월
20일과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의 민중봉기 거사 계획을 지지하는 대자보들이 수십 개 단체명으로 전국에 등장하였는데, 실제
작성자는 동일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5월 16일자의 아래의 대자보도 민중봉기 선동가가 전남대의 명의를 도용했던
것이지, 전남대생들이 작성한 대자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광주사태 당시 대자보들은 배후 선동가가 어떻게 시국을 읽고
무슨 논리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대학의 소리 - 그 첫번째
우리는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오늘의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서 민족사적인 사명과 당위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부분에서 자주, 자율적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며, 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을 통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독재자가 쓰러져간
10.26이후에도 유신잔당의 예비 음모정권은 기생적인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민족과 국민앞에 일말의 양심도 없이 또 다시
암흑시대로 복귀하려는 기만적인 정치안정과 민주화를 앞세워 음모와 공포, 권모술수를 남발하고 있지 않은가. 한계에 도달한 국민경제의
도탄에서 신음하고 있는 저 민중의 원성이 들리지 않은가. 모든 힘을 합쳐 불퇴진의 결의로 민족의 활로를 개척해야 할 이 때에 무엇
때문에 진정한 국민적 합의와 총화를 스스로 분열시키고 포기하려 드는가. 왜 그다지 숨겨야 할 것이 그렇게도 많은가. 선량한 국민이
유신잔당의 권력유지를 위한 소모품이며, 매판자본가 독점자본가의 안주꺼리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슬픈 현실앞에서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목숨을 걸고 싸워나가 억압된 민중의 승리와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따라서
민족사적 당위를 실현시키기 위한 현실적 과제로서, 첫째 유신잔당(특히 전두환 일당)의 박멸, 둘째 새로운 민주질서의 조속한 확립을
위해 유신잔재 전체와의 싸움에서 불투명한 자세로 일관한 야당세력에 반성을 촉구, 셋째 양심적인 범민주세력의 강력한 결단을
촉구하며, 전국의 노동자·농민과 전국의 지성인, 전국 학생의 결집된 힘으로 싸워나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 땅의 민주회복은
공염불이 되고 말것이다.
왜 비상계엄은 해제되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즉각적인 해제를 주장해야 하는가.1
장기화된 비상계엄은 언론의 검열·조작·억압을 계속하여 국민을 우롱하고 유신잔당세력을 규합하여, 또다시 잔악한 고문과
실형선고, 검거로 일관한 「改新정권」을 꿈꾸고 있다. 4월 12일 귀국한 사이공억류외교관의 귀환을 4.19에 발표하여 지면을
조작하고, 정보부 재건, 보안대의 활성화, 유정회 부활, 통대조직의 지역별 강화, 노골적인 국회 무시 등 기성 정치인의 고립을
시도하는 저들의 흉계는 무엇인가. ‘대통령유고’의 명분으로 발동한 비상계엄이 특정인의 재판을 위해 존속하게 되어, 그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비상계엄은 잔당 세력의 등장을 위한 전초작업이며, 국민여론을 오도·무마하기 위한 강제적이고·임의적인 시한부
기초작업인 것이다. 우리의 민주화는 이 계엄의 즉각적인 해제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해제권자를 제주도를 제외시켜 전국의 계엄이
아닌, 일부지역 계엄으로써 대통령은 허수아비격으로 전권을 계엄사령관 휘하에 두게하였으며, 국회(재적과반수 결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현 상황하에서, 특히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라는 위법적인 겸임은 모두 계엄의 소산이며, 이것이 계엄으로 합법화된다면,
현역 군인출신 총리서리, 국무위원서리, 국회의원서리 등이 어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회가 열리지 않고 있는 지금
소극적인 공화·신민 두 당의 국회의원의 결단을 촉구하며, 한편 계엄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유신체제의 사생아 유정회 의원들의
자세가 불변하면, 국민의 과감한 응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구시대적 모순의 청산과 새로운 민주질서를 모색하여, 민주시대를, 그 실현을 갈구한 민족세력을 억압 악이용하고, 개헌논의를
불필요하게 했던 계엄령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학원 자율화와 노동자·농민의 권익옹호운동이 민족사적 소명의식에서 출발한
정통성수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란 사실을 부인하고, 군부세력과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유신잔당의 보복적인 야합을
노리고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계엄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유신 암흑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는 계엄해제를 최선결 요건으로
삼고, 목숨을 걸고 투쟁할 것이다.
(※다 보신 다음에 이웃과 친구들에게 돌려가며 읽도록 합시다※)
최근의 정보 : 日本朝日新聞 5月 5日字 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民主化의 방해인물로 全斗煥을 지적” 「멕시코시티,
4日」 카터미대통령은 日·米수뇌회담에서 박정권 붕괴후의 한국 군부의 동향에 관하여 「한 사람이 軍·情報·保安 각 분야를 한 손에
장악하고 있는 것은 “過行이다”라는 태도를 표명했다. 즉, 지난 4月 한국중앙정보부(K·C·I·A) 부장대리를 겸임한 전두환
한국군 보안 사령관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서는 崔정권 下에서 진행되고 있는 民主化에 군부가 큰 저해요인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보여진다. 카터가 일국의 군부지도자를 지칭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라 한다.」
※다 읽으신 후, 이웃과 친구에게 돌려가며 읽도록 합시다.
※이 大學의 소리는 계속 발간되어 질 것입니다 ※
1980년 5월 16일
전남대학교 자유언론투쟁위원회
위의 5월 16일자 광주사태 선동대자보 해설 및 비평
김대중의 전국연합 산하 조직들이 대학가 등에 대자보를 붙이던 때에는 운동권이 대학가 여론을 장악하였으며,
비운동권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반론의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30 년 전에는 반론의 기회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나마
비평 및 반론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광주사태 30 주년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이미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요,
따라서 당시 자료들이 오늘날 역사 토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광주사태 선동가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풀고 그의 민중봉기
선동 논리가 정당하거나 합리적이었는지 살피려면 먼저 그가 작성한 대자보들을 읽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5월 16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제목은 "우리는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이다.
훗날 그들은 김대중 석방을 위해 일어섰다고 주장하였지만, 분명 위의 대자보는 김대중이 연행되기 하루 반 내지 이틀 전에
게시되었다. 이 대자보 제목은 투쟁이 목적이었음을 시사하며, 학생들을 선동하기 위해 대학의 소리라는 이름으로 게시하는
그 첫번째 대자보에서는 투쟁 대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제시한다.
그 첫 문장에 "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을 통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가
들어있다. 주체사상의 색채가 짙은 이 문구는 어쩌면 그다지도 북한 당국자들이 주장하는 광주사태의 의의와 그토록 일치하는가?
도대체 어떤 세력이 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인가? 왜 대표적 시민군 윤기권은 훗날 2억 보상금 수령 후 월북하였으며,
국립묘지 참배를 거부하는 북한 대표들이 스스로 5.18 묘지에 가서 참배하였는가?
둘째 문장의 "10.26이후에도 유신잔당의 예비 음모정권은"이란 표현에 주목하라. 본래
광주사태는 12.12사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태였다. 여기서 유신잔당이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 내각을
지칭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광주사태가 직선제를 요구한 투쟁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그 당시 시위 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이 대자보 작성자는 1970년대의 찬란한 산업혁명 시대를 "암흑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그런 치우친 좌익사관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관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약 운동권에 의해 한가지 사관만 강요되는 대학이 있다면 그것은 그 대학의 비극이다. 무엇이 북한의
비극인가? 그것은 오직 한가지 사관만을 인민에게 강요하는 획일주의이다. 만약 광주사태 선동가의 의도가 한국의
산업혁명을 부정하는 사관만을 강요하려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그 출발부터 전혀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
『기만적인 정치안정과 민주화를 앞세워』
오늘날 전교조의 잘못된 교육으로 1980년 봄이 마치 군사독재 시대였던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만약 군사독재 시대였다면 어째서 2월 29일 복권조치로 김대중 등 수백 명의 운동권이 3월 1일부로 사면복권될 수
있었겠는가? 최규하 대통령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안을 내놓으며 야당의 협조를 호소하였으며, 4월 첫 주에
김영삼씨의 신민당 당원들과 김대중의 전국연합 운동권이 각목 들고 싸웠다. 당시 선거법 직선제 개정은 기정사실이었으며,
양김씨 중 누가 대선후보가 될 것이냐를 놓고 양김씨 지지자들간에 한국판 4월 11일자 "뉴스위크"지가 보도하듯 양김씨 중 누가
대선후보가 될 것이냐의 문제로 다투던 양김씨 지지자들간에 인신공격이 난무했으며, 주먹질이 오갔던 것이다. 대자보
작성자가 눈비비고 보아도 전혀 독재시대가 아니었으므 『기만적인 정치안정과 민주화를 앞세워』라는 말로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이 슬픈 현실앞에서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대자보 작성자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였으며, 당시 시위 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였다.
광주사태는 5월 18일 시작되었으되, 민중봉기 선동 작업이 진행되던 5월 16일의 시점에서 그 투쟁 대상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였다.
『목숨을 걸고 싸워나가 억압된 민중의 승리와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
http://study21.org/518/document/dj-letter.htm 에서 보다 자세히 볼 수 있는 위의
김대중의 편지는 1981년 1월에 처음 쓴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그 이전 해 2월에도 다시는 사회를 혼란케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2.29복권조치로 3월 1일 복권되어 정계에 복귀한 바 있다. 그런데, 복권된지 두 달 만에
민중봉기 일으켜 자기를 사면해준 최규하 대통령을 5월 20~22일경에 퇴진시키겠다고 하니 5월 18일 0시 연행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대중이 말을 바꾸지 못하도록 그의 편지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김대중이 그 약속을
지켰는가? 아니다. 지난 해의 광우사태 때도 그는 이명박 대통령 정부를 전북시키려 했다.
"목숨을 걸고 싸워나가" 이 문구는 유혈투쟁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 이 말은 그 투쟁 대상이 최규하 대통령 등 반공 인사들이었음을 시사한다. 러시아와 동구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기 전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은 반공국가들이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도 반공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광주사태 선동 논리에서는 그 투쟁 대상이 거꾸로 바뀌어 반공인사들이었다. 만약 그 목적이 친공에 의한 민족통일이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첫째 유신잔당(특히 전두환 일당)의 박멸』 이 문구는 전두환이 유신잔당이라고 분명히 못박는다.
유신잔당이란 박정희의 유신정권 충신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따라서, 전두환이 유신정권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5.18측의 훗날 광주청문회 때와 12.12-5.18 재판 때의 주장은 말바꾸기를 한 것이다. 그들이 신군부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도 그들의 말을 바꾸고 광주사태 논리를 바꾸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해제권자를 제주도를 제외시켜 전국의 계엄이 아닌, 일부지역 계엄으로써』 분명 이 말은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작성자의 횡설수설이다. 5.18측에 도대체 이 문구로 주장한 바가 무엇이었느냐고 문의하면 답변해줄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대자보 작성자는 당시 비상계엄이 물계엄이었음을, 즉 제주도가 제외된 계엄이었음을 트집잡은
것이다. 비상계엄이 전국계엄이 아닌 일부지역 계엄이면 대통령 권한이 약화된다는 대자보 작성자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 입으로 "최규하 물러가라" 외치면서, 다른 한 입으로 일부지역 계엄, 즉 이른바 물계엄 하에서 대통령 권한이 축소된다고 우기는
것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여하튼,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위협이 말로만 하는 위협이
아니라, 실지로 민중봉기 거사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이 5월 16일 확인되자 정부는 그 다음날 5월 17일 자정 김대중을 연행함과
동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쿠데타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5월
18일부터 과격시위를 선동하였던 것이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라는 위법적인 겸임은』 사실, 이것은 전혀 전국적 민중봉기 혹은 광주사태를 일으켜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임기는 4월에 끝났으며, 단지 후임자 노태우 장군에게 인수인계하는 절차가
6월에 마무리되었을 뿐이다. 5월에 김재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보안사령관 업무는 끝나있는 때였다.
그 시절 중앙정보부장은 보안사령관직을 거쳐 임명되었으므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유일한 적임자였고, 10.26 사태 이후
6개월이 넘도록 공석이었던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최규하 대통령이 더 이상 비워두실 수 없어서 그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하셨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온당한 처사로 여겨진다.
『군부세력과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유신잔당의 보복적인 야합을 노리고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 표현
또한 대자보 작성자의 횡설수설이다. 뭔가 트집거라를 제시해 봉기를 선동해야겠는데, 분명한 이슈거리가 없자 장황한 말로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을 유신잔당에 포함시킨 위의 문구와 달리 여기서는 군부세력과 유신잔당을
구분한다. 결론적으로 이 대자보에서 유신잔당이란 용어는 일차적으로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지칭한다.
『유신 암흑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는 계엄해제를 최선결 요건으로 삼고, 목숨을 걸고 투쟁할 것이다』 이렇듯 광주사태
당시의 모든 대자보들은 일명 유신 시대,즉 1970년대의 산업화 시대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마치 4공화국의 유신체제를 고수하며 수호할 목적으로 광주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12.12
판결문은 그 역사논리 성립이 불가능하다. 보라, 목숨을 걸고 투쟁할 것이다라는 말은 유혈 투쟁을 불사하겠다는 말이요,
만약 전두환이 투쟁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는 유신정권 충신으로 간주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 결코 12.12 사태를
쿠데타로 여겼기 때문에 일어난 항쟁이 아니었다.
『최근의 정보 : 日本朝日新聞 5月 5日字 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전남대생들이 일본 아시히 신문을 본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전국연합 산하 조직들 중 대자보 작성 담당자가 본 것이었다. 전남대학교 자유언론투쟁위원회 등
수십 개의 단체명들 명의로 대자보가 붙여지고 유인물들이 뿌려졌으나, 그 작성자는 동일인물이었으며, 바로 광주사태의 배후
인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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