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5·18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

문재인의 동무 도끼에 얽힌 5.18 유족의 비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최근에 문재인이 김정은과 위장평화쇼한 판문점에서 발생한 1976년 8월 18일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란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도끼로 한 미군 병사를 살해한 사건을 지칭힌다. 그 후 4년이 채 못된 1980년 5월에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서 도끼로 인명 살상을 하였다.


    광주사태 때 광주 일원에서 시민군 활동을 한 북한군들을 광수라고 부르게 된 두 가지 경위가 있다. 첫째 경위는 북한군 광수가 광주에서 시민군 복장으로 맹활약하는 것을 북한 텔레비전의 광주인민봉기 실황방송에서 보았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두번째 경위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에도 무장공비 활동, 즉 시민군 활동을 하기 위해 강릉 침투를 시도하다가 체포된 후 북한군 도끼 증언을 한 북한군 이름도 광수였기 때문이다. 위 영상 01:18 에서부터 보면 북한특수군이 광주사태 때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한에서 손도끼를 던져 사람 죽이는 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북한군이 광주에서 폭동 선동을 목적으로 그토록 잔혹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훈련을 받은 후 남파되었기 때문이다.

도끼로 무장한 광주사태 시위대

    위 사진 속의 도끼를 든 오일팔 난동자들은 광주시민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광주시민들 모두가 남의 버스를 탈취하여 유리창을 전부 깨버릴 만큼 난폭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도시 사람들에게 도끼가 있을리도 만무하고, 도끼 들고 시위하는 광주시민들은 별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도끼를 든 폼도 도시 사람 폼이 아니고, 사진기자를 노려보는 난동자의 투박한 두발상태를 보아도 도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만약 저 자가 침으로 광주시민이요, 남한의 5.18국가유공자라면 광주시에서 저 자의 성명과 신원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힌츠페터의 5월 20일자 사진

    최근에 김정은이 베트남 모델을 원한다고 하였는데, 광주사태가 바로 베트남 모델이었다. 베트남 모델이란 먼저 평화협정 체결 후 시민군으로 위장한 특수군을 남파시켜 무장반란으로 민주화를 가장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여 적화통일한 후에 반미 데모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단지, 평화협정 체결이 생략되었을 뿐 김일성이 그것을 벤치마킹하여 일으킨 것이 광주사태였다. 조총련과 연계하여 종북활동을 한 힌츠페터는 5.18을 왜곡한 인물이지만 5.18의 진실규명에 획기적인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힌츠페터가 5월 20일에 찍은 사진은 그 날 트럭을 타고 광주로 침투한 북한 특수군이 북한 특수군의 게릴라전 무기였던 손도끼를 소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광주에서 손도끼를 무엇에 사용하였는가?

힌츠페터가 5월 20일 김영삼 자택에서 찍은 사진

    힌츠페터는 광주수기에서 뭔가 중대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의 수기에는 그가 김사복과 더불어 5월 20일 광주로 직행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는 아침 9시에 먼저 김영삼씨 자택으로 갔다. 그 날 모임은 공개 모임이 아니라 김영삼씨가 극비에 초청한 인물들만 모이는 모임이었다. 만약 김사복이 평범한 택시운전사였다면 어떻게 그 정보를 알고 힌츠페터를 데리고 갔는가? 위 사진 우측 상단에서 힌츠페터가 5월 20일 김영삼 자택 앞에서 촬영하여 그 다음날 독일 ARD 방송에서 방송한 영상 화면이 보인다. 여기 경천동지할 사실이 있다. 힌츠페터가 숨긴 비밀은 이것이다. 그는 두건으로 비표를 한 북한특수군 일행을 그 날 늦은 오후 광주 입구에서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 두건을 쓴 자들은 광주에서 도끼를 휘두르던 자들인데 그들이 무슨 일로 5월 20일 이른 아침에 김영삼씨 집 앞에 모여 있었는가?

    1974년에 김대중의 한민통 청년동지가 문세광이었고, 문세광의 지인 김사복은 광복절 육영수 여사 암살 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문세광은 범행을 위해 김사복의 승용차를 이용하였었는데, 김사복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에 이용되도록 문세광에게 빌려주었었던 바로 그 검정색 승용차에 힌츠페터를 태우고 다녔다. 위 우측 하단 사진을 보면 바로 그 차를 김영삼씨 집 옆길에 주차한 김사복이 차안을 살피는 모습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 목에 북괴 공작원 비표를 한 괴청년이 보인다.

힌츠페터가 5월 20일 김영삼 자택에서 찍은 사진

    위 영상 캡처를 보면 빨간색으로 북괴 공작원 비표를 한 괴청년이 두 명 보이고,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수건을 두건처럼 쓰고 있고 왼쪽의 다른 한 명은 같은 수건을 휴대용 복면으로 몸에 걸치고 있다. 두 명 모두 빨간 상의로 비표를 하고 있다. 이 복면용 수건과 붉은 비표 그 다음날 오전 9시에 괴무장단체가 아세아자동차를 습격하여 군용차량을 탈취하였을 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보다 하루 먼저 서울에서, 그것도 김영삼씨 집 앞에 동일 괴한들이 출현한 사실이 힌츠페터의 영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이 자들이 왜 김영삼씨 집 앞에 갑자기 모였을까? 한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종북세력과 북한의 원래 계획은 서울과 광주와 마산과 부산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다음날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에서 김영삼씨를 살해하고 군경에 누명을 씌우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폭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빨간 잠바 입은 복면시민군

    그 다음날인 21일 오전에 갑자기 광주에 출현한 무장괴한들 대부분은 빨간 잠바 혹은 빨간 셔츠 등으로 비표를 하고 있었다. 한국 남자들은 아무도 5월 하순에는 그런 우중충한 빨간색 두터운 옷을 입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광주에서 총과 무기를 든 자들은 으례히 위 사진에서 보이는 빨간색 쟈킷을 입었다. 5.18 왜곡세력은 저 빨간 잠바들이 외지인이 아닌 시민들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면 왜 저런 진짜 시민군들에게 이름이 없는가? 무엇보다도 광주시민들은 왜 저 자들이 5월 20일 오전에 김영삼 씨 집 앞에 모여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당시 열차를 이용하는 일반 여행자들에게는 광주에서 서울은 아주 머나먼 곳이었다.

    (첨언하면 위 사진 속의 완벽한 전사 차림의 광수는 문재인의 동무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추론의 근거는 문재인의 동무들이 5월 15일 오후에 시민버스를 탈취한 후 북한공작원에게나 가능한 특수 운전으로 버스를 몰아 경찰을 잔혹하게 죽인 사건이다. 그 차량테러범들은 문재인의 동무로서 그 날 같이 활동하였던 것이요, 그 후에는 광주에 침투하여 군경을 대상으로 같은 방법의 차량 테러를 하였다는 점에서 문재인의 동무들이다.)

    북괴 공작원끼리만 알 수 있었던 비표를 한 괴청년들이 왜 김영삼씨 자택 침투를 시도하였는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진실 규명을 위해 문재인이 하여야 할 역할이 있다. 문재인도 명색이 인권변호사라면 그가 인솔한 경희대 시위대 중에서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경찰들을 버스로 깔아뭉갠 자들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나라에 법치가 선다. 만약 그들의 이름을 모르면 위 캡처 속의 괴청년들의 얼굴이 낯에 익은지 밝혀주어야 한다. 분명히 차량 테러범들은 서울에서 경찰을 살해한 후 광주로 이동하여 같은 방법으로 군경을 살해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진짜 경희대 학생들이었는지 아니면 시위대로 위장한 북괴 공작원들이었는지는 분명히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18 성명서

    위 5.18기록물은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성명서의 일부분이다. 힌츠페터의 영상은 북한공작원들이 (완도시민군들과 더불어) 5월 20일 오후에 광주로 침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른아침 금남로 일대에 저 유인물 4만장이 살포되었다. 한 장 한 장을 손수 등사하여야 하던 시절에 수만 장을 등사하려면 족히 며칠은 걸렸을 것이다. 광주사태는 사전 계획되고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작성자 명의가 전남 민주 구국 총학생연맹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광주시에 문의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광주시민들은 '민주 구국 총학생연맹'이란 괴단체를 만들거나 조직한 적이 없었다. ('민주 구국 총학생연맹'의 접두어 '민주'는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의 약자임.) '민주구국학생연맹'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의 위장명칭 중의 하나, 즉 공산당 명칭이으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은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목적으로 1977년 연말에 김일성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자생간첩단이었으며, 김일성에게 보내는 충성편지 친필 작성자는 현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이었다.

     그런데 위 성명서에는 북한공작원이 광주시민들에게 내리는 지령문처럼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광주 금남로는 농토가 아님에도 "애국 농민이여!"로 시작하는 문장이 있으며, "손에는 삽과 괭이를 들고 일어서라!"는 지령이 있다. 십대 청소년 학생들이 어른들에게 이렇게 지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금남로에서 농사짓기 위해 괭이 들고 모이라는 말이 아니었다. 괭이는 공산주의 혁명기를 상징한다. 그리고 여기서 괭이의 용도는 살상무기였으며, 그 살상 대상이 대한민국 경찰과 군인들이었다.

    위 성명서 4만장을 등사하여 금남로 일대에 4만장을 살포한 자들은 들불야학 청소년들이었다. 당시 광천동은 공업단지였고, 주로 노동자들로 주민들이 구성되어 있었던 광천동은 그 당시에는 광주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많았고, 광주운동권이 들불야학을 운영하며 이런 청소년들을 의식화하니 의식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청소년들은 윤상원 등 광주운동권이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게끔 의식화되어 있었다.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소속이었던 광주운동권은 들불야학이란 위장명칭으로 근 2년간 시민군 요원을 양성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래서 시민군들 중 북한군과 양아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광천동 들불야학 청소년들이었다.

    광주사태는 사기꾼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5월 17일 늦은 밤에 김대중이 연행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바로 5월 초부터 이미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유인물(이른바 5.18성명서)들이 살포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윤한봉과 윤상원 등 김대중의 사조직들은 자신들이 직접 유인물을 배포한 것이 아니라, 경찰 당국이 의심하지 않는 들불야학 청소년들을 시켰다. 그리고 5월 18일부터 들불야학은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유인물을 대량 제작하는 체제로 가동되었다. 지금도 5.18 왜곡세력이 북한군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부인할 때 사용하는 사진이 들불야학 청소년 사진들이다. 물론 들불야학 청소년들은 북한군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들불야학 청소년들은 전투조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전투조는 주로 북한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들불야학 청소년들은 주동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아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을 광주운동권이 아무리 좌익이념으로 세뇌시켜도 철부지는 철부지다. 기본적으로 이 애들은 순수하고 순진한 애들이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배후세력이 누군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민주구국학생연맹'이란 위장명의의 공산당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었고,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나 중학교에 진학한 적도 없었고, 다수는 초등학교 중퇴자들이었다. 광주라고 장유유서가 바뀌는 특별한 도시도 아닐진대 이 아이들이 전라도의 모든 어른들을 향하여 "전 도민은...광주신역으로 모이자"고 명령조로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광주시는 북한군 공작원의 지령 어조의 이 삐라 문안 실제 작성자가 누구인지를 밝혀주지 않는 것인가?

손도끼를 휘두르는 5.18 난동자

    위 사진은 5.18왜곡세력이 평화시위라고 주장하는 광주사태의 한 장면이다. 광주가 농사짓는 도시도 아니고, 도끼로 농사짓는 동민도 없고, 저 괴청년처럼 도끼를 무기로 사용할 줄 아는 농민도 없고, 괴청년 얼굴형을 보아도 북한사람 얼굴형이다. emfqn광주가 농사짓는 도시도 아니고, 도끼로 농사짓는 동민도 없고, 저 괴청년처럼 도끼를 무기로 사용할 줄 아는 농민도 없고, 괴청년 얼굴형을 보아도 북한사람 얼굴형이다. 들불야학 청소년들을 나중에 사람들이 시민군이라고 불러준 것이지, 그들이 실제로 무기를 든 때는 5월 27일 새벽에 단 한번 뿐이었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도끼를 무기로 사용한 자들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


긴 낫을 소지한 5.18 난동자

    '공수부대 집단발포'로 명칭이 잘못 붙은 사건의 진실은 시민군 총기난사였다. 그리고 5월 21일 정오 무렵 괴무장단체의 총기난사가 시작되기 전에 도청광장에는 긴장대에 낫을 단 5.18난동자들이 모여들어 그곳에서 부동자세로 서있는 공수부대원들 목에 낫을 걸고 "살려줄까 말까" 조롱하며 겁을 주고 있었다.


    전남대 국문과 출신 5.18 문학가 임철우는 5.18 문학의 대표작인 그의 소설 '봄날'에서 그런 사실, 즉 이 사건 피해자였던 11공수여단 62대대 문병소 중사의 부하 홍일병이 증언한 사실을 가해자였던 시민군 시각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무엇보다 상당수 시민들의 손에는 저마다 무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각목이며 쇠파이프가 대부분이 었지만 더러는 낫이나 칼 그리고 야구방망이를 쥐고 있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그 중엔 길다란 각목 끝에다가 낫이나 칼을 동여맨 뒤, 대담하게도 멘 앞줄까지 나와서 그걸로 공수대원들을향해 찌르는 시늉을 해보이며 킬킬대는 자들도 있다.
임철우의 5.18문학 봄날

    광주사태 최초 희생자들은 민간인들이 아니라 경찰들과 군인들이었다. 5월 20일 밤에 광주에서는 경찰들과 군인이 버스와 트럭에 무참하게 깔려 사망하는 사고들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광주시민들이 남달리 난폭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북한공작원들로 추정되는 외지인 무장단체가 힌츠페터와 더불어 광주로 침투한 지 불과 서너시간 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군인들 중 첫 희생자는 제대와 부인의 첫 출산을 한 달 앞둔 정관철 하사(순직후 중사로 진급)였다.

    막대한 보상금을 받은 민간인 5.18 유족과 달리 정관철 중사 부인이 달랑 받은 것은 인헌무공훈장(5급)이었는데, 광주청문회 당시 운동권이 계엄군 사망자와 부상자가 수여받은 훈장마저 문제 삼아 정관철 중사 훈장 내역이 월간경향 1989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鄭官澈 (당시 제3특전여단 소속·상사·강원·1954년 10월 19일생·사망).
공적사항: 충정작전에 참가하여 5월 20일 22시경 폭도(가 탄) 8톤 트럭이 과속으로 계엄군에 돌진하여 대퇴부골절상으로 순직 (월간경향 1989, 1:454).

    3공수여단 12대대 작전병 김치년은 5월 20일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에 광주역전에서 시위대가 정관철 중사를 죽인 직후 보고받은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20일 오후 7시께 우리 12대대는 광주역에 있던 3공수 15대대를 지원하고 KBS 광주방송국을 보호하라는 여단장의 지시를 받았다. 우리 부대는 광주역으로 이동하여 15대대와 합류했다. 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우리 부대가 밀리는 상황을 계속 보고해 왔다. 악몽을 꾸는 듯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최강의 부대라고 늘상 자부할 만큼 강도 높은 훈련과 시범을 보인 부대였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밀리고 있었다. 교신 내용은 매우 험악하게 변해갔다.
―차량들이 돌진해 오고 있다. 오후 8시께 차량돌진 사태가 연이어 접수됐다. 그러다가 밤 10시가 될 무렵 드디어 피해상황이 접수됐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16대대의 한 중사다.
―우리 대대원도 차량에 깔려 부상당했다.
당시 차량에 깔려 사망한 군인은 정관철 중사(사망 후 上士로 특진됨)였다. 그는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동료 하사관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부상병이 생겼다는 무전을 받은 지 20여 분이 지난 후 부상자들이 후송되어왔다. 그중 한 사람, 6지역대 장하사가 차량에 다리를 깔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차량 한 대가 돌진해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상당했다고 했다. 張하사의 말에 따르면 차량은 지그재그로 진압군을 향하여 마구 돌진해 왔고 이에 병사들은 겁을 먹고 피하기에 급급했으며 진압 또한 매우 과격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張하사와 함께 실려 온 두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경상도 번호판을 단 화물트럭의 운전기사와 조수였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경상도 차량이란 이유로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구타를 당했는지 옷도 찢겨지고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김치년 1996, 429-430).

    『正史 5·18』 276쪽에는 잔혹하게 군인들을 깔아뭉갠 시위대 11톤 트럭에는 화염 드럼통 2개가 실려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화염드럼통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밤 10시 30분께.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 주유소에서 한 청년이 트럭에다 드럼통 2개를 싣고 휘발유를 가득 채운뒤 불을 붙여 계엄군들을 향해 질주한다. 청년은 계엄군 전방 20여m 앞에서 뛰어내리고 트럭과 드럼통은 불덩어리가 되어 돌진한다.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분수대를 들이받는다. 휘발유 드럼통이 주위를 진통하는 폭발음과 함께 폭발하고 불기둥이 솟는다 (광주매일 『正史 5·18』 특별취재반 1995, 276).

    그 날 밤 10시경에 동시에 3공수여단 하사관 4명이 트럭에 깔렸는데, 3 명의 하사관은 바로 광주역 앞에서 8톤 트럭에 깔리고, 정관철 중사는 광주 인근에서 11톤 트럭에 깔렸다. 제대 말년의 정관철 하사는 위험한 시위 현장에 가지 않아도 되었는데, 배식차가 신안동 굴다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다가 희생되었다.

    광주사태 기간 중 계엄군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식사 문제였다. 서울에서 5월 19일 밤 막 취침하려는 순간 갑자기 소집되어 오전 1시에 청량리역에 집결하여 열차 편으로 6시간 달려 오전 7시경 광주역에 도착한 3공수여단 장병들에게는 잠을 자지 못한 채 광주에서 고달픈 충정작전의 일과가 시작된 20일이었다. 광주역에 도착해 보니 7공수 병력 일부가 역 광장에 주저앉아 매우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었다. 부마사태 때도 동원된 경험이 있는 3공수 장병들은 처음에는 그만큼 자신만만하였다. 그러나 불과 10시간만에 그 그림이 확 바뀌었다. 역 광장에 주저앉아 식사할 수 있는 모습이 생애 가장 부러운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시위대에게는 포식을 시키면서도 계엄군 배식차 가는 길을 막아 전혀 식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간단한 요기라도 해야 광주역 사수를 할 수 있는 것인데, 오후 7시가 지났건만 여전히 배식차가 오지 않고 있었다. 3공수여단 본부요원이 2.5톤 차량 2대로 시내 작전 부대의 저녁식사 보급을 위해서는 전남대에서 5백미터 가량 떨어진 신안동 굴다리를 통과하여야 했다. 그런데 배식차 통과 지점과 시간을 봉기 주동자들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그 날 5월 20일 저녁 6시 반경에 시위대 2천여명이 신안동 굴다리 부근에 매복하고 있다가 두 대의 배식차를 습격하였다.

    비록 자기와 소속이 다른 대대 급식을 위한 작전이었지만 정관철 중사는 온종일 쉬지 못하고 저녁식사도 못한 채 밤새도록 시위대 공격에 또 시달려야 할 12대대와 15대대 장병들을 생각하며 배식차 피습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 때 그가 인솔할 수 있는 병력은 몇 명의 행정병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신안동 굴다리 인근에서 배식차 통과를 막으려는 시위대와 길을 열어 주려는 정 중사 일행 간에 무려 세 시간 반 동안의 격전이 벌어졌다. 유일한 진압장비는 최류탄이었는데, 마스크가 없어서 최류탄을 쏘면 공수부대도 똑같이 마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똑같이 최류탄 가스에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한 시간 반 만에 시위대가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간신히 길이 뚫렸다는 안도의 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더 큰 싸움이 시작되었다. 배식차 두 대의 길을 막기 위해 이번에는 시위대 차량 1백 여대가 몰려왔던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두 시간 더 버텼으나 밤 10시경 갑자기 광주역 쪽에서 맹속력으로 돌진해 온 시위대 11톤 트럭에 정관철 중사가 깔려 즉사하였다.

    1995년의 검찰보고서는 정관철 중사가 시위대 11톤 트럭에 깔린 현장에서 즉사하여 순직한 사건을 이렇게 기록한다:

한편 18:30경 3공수여단 本部要員이 2.5톤 차량 2대로 시내 작전 부대의 저녁식사 보급을 위해 전남대에서 5백미터 가량 떨어진 신안동 굴다리 부근에 이르러 시위대 2천여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전남대에 잔류하고 있던 16대대 병력이 출동, 최류탄을 발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나, 20:00경 고속도로 쪽에서 차량 1백여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몰려와 공방전을 벌였으며, 16대대의 강력한 진압으로 시위대들이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여 소강상태가 유지되던 22:00경 갑자기 시위대의 11톤 트럭 1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1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하였음 (서울지방검찰청 1995, 87-88).

    정관철 중사가 사망하고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은 한 달 후에 태어날 그의 아들이 아버지 없는 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한 가정의 큰 비극이요 슬픔이었다. 그런데 시위대가 11톤 트럭으로 정 중사를 깔아 살해한 사건은 임신 9개월의 아내가 갓 스무 살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는 비극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사태 전개 및 충정작전에 큰 여파를 남겼다. 5월 20일 밤 10시에 정관철 중사가 시위대의 11톤 트럭에 깔려 사망하고, 장(張) 하사 등 3명의 하사관이 시위대의 8톤 트럭에 깔려 중상을 입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광주시청과 광주역 사수 및 KBS방송국 경비를 포기하고 전 병력 철수를 지시한다. 3공수 12대대가 광주시청에서 철수하자마자 시위군중이 시청으로 몰려와 방화를 시도하였으며, KBS방송국이 불에 탔다. 3공수가 철수하였기에 광주시 4개 방송국 경비를 담당하던 31사(광주향토사단) 병력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21일 오후에 11공수도 도청 사수를 포기하고 광주 외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흥동 임산부 최미애씨는 중흥동 청소년 시민군들의 총기난사 희생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해마다 5월이면 5.18측과 언론은 이 사건의 누명을 애매한 국군에 뒤집어씌우는 장사를 한다. 그러나 5.18측과 언론이 숨겨온 또 한 명의 임산부 이야기가--제대가 한 달밖에 안 남은 남편 정관철 중사가 제대하는 날이 해산 예정일이라 남편과 재회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가 사망했다는 청천 벽력같은 통지를 받고 울부짖어야 했던 젊은 임산부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으로 쓸쓸하게 남편 장례식을 치러야 했을 때 그 쓰라린 비애가 얼마나 심하였을까? 그러나 아마도 보다 큰 슬픔은 정관철 중사의 부인은 그녀의 남편이 왜 제대를 한 달 앞둔 1980년 5월 20일 갑자기 사망하였는지 여태껏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우리 역시 모른다. 그러나 사건의 정황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한가지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이 1980년 5월 15일에 문재인이 인솔한 경희대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헌 후 경찰들을 향하여 질주하여 여러 명의 사상자가 생기게 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있는 사건 혹은 하나로 얽혀진 사이었다. 한국에서 차량 테러로 경찰과 군인들을 죽이는 사건은 매월 발생하는 사건도 아니요, 매년 발생하는 사건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이 1980년 5월 15일부터 20일 사이에만 서울과 광주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는가? 생각해 보라. 문재인이 인솔한 시위대가 차량테러로 경찰을 죽인 사건은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이 그 사건을 근거로 자기도 광주유공자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서울에서 발생한 시위대 차량 테러와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대 차량 테러가 전혀 별개의 사건이었다면 문재인이 이렇게 주장할 리 있겠는가?

(2018년 5월 7일 작성/ 8일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