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5·18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유언비어 심리전으로 광주폭동 개입한 북한

     1980년에 미국에 Michael H. Armacost(애칭 Mike Armacost)라는 성명을 가진 외교관이 있었는데,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서 미 국무부 차관보였다. 광주사태가 끝난 지 꼭 두 달 지난 후인 7월 27일 미 하원 외교분과위에서 한국 상황에 대한 공청회가 있었고, 차관보 아머코스트 대행이 Lester Wolff의 소위원회에 출석하여 광주사태 이후에 미국이 취하여야 할 한반도 정책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선거 없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세우려던 북한의 지시로 광주무장반란을 사전 조직한 한민통 미국지부가 한창 광주사태 유언비어를 미국에서 퍼뜨리던 때라 이 날 소위원회의 우려에는 5.18 사기꾼들의 주장이 다분히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 군부가 한미연합사 승인 없이 공수부대를 광주에 파견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당시 떠돌던 유언비어의 반영이었다.

    아머코스트 차관보는 먼저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가 한미연합사 승인 없이 동원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이렇게 불식시켰다. 한국군 공수부대는 한미 연합사 소속이 아니며, 따라서 한미연합 사령관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많으며, 고로 지휘 계통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로 쉽게 풀어 설명한 이 말을 영어 원문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2. In response, Armacost stated that the Airborne Special Forces Troops which were initially dispatched to Kwangju were not a part of the Joint Command and the Command Structure had not been violated (Armacost 1980, 1 ).

    이어 아머코스트 차관보는 한반도 안정은 한국 국민이 수용할 만한 넓은 지지층을 가진 정부가 가장 잘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며, 미국은 그러한 정부 형성의 최종 결정권자가 되려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미 행정부의 입장임을 역설하였다. He reiterated the Adminstration's position that we believe stability on the Korean Peninsula is best served by a broadly based government acceptable to the Korean people and that the United States should not attempt to be the arbiter of the form of such a government.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체제를 미국은 지지함을 피력한 아머코스트 미 국무부 차관보는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북한은 상대적인 의미로만 억제되어 있다. 북한이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프로파간다 공격을 강화하였고, 남한을 국제적으로 정죄하려는 노력을 개시하였고, 남북한 대화를 연기하였고, 계속해서 무장 침투 시도를 하고 있다. North Korea has been restrained only in a relative sense. While they have not starting a war they have stepped up progaganda attacks, launched an effort internationallly to condemn South Korea, postponed North-South dialogue meetings, and contined armed infiltration attempts.

미 국무부/ 미 하원 외교분과위 5.18 문건
▲ 1980년 7월 27일 미 국무부 차관보 대행이 미 하원 외교분과위에서 발표한 광주사태 관련 문건 2쪽.

    아머코스트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이 광주사태 당시 프로파간다 공격을 하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광주사태 당시 북한 강성산 총리 사위로서 북한 고위층의 프로파간다 공격을 직접 관찰한 강명도의 저서에 수록된 증언이다.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제일 먼저 증언한 탈북자는 북한 고위층 출신 강명도이다. 그는 탈북한 지 2년만인 1995년 5.18 재판이 시작던 때에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를 출간하였다. 이 책에는 광주사태가 발생하자 북한에서는 어떻게 대응하였는지에 대한 증언이 수록되어 있는데, 광주사태가 일어난 지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시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광주사태 당시 이미 그는 북한에서 상당히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서슬 퍼런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 정부 시절이라 탈북자가 김영삼 정권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던 때였고, 그래서 광주인민봉기를 그의 저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호칭하지만 그럼에도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한 사실을 그는 숨기지 않는다.

    간첩들의 배후 조종으로 가톨릭농민회가 무장반란을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은 원래 월요일인 5월 19일이었다. 그래야 전남대 학생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5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예정보다 하루 빨리 광주사태가 일어난 사실을 광주의 간첩들이 보고하자 김일성은 즉시 오진우 무력부장 등 군 수뇌부와 대남공작기관 수뇌부를 평양 주석궁으로 불러들여 비밀회의를 하였고, 남침 시기가 무르익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첩보는 김중린에게 맡겼던바, 그런 사실을 강명도는 이렇게 기록한다:

    남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전 부서에 비상을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강명도 1995, 239).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38~239쪽
▲ 북한 고위층 탈북자 강명도의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39쪽은 광주사태 때 광주에서 간첩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북한에서 생산된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

    광주사태는 광주에서 발생하였어도,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들은 북한에서 생산되었다. 북한의 광주사태 유언비어 삐라 제작 총책임자는 깅명도의 절친힌 친구 이화섭이었는데, 이화섭은 납뷱 여배우 최은희애개 1980년에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을 1978년애 말해준 통전부 제1부부장 이동호의 아들이다. 강명도는 광주폭동 선동 삐라를 이화섭이 어떻게 준비하여 광주로 보냈는지를 이렇게 기록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그는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던 것이다. 당시 이화섭은 3호청사 직속 101연락소 지도원이었다; 101 연락소는 앞서 말했듯이 대남사업용 선전 삐라는 물론 위조지폐를 포함한 인쇄물 일체를 찍어내는 곳이다 (강명도 1995, 241-242).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0~241쪽
▲ 강명도의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1쪽은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들 중 광주폭동 선동 삐라들은 북한이 제작한 것임을 입증한다.

    여러 탈북자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퍼즐이 맞추어진다. 강명도가 모르고 있던 부분, 즉 유언비어 유포에 의한 개입 외에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에 대해서는 탈북작가 이주성 저 『보라빛 호수』에 수록되어 있다. 5월 18일 평양 주석궁에서의 비밀회담 때 오진우 무력부장이 대동한 장성은 문제심 중장이었다 (북한군 중장은 별 둘로 한국군 소장에 해당함). 문재심은 1010군부대 부대장으로서 중앙당연락소 소장이었다. 북한군을 무장폭도로 위장하여 광주에 침투시켜 무장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도시게릴라 작전은 문제심 중장이 총지휘하였다. 광주사태 당시 한 문제심이 중장이 북한군 50명을 인솔하고 직접 광주에 침투했었고, 한 탙북군인(가명 김명국)이 문제심 호위병이었기 때문에 문제심에게서 북한군 남파과정에 대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책 104쪽에는 강명도가 언급한 김일성과 김중린과 문제심 삼자가 나눈 대화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대남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김중린과 문제심을 따로 불러들였다.
    "김중일 부장, 문제심이 제출한 광주작전 계획안을 봤어?"
    네, 봤습니다. 수령님."
    "어때?"
    "주도면빌하게 세운 작전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김 부장. 문재심의 작전안을 최고사령부 작전조 성원들과 함께 빈틈이 없는지 다시 한번 검열해서 나한테 서면으로 제출하라."
    "알갰습니다." (이주성 2017, 104)

    여기서 우리가 강명도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강명도는 그의 친구 이화섭이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폭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명도는 평양에서 제작된 광주사태 선동 삐라르 어떻게 광주에 살포하였는 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북한이 광주 일원에 삐라를 뿌리는 방법이 무엇이었던가? 군용기에 삐라를 싣고 광주까지 날아와서 뿌렸는가?

    우리가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광주사태 선동 삐라 대부분은 북한이 아닌 전라도 현지에서 제작되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손성모 등 간첩들과 윤상원 등 김대중의 사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양측 모두 북한 방송으로 지령을 받아 광주사태를 주동하였다. 김대중의 사조직 중에서 북한방송을 청취하여 광주사태 유언비어 삐라를 제작한 인룰 중에 김현장이 있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대표적인 5.18 기록물은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인데, 김현장은 광주사태 때 광주에 없었으며, 전두환은커녕 광주사태 현장을 전혀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전남 구례군에서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간첩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들과 짜깁기하여 A4용지 2매 분량의 작성하였다. 5월 18일부터 북한에서는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광주인민봉기 실황방송을 하였는데, 실제로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에게 유언비어 보급을 하기 위한 방송이었다. 이렇게 김현장이 북한 방송을 청취하며 베껴 작성한 유언비어 문건을 전주성당의 고속복사기를 복사하여 수만 장의 삐라를 제작하는 역할은 문정현 신부가 하였다.

북한 지령으로 작성된 5.18 성명서
▲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 5.18 기록물도 김대중의 사조직 핵심인물 김현장이 북한방송 청취하여 작성한 것이다.

    윤한봉과 더불어 광주무장봉기를 사전 기획하였으며, 김대중의 사조직 핵심인물이었던 김현장이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 끝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부마사태 때는 전라도 군인, 금번 광주 살륙에는 경상도 군인을 투입하여 지역감정을 유발시키고 잔인하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의 속셈을 채우려는 전두환 무리의 반민족적 만행을 온 국민은 그대로 묵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부마사태 때 공수부대를 보낸 인물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아니라 정승화 참모총장이었다. 김현장 자신이 전두환을 본 적도 없었고, 누군지도 몰랐다. 김현장이 부마사태 때 부산에 갔었는가? 부마사태 때 투입되었던 11공수가 광주사태 때도 투입되었으므로 똑같은 부대, 동일 사병들이었다. 그런데 부마사태 때는 전라도 군인, 광주사태 때는 경상도 군인을 투입하였는지를 광주사태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김현장이 어찌 그리 잘 아는가? 그가 확인해 보고 5.18 성명서를 작성하였는가? 아니다. 이것은 지역 감정을 이용해 전라도 전 지역에서 무장반란이 일어나게 하려던 이화섭이 지어낸 유언비어였고, 북한방송은 이화섭이 지어낸 악성 유언비어들을 집중 방송하였고, 김현장은 북한방송을 청취하며 유언비어 삐라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북한이 제작한 광주사태 유언비어 삐라
▲ 북한이 제작하여 남한 여러 지역에 살포한 광주사태 유언비어 삐라들은 아머코스트 미 국무부 차관보가 밝힌 북한의 프로파간다 공격의 한 예이다.

    신속한 광주사태 유언비어 삐라의 대량 제작 및 살포를 위해 먼저 광주운동권 등 남한의 종북세려을 배후조종하였던 북한은 이어 프로파간단 공격을 위한 수많은 광주사태 유언비어 삐라를 자체 제작하여 한국 여러 지역에서 살포하였다. 북한이 제작한 광주사태 유언비어 삐라들에서 희생자 사진들은 광주사태 희생자 사진들이 아니라, 북한 정권의 만행 희생자 사진들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 등 남한의 종북단체들이 이 사진들을 가지고 여러 해 광주사태 사진전을 개최하였으나, 사진 속의 희생자들은 광주사태 희생자들이 아니라, 북한주민 희생자들이었다.

    그런데 북한 및 종북세력의 프로파간다 공격 방법에는 유언비어 삐라 살포 외에도 미국 문화원 방화가 있었다. 1982년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주동자가 당시 고려신학대학 학생이었던 문부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배후는 김현장이었고, 그 배후는 북한이었다. 김현장 너무 오래 북한의 대남공작 방송을 청취하다가 그가 이 사건 배후였다는 꼬리를 잡혔다.

    사이비 인권변호사 문재인은 국무총리 법무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 육 해군총장 등의 요직에 모두 전라도 사람들을 앉혔는데, 전라도 사람들과 문재인의 이런 밀착 관계는 바로 김현장의 북한방송 청취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1982년에 노무현과 문재인이 부산에서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한 후 처음으로 수임한 사건이 바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주동자 김현장 재판이었다. 이때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들을 변호한 것이 노무현과 문재인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는 계기, 더나아가 종북좌파 정치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이 이때 김현장, 윤한봉 등과 더불어 광주사태를 사전 준비하였던 광주운동권 박형선을 처음 만났으며, 이 사람 박형선이 훗날 노사모를 만들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게 한 kingmaker 였다.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던 광주시민들

    광주사태 때 광주에 없었던 김현장이 전남 구레와 남원과 전주 등에서 광주사태 유언비어를 북한방송으로 받아 작성한 유언비어 성명서 제목은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었다. 그러나 폭동을 사전 기획한 극소수의 김대중의 사조직을 제외하곤 99.999%의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으며, 대부분이 전두환이 광주시청 직원이거나 전남도청 직원이려니 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로도 확인된다.

    5월 17일 밤 11시경 김대중이 연행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날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전 날 이미 최규하 대통령 화형식(일명 5.16 화형식)이 있었다. 5월 19일(월요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시위대가 횃불을 들고 5.16 화형식장으로 행진하는 시위였기에 횃불시위라고도 불렀다. 이때 구호가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이었다. 그런데 신현확은 국무총리라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지만, 전두환이란 이름은 이때가 광주시민들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시민들이 횃불시위대에 전두환이 누구냐고 물어본 사실을 홍순희는 이렇게 증언한다: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있었던 평화적인 횃불시위 때 내가 속한 조는 금남로, 양동상가, 광주천변을 거쳐 도청 앞으로 다시 모였다. 그 당시 구호 중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면 시민들이 전두환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자주 물어봤다” (홍순희 1988).
홍순희의 5.18 증언
▲ 광주시민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 의미가 '광주시민 전두환은 광주에서 물러가라'는 의미인 줄로 여기고 구호를 따라 외치면서도 전두환이 누군지 몰라 서로 전두환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자주 물어봤다

▲ 위 영상을 보면 홍순희가 평화적인 횃불시위라고 부르는 5월 16일의 시위 때 이미 광주에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5.18의거청년동지회 무용담을 읽어보면 5월 18일 벙어리 김경철 군을 공수대원으로 엮어 돌로 쳐 죽인 자들은 자칭 5.18의거청년동지회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과격한 폭력시위를 하였던 5.18의거청년동지회도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무용담 저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함께 구호를 외치면서도 ‘전두환’ 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궁금한 나는 시민들에게 물었고 시민들의 설명을 들은 나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가며 구호를 외쳤다 (5.18의거청년동지회 1987, 178).
광주시민군 무용담
▲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5.18의거청년동지회 무용담

    5월 18일 오후 늦게 7공수 2개 대대가 동원된 이유는 그 날 오후 3시 반경에 전경 45명이 폭력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되어 몰매를 맞고 있었을 때 광주경찰서가 계엄사에 납치된 전경 구조를 요청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20세의 전남대 학생으로서 폭력시위 리더격이었던 천영진은 난동자들(혹은 시민군들) 중에는 심지어 대학생들 중에도 전두환이 누구인지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사실 이전에는 우리들 모두 다 전두환이란 존재에 대해 잘 몰랐었다. 하지만 시위를 하면서 '전두환이 물러가라!'란 구호를 폰고 외치고 또 '김대중 씨 석방하라!'란 구호를 외치면서 전두환이 실력자인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영진 1988).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던 전남대 학생의 증언
▲ 5월 18일 오후 늦게 공수부대가 동원된 이유는 전경 45명의 폭력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되자 전남도경이 계엄사에 구조 요청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천영진 일행이 전두환과 싸우기 위해 전경들을 생포하였는가? 천영진은 사실은 그때는 학생들도 전두환이 어디 살며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었다고 증언한다.

    광주에 번데기공장이 있었고, 사장 이름이 전두환이었다. 춘태여상 운동권 학생 박금희는 5월 21일 낮에 무장한 고등학생들의 사격훈련장 가까이 있다가 고등학생 오발탄에 맞아 사망한 여학생이다. 그 사고 직전 그녀 어머니 문귀덕 씨는 금희가 위험한 외출을 말렸고, 금희는 전두환이 대통령 되는 것을 막는 데모를 하러 나가야 된다고 하자 문귀덕씨는 딸에게 “뭣이야? 전두환이 번데기공장 사장인디 뭐갸 돼야?"고 반문하였다 (문귀덕, 박병민, 박금희 1988, 176). 이렇게 전두환이 번데기공장 사장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광주시민들 외의 다른 광주시민들은 모두 전두환이 광주시청 직원이거나 전남도청 직원이려니 추정하고 있었다.

    최근에 문재인이 한겨례신문에 난 기사를 본 후 계엄군 성폭행 조사를 하라고 지시하였던바, 한겨레 기레기 기사의 진실은 남평에서 최인영과 같이 있었던 시민군들 중 5명이 경신여고 1학년 Y양을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도끼를 소지한 북한특수군(무장폭도로 위장한 인솔자)을 따라와 이곳에서 무기를 탈취한 후 북한 구호 ”전두환 찢어죽이자“를 외쳤던 청소년 용접공 최인영 군도 전두환을 어떤 잘못을 저지른 광주시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경찰서 건물 뒤에 무기고라 씌어진 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도끼로 무기고 문을 열고 가지런하게 세워진 카빈총 20여정과 탄알 박스 7,8개를 들고 나왔다. 카빈총 사이에는 Ml 몇 정이 끼여 있고 수류탄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 (최인영 1989).
시민군 성폭행 현장 시민군 증언
▲ 경신여고 1학년 Y양이 성폭행을 당한 장소였던 남평 일대는 광주사태 초기부터 시민군 점령 지역이었으며, 공수부대원 그림자도 간 적이 없었다. 여기서 북한군을 따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던 최인영도 전두환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증언한다.

    당시 20세의 양화공으로서 청소년 무장단체의 일원이었던 최영철은 중흥동 임산부 최미애씨 사망사건과 관련이 있다. 5월 21일 그의 일행이 중흥동 주택가에서 교회를 향하여 총기난사를 하였을 때 임산부 최미애씨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5월 21일부터 광주 여기저기서 마구 함부로 총을 쏘고 다녔던 최영철도 자신은 광주사택 끝나기 전에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해제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최규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는데, 그때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후에 상무대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 알게 된 정도였다 (최영철 1988).
양화공 최영철의 광주사태 무용담
▲ 최영철은 광주 여기저기서 함부로 마구 총기난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5.18민주유공자가 되었다. 그가 전두환과 싸우기 위해서 총을 쏘았는가? 최영철은 그게 아니었다고, 자기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었다고 증언한다.

    간첩들이 중고생들과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북한말 구호 ”전두환 찢어죽이라“를 외치게 하였을 때 전두환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고 외치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17세의 광주상고 야간 2학년 학생 김행주도 막연히 전두환이 광주시청에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인물일 것으로 상상하며 악을 쓰고 구호를 외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계속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훌라송을 불렀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가 물러나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끝날 것 같은 생각에 악을 쓰고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김행주 1989).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던 시민군 증언
▲ 5월 21일 북한군이 분배한 총을 덥썩 받은 고등학생들 중에 광주상고 학생들이 가장 많았으나 그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난 해에 광주단체들이 전두환 회고록 가처분하기 위하여 앞장 세운 인물이 5.18유족 김길자씨이다. 그녀가 5.18유족이 된 사연은 광주상고 1학년 학생이었던 문재학 군이 5월 27일 새벽에 분수대 옆에 배치되어 있다가 분수대 쪽을 향해 집단발포하는 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민간인들이 불법으로 총기를 소지하고 있으면 으레 이런 총기사고가 발생한다.

    무장폭도로 위장한 무장공비들은 5월 21일 저녁 전남도청을 점령하고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한 후 고등학생들을 시민군 차에 태우고 밤새도록 광주시 시가지를 질주하였는데, 그 차에 탄 고등학생들 중에 문재학 군도 있었다. 문재학은 간첩들이 시키는 대로 온종일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그의 어머니 김길자 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19일부터는 휴교령이 내려서 재학이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단속했는데, 21일에는 친구집에 간다면서 나갔다. 다음날 하룻밤을 밖에서 자고 돌아온 재학이는 전날 시민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하였는데 목이 쉬어 있었다 (김길자, 문재학 1988).
"김대중 씨가 구속되었대요.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두환이 보고 물러가라고 외치고 다녀요."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 증언
▲ 심지어 전두환 회고록 가처분에 앞장섰던 김길자 씨도 자기 아들 문재학을 포함한 광주상고의 무장학생들은 전두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증언한다.

19일부터는 휴교령이 내려서 재학이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단속했는데, 21일에는 친구집에 간다면서 나갔다. 다음날 하룻밤을 밖에서 자고 돌아온 재학이는 전날 시민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고 하였는데 목이 쉬어 있었다 (김길자, 문재학 1988).

    박순기는 광주기독병원 외과의사 김성봉이 허위로 진단서를 작성해 준 덕분에 5.18민주유공자가 된 인물이다. 박순기의 증언에서 ‘학생들’은 무장폭도로 위장한 무장공비들 및 서방 깡패들을 일컫는다. 박순기가 탄 시위버스에는 북한군 조장이 타고 있었다. 그래서 박순기는 북한군 조장이 ”도청을 2시에 밀어버리자“고 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장공비들과 어울려 시위버스를 타고 다니고, 간첩들이 선창하는 대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던 박순기도 자신은 그때 난생 처음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를 들었던 것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 버스에는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있었는데 우리도 그 버스에 올라타 친구와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박순기 1988).
행상원 박순기의 5.18 증언
▲ 무장깡패들과 더불어 시위버스를 타고 다니며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던 행상원 박순기도 광주사태 일어난 지 며칠 후에야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들어보았다고 증언한다.

    광주에서 도시 게릴라전 임무를 수행하던 무장공비들과 부화하여 같이 무장폭도로 활동하며, 간첩들이 선창하는 대로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찢어죽이라’를 외쳤던 자들을 미화하여 시민군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민군들 중 전두환이 누군지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이 만들어 북한방송으로 간첩들과 종북세력에게 전달된 것들이었다.

    사이비 인권변호사 출신 독재자 문재인이 또 5.18 특별법을 만들고, 5.18진상규명위를 만들어 3년간 재조사하게 한 이유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시민군 무기 강제회수 작전에 관계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 보아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는 광주시민들이 직접 눈으로 전두환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북한이 프로파간다 심리전을 위해 만들어내어 간첩 및 종북세력에 지령을 내려 퍼뜨린 유언비어들이기 때문이다.

    ☞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CIA 5.18 문건 목록

(2018년 7월 20일 작성)

* 이 기사에서 인용된 인용문들의 자세한 참고문헌 정보는 '역사로서의 5.18' '문재인의 5.18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등의 저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