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5.18 토론자료 추천연구도서  광우사태 동영상 상영관

탈북자들의 5.18 증언록 맛보기


직접 광주에 갔다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무기)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

각 특수전부대별 80년도 남한침투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자가 40명이었다. 조별 부대별로 작성된 '전투기록장'을 보았다 (p. 31).

당시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들이 중심이 돼서 광주인민봉기를 물밑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봉기를 성공시켜 가지고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했다 (pp. 31-32).

당 기관에서 말하는데 의하면 북한군 특수부대들과 전문 공작부대가 남한에 침투하여 광주봉기를 비롯해서 주요 항쟁시위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 (p. 32).

직접 남조선에 갔다가 온 사람에게 들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들었다.  남조선사람들은 <같이 협동하여 싸우자고 해도 그들은 오히려 경계하고 무서워했다>고 하였다. 광주봉기에 참가해서 남조선인민들 세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내 생각엔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들과 현장의 간첩들의 조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4.19 혁명 때도 부분적으로 간첩들의 조작이 있다는 것을 북한에서는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조선에 숨어서 활동하는 10만 명의 간첩들이 교란작전을 할 것이라고 하더라 (p. 32).

5.18 광주인민봉기 때 북한 중앙TV에서는 매일과 같이 끔찍한 영상물들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들과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갔다가 온 친구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하게 굴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중대한 방송으로 취급하며 하루 종일 광주봉기를 방영하였다. 광주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화염병을 뿌리는 장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 등을...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라는 멘트로 시간마다 반복하여 보여줬다. 광주가 진압되자 사진들을 광범위하게 전시 하였는데, 임산부 배를 가르는 장면과 어린 여자대학생의 옷을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을 비롯한 끔찍한 살인 장면이 있었다.

테레비에서 보았다. 친구 한명이 텔레비에서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이라고 하였다 (p. 33).

큰 언니 형부가 북에서 특별훈련을 받은 미인 아가씨들도 광주봉기에 개입했고 그들이 뒤에서 조정했다고 하였다.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인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

   남조선에서 북한으로 귀순한 사람이 부대에 내려와서 강연하는 것을 보고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광주봉기 때 시민군 지휘부에 있었고 북한 특수부대와 혐동해서 통일을 위해 싸웠다 하였다.

남조선에 갔다가 부상을 당하고 온 공장 당 위원회 초급당 비서에게서 강연시간에 직접 들었다 (p. 34).

대학을 마치고 3대혁명소조 기간에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가서 싸우고 온 사람한테서 들었다. 같이 나갔다가 죽은 사람을 불태워서 흔적을 없애 버렸다고 말하였다.

광주봉기를 텔레비전에서 매일 방송하였고, 북한사람들은, 더구나 여자들은 무서워서 사람 죽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다. 텔레비를 보면서 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사람들이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p. 35).

5.18을 북한이 기획-실천했다는 데 대한 증언들 (1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 (p. 35).

증언 1: 교육자의 시각에서 본 5.18사건

1981년 초부터 북한 군인들과 사회간부들의 입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북한의 특수부대사람들이 참가했었다는 구체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북한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p. 47).

용감무쌍한 우리의 영웅적 인민군대가 목숨으로 지켜주는 사회주의 조국에서 사는 행복과 자부심이 저절로 넘쳐나게 해주는 소설과도 같은 5.18광주사건의 이야기였다. 광주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수하게 전해졌으며 마치 자기들이 갔다 온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만들었다. 공공장소나 모임장소에서 사람들은 희열에 넘쳐 광주사태의 이야기를 화제 거리로 주고받았다 (p. 48).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광주사건은 북한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다 (p. 52).

광주사건! 그거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든 광주사건이라는 말만 나오게 되면 저저마다 입을 열고 말 나가는 대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 정도였다 (p. 54).

특히 1980년 5월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광주를 비롯해서 전국적인 규모에서 시작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북한정권의 대남작전에 활력을 주고 기지개를 펼 수 있게 하는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p. 68).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p. 69).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그들 일곱 사람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 그들이 남조선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째어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 있었고 김일성 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pp. 69-72).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 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일어나서 공권력이 흔들리게 되면 인민군대의 남침도발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고 하니 소름이 끼칠 만도 한 일이었다. 잔인하고 피비린내가 났던 5·18광주폭동에 대한 계획은 이런 북한의 끈질긴 도발과 조작의 어두운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준비상태가 마무리되어 갔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pp. 73-74).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 (p. 76).

안창식(나의 내연남)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원 세 명에게 여자를 추격해서 그를 조용히 처리하고 시신을 소각하되 사진기는 무조건 회수해 올 것을 명령했다.
  분명히 다른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는 남조선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광주 시내를 뒤지면서 색다른 냄새를 맡고 있는 어느 특수기관의 스파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여자는 북한요원들에 의해서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갔고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p. 78).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p. 74).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p. 76).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임무를 받고 타격대에서 파견되었던 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안창식과 함께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부상자중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치료받다가 1년 뒤에 사망) 부산, 마산폭동에 참가하기위해서 먼저 남파되었다가 그들과 합류한 7명의 일행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pp. 79-80).

위에 보이는 물체는 북한의 평양룡성 기계공장에서 만든 1만 톤 프레스다. 윗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5.18청년호라는 글귀가 보인다. 남조선에서 일어났던 5.18광주사태를 기리기 위해서 김정일이 직접 5.18청년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p. 82).

김일성이 살아 생전에 남조선의 광주사태를 기념하기 위하여 같은 날짜인 5월 18일에 어느 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북한의 철도부문에서 '5·18무사고정시견인운동'이 나왔고 1만 톤 대형프레스의 이름에 '5·18 청년호', 제철소의 이름에 '5·18청년제철소', 학생들이 파철을 모아 군수공장으로 보내서 만든 탱크 이름에 '5·18전진호'라고 이름을 붙이는 등 북한은 전 당과 전 국가, 전 국민적으로 5·18의 정당성과 계승성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대중사회에 의식화하였다. 이처럼 북한의 대남전략은 체제의 합법적인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조직되고 한국사회에 다량의 친북좌파 세력들을 양성해 낼 정도로 그 범위가 질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p. 83).

증언 2: 북한군건설여단 33명의 떼죽음 속에 숨겨진 광주의 비밀

낫을든 군인80명을 상대한 5.18공화국영웅

 

북한군건설여단 33명의 떼죽음 속에
숨겨진 광주의 비밀
(전 함경북도 무산군 도시건설사업소 노동자. 제대군인)

나의 탈북동기

나는 2003년 2월 달에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근 2년이 넘도록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5년 가을에 남한에 입국한 북한인민군 제대군인 출신이다. 북한에서 내가 살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시내였고 나는 군대에서 처벌 제대된 후 도시건설사업소에 배치 받아 평범한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나의 아버님은 1996년 9월, 북한의 전 지역에서 식량난이 한창일 때 폐결핵과 함께 기근으로 인한 영향실조가 겹치면서 반년동안 매일 피를 토하면서 고생하시다가 불쌍하게 돌아가셨고 지금은 형님 내외분이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북한을 탈출하게 된 경위는 배고픔이 정확한 이유라고도 할 수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배고픔을 이겨보려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하다가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지른 것이 탈북을 결심하게 된 기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 .

나의 부대는 공병국 27건설여단

내가 북한에서 군사복무를 한 부대는 공병국 산하 27건설여단이다. 북한에서 건설여단이라 하면 인민군대 중에서도 제일 수준이 낮은 부대로 취급되고 일 년에 총 한방도 제대로 쏴보지 못하는 부대라고 정평이 나있다. 그만큼 정규군의 특징을 갖고 전쟁을 대비해서 훈련을 하는 부대가 아니라 군복을 입고 총은 들고 있지만 국가적으로 제기되는 특수한 건설대상들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부대이기 때문이다. 이 부대들이 기본적으로 담당하는 건설대상들은 김일성, 김정일과 연결되어 있는 혁명 사적지를 만든다든가 별장과 도로를 만드는 일, 남조선으로 내려오는 땅굴을 파는 일,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지하 군수공장을 만드는 일 등 일반 사회부문 건설 자들이 맡을 수 없는 일들이다. 내 자신이 복무한 부대이기 때문에 말하기가 좀 멋쩍은데도 있지만 건설부대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계급적으로 토대가 안 좋거나 부모가 과오가 있고 사회적으로 별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대상들이 걸러져서 오는 부대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 . 건설부대의 특징은 신병훈련을 한 달반을 받고나서 부대에 배치 받은 다음부터는 아침에 두 시간 정치상학을 제외하고는 매일과 같이 건설현장에 나가서 막노동을 하는 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정해진 일과이다. 건설부대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어떤 부대라는 것을 미리 알고 왔지만 정작 군복을 입고 부대에 입대해서 직접 체험을 해보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 강도가 너무나도 센 부대였고 깡패조직과 대비해도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천하에 무질서 하고 법이 없는 무지막지한 부대였다.

북한에서 건설 부대들을 가리켜서 거지부대, 날라리 부대(빈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부대라는 뜻)라고 멸시하고 비웃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북한에서는 군대에 갔다 오면 사람이 돼서 온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고 또한 어떤 경우에는 풍습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복무한 공병 국 산하 건설여단은 그와는 정 반대이다. 건설 부대들은 사람을 만들어 주는 부대가 아니라 패싸움을 가리키고 도적질을 배워주며 사회 여성들을 강간하는 하는 등 군율이라는 것은 찾아볼 내야 찾아 볼 수가 없고 나쁜 것 중에도 가장 더럽고 나쁜 것만 골라서 “교육”하고 양성시키는 지저분한 부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건설부대는 도적놈 집단이요, 강간과 패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라고 할 수 있다. 역대로 부대자체의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건설부대에 들어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 흐름을 따라서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타락하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순리적인 일이다. . .남한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북한에서 부대와 부대끼리 싸워서 서로의 힘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통 일반적인 일이다. . . 대체로 건설하는 부대가 아니라면 다른 수단을 쓰지 않고 기술적으로 싸움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인데 공병국산하의 건설 부대들은 쟁기(몽둥이나 곡괭이, 혹은 삽 같은 대용 수단들)를 들고 상대를 공격해서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특징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건설 부대들의 싸움하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지루하게 설명하는지 아래에 내려가면서 독자들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

열차 칸에서 잘 못 만난 대남 공작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1982년 7월 중순경에 우리 부대는 평양 501호 공사(인민무력부 지하갱도 확장공사)를 끝마치고 자강도 전천군 고인 구에 위치해 있는 산골짜기에 미사일 발사 기지를 만드는데 대한 공병국의 명령을 받고 전 여단이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에서 조총련을 통해서 사들여온 비싼 건설장비들은 화물열차편을 이용해서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인원들은 대대, 중대별로 나뉘어서 일반열차를 이용하여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에 있는 그 골짜기에는 원래 한 개의 협동농장이 있었는데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백여 가구의 농장 사람들은 하룻밤 새에 모두 타지방으로 강제 이주되고 농장 원들이 살던 주택은 모두 부대의 병실이 되어버렸다. 우리소대는 501호 공사가 끝난 후에도 뒷정리를 하느라고 평양에 남아 있다가 여단이 철수한지 3개월 뒤인 1982년 10월 말에 평양에서 만포 행 열차에 올라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에 있는 미사일 건설 기지로 향했다.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증언한 말들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도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북한은 유리를 도적질 해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열차들이라고 해봐도 창문에 유리창이 온전히 끼워져 있는 열차를 별로 볼 수가 없다. 매 열차마다 상급차 칸이 하나씩 붙어 다니는데 상급차 칸이라 해봐야 일반 칸과 별로 다를 바 없고 자리가 좀 편하다고 할 뿐이지 승객들이 비닐로 창문을 가리고 다니는 형편은 똑같았다. 상급 차간에는 영웅들이나 공로자, 좌급(한국의 영관급) 이상의 고급군관들과 보위부, 안전부계통의 사람들을 비롯해서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만 이용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정해진 이러한 공간도 폭력을 행사하는 무지막지한 군인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신분의 차이나 격 같은 것이 따로 없이 무조건 같이 공유해야 될 대상이다. 평양을 출발하면서 우리가 올랐던 열차는 일반열차였는데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빼곡히 들어차서 한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간이 없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소대장은 열차가 서는 다음 정거장에 소대가 모두 내려서 상급열차에 오르라고 지시하였다. 우리 소대는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멈춰 서자 모두 창문으로 뛰어 내려서 앞쪽에 있는 상급 차간으로 달려갔다. 상급차간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라고 소리치자 안에서 안내원들이 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열어주지를 않았다. 기차가 떠나겠다고 빽 빽 대고 신호를 울리자 다급해진 소대장은 출입문을 포기하고 모두 창문을 오르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일시에 창문 쪽으로 달려가서 창문을 가리고 있던 비닐들과 군데군데 몇 장씩 남아 있는 유리창들을 부수고 열차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타고 있어서 비교적 조용하던 상급 차안에 한 개 소대의 인원들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가자 열차 않은 수라장이 되었다. 소대장은 열차가 출발하자 문을 닫아걸고 열지 않은 사람이 누구냐고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자 소대장은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여성 열차 안내원들을 모조리 끌어오라고 소리쳤다.

대원들이 여성 안내원 세 명의 머리채를 잡아서 소대장 앞에다가 끌어다 놓자 소대장은 그 자리에서 한 여성의 옷깃을 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안내원이 입고 있던 옷은 단추가 우두둑 떨어져 나갔고 속옷까지 함께 찢어지면서 그의 몸은 숱한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홀딱 벗겨져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로 알몸이 훤하게 드러났다. “이 쌍 놈의 기집 애들 죽고 싶어? 야 이 새끼들 뭐해. 저 두 년의 간나 기집 애들 옷도 모조리 벗기고 밟아 버려” 워낙 성질이 지랄같이 고약한데다가 약이 오르고 기분이 상할 때로 상한 소대장이 소대원들한테 불호령을 내렸다. 소대원들은 숱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안내원들의 속옷을 팬티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벗겨놓고 짐승 다루듯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희희덕거리면서 조롱하고 장난감 취급을 하였다. 법은 멀리 있고 주먹이 가까이 있는 북한세상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야 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옷이 홀딱 벗겨진 여성안내원들은 수치심과 수모에 울고불고 콧물 눈물 다 떨 구면서 제발 잘못했노라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소대장의 발 앞에 엎드려서 빌고 또 빌었다. 바로 그때 대좌(대령)의 군사 칭호를 달고 있는 한 군관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겠던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나이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한 50대 중반 이상은 되어보였다. 그는 오자마자 계급이 높은 지휘관답게 자세를 취하더니 소대장에게 어느 부대냐고 증명서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북한에서 공병국 이라고 하면 당시는 무력 부 산하의 부대들처럼 빨간 연장이 아니라 파란 연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아마 우리가 공병국 산하 날라리 부대라는 것은 짐작하고 온 느낌이었다. 소대장은 대좌를 쏘아보다가 상급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해 버린 채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그에게 도리어 시비를 걸었다. “아무 부대면 어때서. 이건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영감태기야. 너도 여기서 옷을 좀 벗구 싶어? 우리가 공병 국 이라고 얕보는 모양인데 대좌를 달고 다니면 누가 엎드려서 구두라도 닦아 줄줄 알았어?”

대좌라면 까마득한 하늘과도 같은 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옆에서 듣기에도 소대장이 하는 말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상하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다른 부대의 상급지휘관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놀려대다가 잘못 걸려들어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순간에 소대장은 아마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소대장을 바라보는 대좌의 인상이 한순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소위 너 공병 국 어디 소속이야. 이놈의 자식 너한테는 상급도 없어? 너 콩밥 좀 제대로 먹어볼래?” . . 대좌는 비록 혼자였지만 계급이 있는지라 그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대좌가 자기 앞에서 공손하게 수그러들 줄 알고 위협을 주었는데 잘 먹혀들지 않자 소대장이 주먹으로 그의 턱을 일시에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날아온 주먹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대좌에게 주위에 있던 소대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참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패륜적이고 군법을 무시하는 일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발생했다. 바로 그 순간에 좌중을 놀라게 하는 또 하나의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 불한당 같은 새끼들 당장 멈추지 못해?”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탄탄하고 다부지게 생긴 30대 초반의 한 사람이 싸움판의 한가운데로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그는 험악한 기세로 대좌를 구타하는 소대원들을 둘러보더니 가벼운 동작으로 주위에 있는 열댓 명의 인원들을 손쉽게 제압해 버렸다. 그 사람이 소대병사들을 때리는 동작이 얼마나 민첩하게 빠르고 정확하였던지 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도 그의 손발이 움직이는 것을 도저히 눈으로는 읽을 수가 없었다. 기세등등해서 대좌를 짓밟던 소대병사들이 순식간에 영문도 알 수 없는 사람한테 얻어맞고 열차바닥에 모두 쓰러지자 소대장의 몸이 일시에 굳어졌다. 혼자서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제압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본 일이었지 현실에서는 소대장으로써도 처음 보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옆에 서있던 나에게 안내원들의 옷을 입혀주라고 말하더니 쓰러져서 매를 맞던 대좌를 자기가 직접 일으켜 세우고 밟혀서 피가 나오는 그의 입술을 자기가 직접 닦아 주었다. 그는 소대장을 대좌의 앞에 불러다가 세워놓고 무섭게 호령하였다. “너한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지휘관을 망신시키는 일은 잘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 하나만은 용서해 준다. 그 대신 대좌 동지하고 처녀 안내원들에게 제발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라”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소대장이 우물쭈물하자 그는 발로 소대장의 종아리 아래 복사뼈 부위를 순식간에 바로 가격해서 대좌 앞에 주저 안쳤다. 소대장은 상대방의 위엄 앞에 파랗게 질려가지고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짐승 다루듯 하던 대좌와 처녀 안내원들에게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 . 나는 사람을 때리는 광경을 보면서 저 사람은 사복차림(민간인 복장)을 하고 다니지만 대남연락소 공작원이 아니면 어느 특수부대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대장이 빌고 난 후에 그는 자기한테 맞아서 쓰러진 소대사람들을 한사람씩 일으켜 세우더니 몇 마디 훈시 겸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싸움을 할 때는 호랑이 보다 더 기세가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정작 나중에 행동이나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자상하고 사내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여과담배(한국의 일반 필터담배를 북한에서는 담배연기를 여과시킨다고 하여 여과담배 혹은 고급담배라고 부름)를 한 갑 꺼내서 매 사람들에게 일일이 한 대씩 나누어 주면서 자기도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오랜만에 부모님들이 계시는 고향에 가는 길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우리의 일행 중에서 금방 입대한 어린 대원(덕영이)이 집이 어딘 가고 묻자 그는 자강도 희천시 인근에 있는 농촌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서로 이런 말 저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피했지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자강도 희천은 우리가 가는 목적지인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보다 조금 가깝기 때문에 그는 어차피 우리보다 먼저 열차에서 내리게 되어있었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는 우리에게 3일 후에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의 진갑 잔치라고 알려주면서 시간이 있으면 다 같이 놀러오라고 고향집주소를 적어서 집이 어디냐고 묻던 어린 대원 덕영이에게 넘겨주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불미스럽게 잘 못 시작되었지만 그와 헤어지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나는 참으로 그가 인정이 있고 사내다운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중대를 자살로 내몬 대대장의 실수

그 사람과 헤어져서 우리는 그 유명한 개고개를 넘어서 한 30분가량을 더 가서 저녁 무렵에야 목적지인 자강도 전천군 고인 역에 도착하였다. . . 기차역에서 25분정도를 걸어서 대대가 위치해 있는 장소에 도착했고 소대장은 소대를 정렬시킨 후 바로 대대 지휘부에 들어가서 대대장에게 소대의 도착보고를 하였다. 보고를 받고 소대의 인원점검을 하러 나왔던 대대장은 소대인원 절반이 맞아서 터지고 찢어진 모습을 보더니 단번에 눈살이 꼿꼿해 졌다. 그렇지 않아도 성격이 괴벽하고 맞고는 절대로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전 여단 적으로 소문이 나있는 대대장이었다. “소대장, 네 얼굴은 반반한데 대원들은 어떻게 돼서 저렇게 절반 이상이 피투성이가 된 거야. 무슨 일이야?” 대대장이 소대장을 쏘아보면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소대장이 머뭇거리자 대대장이 소대장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면서 대대지휘부가 떠나갈듯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 귀때기가 갑자기 막혀버렸어?”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소대의 절반이 넘는 병사들의 얼굴이 맞아서 붓고 찢어지고 했으니 지휘관인 대대장으로써는 얼마든지 화가 날만도 한 일이였다. 소대장은 열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대대장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자기불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대대장은 말없이 한참동안 소대장을 노려보더니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대원들을 휴식시키고 소대장은 지휘부로 오라고 말하고는 들어가 버렸다. 대대장한테 불려 들어가서 한 시간 이상 곤욕을 치르고 나온 소대장은 병실에 와서도 말 한마디 없이 주눅이 든 기색이었다. . . 이튿날 아침 식사이후 정치상학이 끝나고 오전 10시 반 정도가 돼서 우리 중대는 대대장의 지휘아래 백 여 명이 두 대의 우와즈(소련에서 들여온 트럭)에 나뉘어 타고 벌목장소로 향했다. 2-30분정도면 벌목장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인데 중대를 태운 두 대의 트럭은 벌목장을 지나고 개고개를 그냥 넘어서 남쪽 방향인 희천 쪽으로 계속 질주해서 내려갔다. . . 우리를 태운 트럭이 마을 입구에 들어설 무렵 내 옆에 서있던 덕영(고인으로 올 때 열차 안에서 대남공작원으로부터 집주소를 넘겨받은 신입병사)이가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하사 동지 우리가 지금 그 사람한테 가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오던 날 저녁에 소대장동지가 나한테 와서 그 사람이 열차 간에서 나에게 준 집주소를 달라고 해서 줬습니다. 대대장 동지가 가져오라고 시켰나 봅니다.” 덕영이의 말을 듣고 그 제서야 나도 중대가 왜서 벌목장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남하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중대를 태운 두 대의 트럭은 자그마한 농촌마을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80대 1의 대결

트럭이 마을 한복판에 도착하자 대대장은 중대장 이하 전체 중대를 집합시키고 기세가 등등해서 훈령을 내렸다. “1중대 2소대가 3일전에 평양에서 오는 열차 안에서 한 놈한테 당한 수모를 오늘 반드시 갚아야 돼. 그 새끼가 아무리 날고 겨도 걔는 혼자고 우리는 80명이야. 죽이지는 말고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완전히 병신을 만들어 버려. 모두 정신 차리고 알아들었어?” 대대장의 표정은 그날따라 여느 때는 쉽게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무척 일그러지고 엄청나게 살벌해 보였다. . . 대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여기저기서 “죽이자. 죽이자”하는 목소리들이 연발로 터져 나왔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 한 개 중대가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쳐서 도끼와 톱을 들고 흔들어 대면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자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먼발치에서 겁먹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 . 벌써 미리 그 사람의 집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대대장이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거느리고 먼발치에서 앞장서서 중대를 인솔해가고 있었다. . .중대가 우르르 몰려가는 속에서도 소대장은 다른 지휘관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우리들에게 싸움에 끼지 말라고 눈짓을 하였다. 나는 그의 집 앞에 이르는 동안 중대의 맨 뒤에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죄인과도 같은 무거운 마음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북한의 농촌들 어디를 찾아가 봐도 다 그러하듯이 그의 집도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아담한 농촌의 문화주택(북한정권에서 농촌들마다 일률적으로 무상으로 지어주는 집을 문화주택이라고 부름)이었다. 우리가 집 앞에 도착하자 집안과 마당에서는 그가 열차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던 것처럼 정말로 칠갑잔치가 한창이었다. 북한의 농촌마을들에서는 식량난이 터지기 전까지는 어느 집에 잔치가 생기면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동내사람들 모두가 몰려가서 밤새도록 같이 마시고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고향집의 풍경과도 같은 소박한 칠순잔치가 무뢰한들에 의해서 싸움마당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니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떨렸다. 잔치를 한창 즐기던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이 떼거리로 우르르 몰려오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감했던지 모두가 당황해 하는 기색들이었다. 대대장은 중대를 집 앞에 멈춰 세우고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 집주인이 누군지 밖으로 나와. 우리가 미리 알고 왔으니까 숨을 생각하지 말고 3일전에 평양에서 온 새끼 당장 나와”

떠들썩하던 잔치집의 분위기가 대대장의 고함소리 한 번에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얼어붙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몇 사람들이 집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고 아마도 바깥의 상황을 안에다가 알리는 뜻한 눈치였다. 잠시 후에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늙은 할머니 한분이 집안에서 나오더니 공손한 말투로 대대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당신의 아들인가 하는 사람 3일전에 평양에서 왔지? 집안 박살이 나지 않겠으면 그 새끼 당장 나오라고 해” 대대장은 앞에 서있는 부모 벌 같은 할머니에게 인사도 없이 첫마디부터 마구잡이식으로 반말을 쏟아냈다. 대대장의 행동은 그야 말로 천륜을 무시하는 무뢰한의 행동이었고 북한 군인들한테서 늘 보이는 망나니의 행동 그대로였다. . . “내 아들이 집 떠 난지 27년 만에 온 게 있어요. 무슨 일인지 나한테 먼저 알려주면 안 되겠나요?” 할머니는 그래도 공손한 눈길로 대대장을 바라보면서 말을 건넸다. 이때 옆에 있던 중대장이 나서서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다 죽어가는 송장 같은 노친은 필요가 없으니까 방안에 숨어있는 아들새끼 뒤지기 전에 빨리 밖으로 나오게 하란 말이야” 이때 60이 넘어 보이는 남자 한 분이 대대장 앞으로 오더니 머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자기의 누님인데 오늘 진갑잔치를 하는데 지금 한창 상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중대장이 동생이라는 그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 상을 받던 똥을 받던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평양에서 온 그 새끼를 당장 내보내란 말이야. 집안으로 쳐들어가서 다 박살을 내야 정신을 차리겠어?”

중대장한테 목덜미를 잡힌 60이 넘은 동생 분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대신 사과를 할 테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중대장의 주먹이 한순간에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고 정면을 얻어맞은 그 사람은 코피가 터지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참지 못하고 중대장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야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네놈들이 인민군대가 맞긴 맞어? 차라리 날 죽여라 천하에 개만도 못한 놈들아” 칠순의 늙은 할머니는 독이 올라서 중대장의 한쪽 귀를 잡고 매달리 듯 달려들면서 사정없이 비틀었다. 중대장이 자기의 귀를 잡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면서 가슴을 밀치자 할머니도 애처로운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저만치 나가서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에 열차 간에서 보았던 벼락같은 일이 일어났다. 할머니가 쓰러지기가 바쁘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평양에서 내려온 손님”이 허공으로 날라 와서 빠른 발로 중대장의 경동맥을 가격했다. 중대장을 한 번의 발 타격으로 가볍게 쓰러뜨린 “평양손님”은 감히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매서운 눈길로 대대장 앞에 서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평양에서 3일전에 내려온 사람이고 27년 만에 고향을 찾아 온 아들입니다. 나한테 볼일이 있습니까?” 당사자가 나타나서 순식간에 한방으로 중대장을 기절시켜 버리자 대대장도 그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렸던지 조금 전에 소리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순간적으로 자세가 굳어지는 뜻한 눈치였다. 그러나 대대장은 한 개 중대라는 수적 우세가 있다는 것을 믿었는지 이내 자기를 수습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도발적으로 나왔다. “내가 대대장이다. 네가 열차 안에서 우리 사람들을 때린 애냐?” “때린 것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 앞에서 행동을 너무 무리하게 하는 것 같아서 버릇을 가르쳐 줬을 뿐입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잘못한 정도가 아니라 인민군대를 때렸잖아 이 새끼야”

대대장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그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해댔다. “그럼 대대장은 인민군대가 백주 대낮에 열차 안에서 상관을 구타하고 여성안내원들을 발가벗기는 것이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양손님”의 행동이나 말투는 비교적 겸손하고 양보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누가 봐도 한눈에 품위나 예의가 돋보일 정도로 단정해 보였다. 이때 소대장이 신경전을 벌리고 있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대대장한테 열차 안에서 있었던 일은 전적으로 소대장인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을 하자 대대장이 단박에 그이 면상을 후려갈기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병신 같은 새끼 대원들을 만신창이 되도록 맞아터지게 만들어 놓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끼어들어. 저리 비키지 못해?” 화해를 시키려고 끼어들었다가 생각지 않게 한방 얻어맞은 소대장은 두말 다시 붙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 . “대대장 동무, 내용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열차 안에서 잠깐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 화해하고 다 풀었습니다. 대원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저도 이해가 갑니다. 서로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 말고 좋게 해결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화를 푸시고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 하십시다”

“평양손님”은 한 발짝 양보하면서 대대장에게 깍듯이 양해를 구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는데 “평양손님”이 수그러드는 행동을 보이자 대대장은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면서 지휘관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거칠게 나왔다. “야 평양, 너 금방 몸을 놀리는 거 보니까 어디서 몇 동작 좀 배운 것 같던데 한번 움직여 보지. 우리가 얼마든지 받아줄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 이 거지같은 새끼야” “대대장 동무 내가 양해를 구했습니다. 병사들한테 손을 댄 것은 제 실수였습니다. 잘못은 무조건 내가 했으니까 여기서 그만하고 서로 화해를 합시다.” 대대장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투를 던졌지만 “평양손님”은 이번에도 얼굴 모습 하나 달리하지 않고 친절하게 화해를 요청했다. “평양손님”이 매번 겸손한 자세로 나오자 중대병사들 속에서도 웅성거리면서 그를 동정하는 눈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평양손님”이 자기보다 한수 위의 태도로 나오는데다가 중대병사들까지 수군거리면서 한풀 죽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자 대대장의 태도가 돌발적으로 변하였다. 일이 자기의 의도대로 쉽게 되어가지 않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이었다. “이 평양새끼 죽여 버려” 대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끼와 톱을 든 병사들이 순식간에 “평양손님”의 주위를 에워쌌다. 일이 그쯤 벌어지자 “평양손님”도 더는 양보할 생각이 없는지 단호하게 대대장을 향해서 마지막 경고를 하였다. “대대장, 병사들이 다치는데 대해서 나중에 후회를 하지 마시오. 책임은 반드시 당신이 진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바로 그때 집이 함흥 쪽인 나이 먹은 구대원 한명이 나무를 하려고 시퍼렇게 날을 세운 낫을 들고 “평양손님”의 뒤에서 달려들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싸움은 가슴을 졸이던 끝에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먼저 “평양손님”을 향해 달려든 구대원(북한에서는 입대년도가 오래되고 군사복무를 많이 한 사람들을 통상적으로 구대원이라고 부름)은 아무 때 봐도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모험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싸움판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늘 앞장에 서던 사람이었다. 그가 휘두른 시퍼런 낫은 그대로 “평양손님”의 등에 박혔고 등가죽을 한 뽐 정도나 끔찍하게 찢어 놓았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할 것이라고 타산하고 한 순간 방심했던 “평양손님”이 어처구니없게 먼저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사건은 첫 순간에 “평양손님”의 실수로 경미하게 일어난 일이었을 뿐 결국 우리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것과 같은 하지 말았어야 할 무분별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드디어 자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는지 “평양사람”은 자신에게 낮을 휘두른 함흥에서 입대한 구대원을 한순간 노려보더니 순식간에 낫을 들고 있는 그의 오른손 을 잡아채면서 팔 굽을 완전히 뒤로 꺾어버렸다.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을 뿐이고 21명의 병사들이 “평양사람”에게 맞아 죽는 떼죽음이 일어난 것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팔 굽이 완전히 부러진 함흥의 구대원이 기절해서 나가자빠지자 흥분한 중대전체가 한사람을 향해서 일시에 달려들었다. . .

70여명이 도끼와 톱을 살벌하게 휘두르는 속에서도 “평양손님”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면서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를 위주로 상대방을 견제하였다. 중대장이 첫 타격에 쓰러지고 구대원 한명이 팔이 부러져 나가자 겁을 먹은 중대 병사들은 도끼와 톱은 들고 있어도 먼발치에서 위협만 할 뿐 섣불리 덤벼들지는 못했다. 진갑잔치에 놀러왔던 친척들과 동내사람들은 잔치집이 싸움판으로 번지자 아우성을 쳤고 농장 간부들은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지 어디론가 급히 사방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었다. 중대장한테 맞아서 쓰러졌던 “평양사람”의 어머니는 눈물범벅이 되어 이사람 저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잘못하면 칠순의 노인이 싸움판 한가운데서 다칠 것 같아서 소대장과 내가 대대장의 눈길을 피해서 어머니를 집안으로 모셔 들어갔다. 어머님은 소대장과 나의 손을 꼭 잡고 우리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불쌍한 사람이라고 제발 싸움을 말려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소대장과 내가 어머님께 싸움을 꼭 말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이 주저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면서 숙이고 있던 그의 머리를 발로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목젖 부위에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부질없이 달려들어서 발길질 하던 3소대장은 끽 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뼈가 부러져서 단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평양사자”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이성을 잃어버렸고 성난 한 마리의 사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정없이 날뛰었다.

그의 발과 주먹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게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 간 사람들은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성난 “평양의 사자”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게 순식간에 싸움판의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겁을 먹은 군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평양사람”은 소외양간 쪽으로 피해 달아나는 대대장에게 달려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대원들이 쓰러져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잡아다가 꿇어 앉혔다. 얼굴이 까맣게 죽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대대장에게 친척들과 마을사람들 수십 명이 달려들어서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도끼와 낫에 등과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평양사자”의 몸도 벌써 피범벅이 되어 옷이 다 젖어있었다. 우리는 오도가도 못 하고 먼발치에서 마을사람들의 몽둥이에 반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는 대대장을 그냥 지켜볼 수박에 없었다.

30분도 채 안 걸리는 싸움이었지만 그 후과는 너무도 심각하였다. 그래도 “평양사자”가 나서서 흥분한 마을 사람들을 말리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대대장을 일으켜 세웠다. 당장 대대장을 한방에 죽이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을 절제하고 남의 사정을 먼저 배려하였다. 대대장을 바라보는 “평양사자”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우면서도 동정인지 허탈함 때문인지 갈등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는 뜻하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대대장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속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평양사자”는 먼발치에 서있는 우리를(열차 간에서 만났던 사람들)알아보더니 반가운 듯 눈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미안한 모습으로 우리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자 “평양사자”는 피를 닦아 주던 손수건을 말없이 나의 손에 넘겨주면서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대대장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고 옆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도와주려고 하자 “평양사자”는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내가 죽어도 하지 말았어야 할 싸움이었는데 실수한 것 같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잖아”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에 소대장을 비롯한 우리는 모두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커덩 내려않는 기분이었다. 급소 부위들을 얻어맞아서 잠시 동안 기절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찔한 일이었다. 싸움의 빌미를 제일먼저 제공한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소대장은 풍을 만난 사람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용기를 내서 소대장을 대신해서 “평양사자”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다 죽었으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처음부터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말렸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잘못이 큽니다. 죽어도 우리가 죽겠습니다.”. . “평양사자”는 나와 소대장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을 얼마동안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대대장에게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대대장, 이번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야. 내가 누군지 처음부터 자네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 실수였어. 내가 누구라고 신분을 정확히 밝히면 자네들은 반드시 놀라게 되어있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숨기고 있었는데 대대장 당신이 판단을 잘못했어. 숱한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제는 우리 둘 중에 한사람이 책임을 져야 될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리면서도 안타까움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공포감 보다는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더 많이 궁금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기의 신분에 대해서 우리 앞에 밝히지 않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갔다. “평양사자”나 우리가 죽은 사람들의 처리문제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불시에 인근에 있는 교도지도국산하 특수부대 사람들 수 십 명이 싸움현장에 들이닥쳤다. 아마도 처음 싸움이 시작될 때 진갑잔치에 놀러왔던 농장의 간부들이 달려가서 이미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때 예견치 못했던 돌발적인 일이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말았다. 싸움판을 피해서 숨어있던 중대의 하사관인 부분대장 한사람이 특수부대사람들이 오는 것을 우리를 도와주려고 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긴장을 풀고 서있는 “평양사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등허리 척추를 도끼로 내리 찍었다. 말릴 새도 없이 눈 깜빡 할 사이에 일어난 청천병력과도 같은 일이였다. 부분대장은 척추에 박힌 도끼를 뽑더니 다시 한 번 그 자리를 내리 찍었다. 도끼날에 척추가 잘린 “평양사자”는 괴롭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덩어리 같은 피를 토하면서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소대장과 내가 달려들어서 도끼를 빼앗고 “평양사자”를 품에 안았을 때 그는 벌써 마지막 숨을 힘들게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울면서 죽지 말라고 소리치자 “평양사자”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소리와 함께 “억울해”라는 말을 비교적 똑똑하게 남기더니 맥없이 머리를 떨 구어 버렸다. . 그러나 싸움의 후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1명의 사망자를 내고 부대로 돌아온 우리는 밤새도록 한잠도 못자고 지휘부에 불려가서 국에서 급파되어온 검사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사람은 5.18광주의 영웅이었다

싸움이 끝난 바로 다음날, 전날에 있은 “평양사자”와의 80대1의 싸움에서 21명의 목숨을 잃은 대대에는 아침부터 긴장감이 돌았다. 중대와 대대뿐만이 아니라 전 여단에 돌아가는 공기가 초상집 분위기 이상으로 긴장하고 팽팽했다고 할 수 있었다. 국의 검찰에서 검사들이 내려오고 여단지휘부의 간부라고 하는 사람들도 전부가 다 대대로 몰려와서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였다. 그날 오전 11시가 지나서 점심시간이 가까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하늘 멀리에서 직승기(헬기)의 동음이 들려오더니 그 소리는 여단이 전개해 있는 골짜기의 상공 쪽으로 점점가까이 다가왔다. 모두가 불안한 눈길로 하늘을 주시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직승기는 고도를 낮추더니 농장에서 무를 심었던 대대 앞의 공터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여단장, 정치위원을 비롯해서 여단에서 내려온 지휘관들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착륙한 직승기 앞으로 달려 나가서 정렬하였다. 직승기의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까만 양복차림을 한 30대 중반의 여성이 먼저 내리고 그 뒤로 역시 사복을 하고 똑같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7-8명의 남자들이 뒤따라 내리었다.

그들은 부대지휘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여단장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대대지휘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대대지휘부로 들어 간지 채 15분도 되지 않아서 갑자기 전 여단의 폭풍명령을 알리는 신호나팔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어 놓았다. 각 대대, 중대들은 전투장구류들을 착용하고 여단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는, 농장이 나가면서 이미 철수해간 학교운동장에 집결하였다. 싸움 도중에 중상을 입고 여단 군의소에서 치료를 받던 대대장과 다른 사람들까지 한명도 빼놓지 말고 참가시키라는 별도의 여단장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전날의 불상사 때문에 다른 부대하고 임무가 바뀌어서 철수해 갈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집결해 있는 여단대열 앞으로 조금 전에 평양에서 직승기를 타고 내려온 사복차림의 사람들과 함께 국에서 내려온 간부들, 검사들, 여단지휘부 간부들이 나타났다. 또한 국의 검사들과 함께 온 무장한 보위중대소속의 한 개 소대가 여단 대렬 앞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나타났다.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맨 앞에 나서서 정렬해 있는 여단을 한번 휘둘러보더니 뒤에 서있는 평양에서 같이 온 일행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몇 마디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뒤에 여성의 지시를 받은 일행 중 한명이 여단장에게 다가가더니 귀속 말로 무엇인가를 전달했다. 여단장은 그의 말을 듣고 꽃 곧 하게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여단 전체에 명령을 내리였다. “여단 차렷! 3대대는 제자리에 그 밖의 다른 대대는 좌우로 돌 앗. 3대대를 기준으로 좌우로 각각 백보씩 앞으로 갓” 싸움에 참가하였던 우리 대대만 남고 다른 대대는 우리 대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백발자국씩 이동하였다. 그 순간 나는 부대가 다른 데로 이동하기 위해서 비상소집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처벌을 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라고 단번에 짐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성이 여단장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고개 짓을 하더니 대대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어제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오십보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대오가 갈라지자 그는 대대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을 불러서 그들에게 양쪽의 인원들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양쪽을 다 확인하고 정확하다고 보고를 하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은 공병 국에서 내려온 검사를 앞으로 불러서 싸움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게 했다. 한눈에 봐도 틈새가 안보일 정도로 깐깐하고 규칙적인 일처리 솜씨였다. 국에서 내려온 검사로부터 싸움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한 확인절차가 끝나자 선글라스 여성이 검사에게 귓속말로 무엇인가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대좌(한국의 대령)를 달고 있는 국의 검사는 딸과 같은 젊은 여성에게 차렷 자세를 하고 깍듯이 거수경례(군인인사)를 붙이더니 이제부터 호명하는 사람들은 대열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대대장을 포함해서 중대장 이하 중대지휘관들과 사관들을 중심으로 15명이 대열 앞으로 불려나가서 일렬 형대(북한군에서는 가로서는 것을 형 대, 세 로 서는 것을 종대라고 한다)로 나란히 정렬하였다.

도끼로 “평양사자”의 허리척추를 찍은 부분대장을 비롯해서 싸움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을 위주로 불려나갔다. 우리 소대에서는 싸움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사람이 없어서인지 다행이도 소대장 한명만 불려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명도 불려나가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낀 여성은 검사가 넘겨주는 자료를 받아서 한참동안 뒤지면서 반복해서 읽어보더니 우리 소대장을 비롯해서 세 명의 이름을 자기가 직접 지명해서 앞으로 나오게 했다. 소대장과 함께 세 명이 그의 앞으로 나오자 선글라스여성은 그들에게 잘못은 크지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고 경고하고 중대의 대열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불려나갔던 소대장이 다시 되돌아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대장은 분명히 지옥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성이 검사에게 다시 눈짓을 하자 검사가 국에서 자기가 직접 데리고 내려온 무장한 보위소대인원들에게 대대장을 비롯한 나머지 열두 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열두 명은 서있는 자리에서 포승줄에 온몸을 결박당했고 여단지휘부 측면 쪽에 있는 아찔한 높이의 벼랑 쪽을 향해서 나란히 세워졌다. 저 사람들은 살아도 영원히 감방에서 썩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잔뜩 긴장해서 있는데 선글라스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 있는 너희들 여단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 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서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이놈들아. 네놈들이 저지를 죄가 얼마나 크고 그 후과가 막대한지 너희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가 설마 했었는데 그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단박에 권총을 꺼내 들더니 맨 우측에 차례로 서있는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대대장과 중대장이 벌집이 돼서 그 자리에 쓰러지자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나서서 나머지 열 명에게 귀가 멍하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댔다. 68년산 자동보총의 요란한 소리는 골짜기를 메웠고 포승줄에 결박당했던 12명은 일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모조리 처형되고 말았다. 그날의 사형은 이전의 관례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드문 일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사형직전에 사형수들에 대한 죄목을 조목조목 읽고 그들이 죽기 직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공개처형을 한다고 선포를 하고 사형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순서도 없이 그냥 서있는 자리에서 가차 없이 쏴버린 것이다. 공개처형하는 전 장면을 보는

. . 노동교화소에 가서 1년 동안 강도 높은 노동생활을 하면서도 늘 나의 머릿속에서 항상 떠나지 않고 맴도는 한 가지가 꼭 있었다.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권총을 빼들고 대대장과 중대장을 직접 총살하고 평양으로 올라간 선글라스의 매력적인 여성이 들려준 발언, “평양사자는 남조선에 수십 차례씩이나 드나들면서 공을 세웠고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났던 광주인민항쟁 때에도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운 공화국영웅”이라는 것이었다. . . 광주항쟁이 치열할 때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사람들이 남조선에 내려가서 배후교란작전을 했다는 소리는 항쟁당시부터 북한군내에서 너무 많이 퍼진 소문이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보았지만 실지로 갔다 온 사람을 만나 보기는 처음이여서 대대가 해산된 이후에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선글라스여성의 말이 놀라웠고 솔직하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지 하루 만에 북한에서는 특별한 일 외에는 절대로 뜨지도 않고 일상에서도 보기 힘든 직승기까지 동원되었고, 북한의 최고기관인 당중앙위원회까지 개입돼서 일사불란하게 뒤처리를 한 사실을 보면 “평양사자”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것은 누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 .

공화국 2중 영웅이 남긴 자서전

1983년 11월 24일 노동교화소를 나오고 몸이 많이 부은 상태여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우리와 함께 출당 제대된 소대장이 1분대장과 함께 황해남도 해주에서 우리 집을 찾아왔다. 모두가 다 부대에서 불명예스럽게 처벌제대 된 신세들이라 사회에 나와서 만났어도 시름이 깊었고 고민이 많은 얼굴색들이었다. . .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소대장이 문득 나에게 자강도 희천에 한번 가보지 안겠는가고 물었다. . . 자강도 희천에 있는 “평양사자”의 무덤에 가서 죄도 빌 겸 가는 길에 그의 어머니를 만나서 위로를 해주고 오자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 . 나는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소대장과 1분대장이 준비해가지고 온 음식에 몇 가지를 더 보태가지고 그들과 함께 밤 시간 때에 출발하는 꽁차(여행증명서가 없이 탄다는 뜻. 일명 도둑 차)를 타고 자강도 희천으로 향했다. . .해가 넘어갈 무렵에야 “평양사자”의 집 앞에 도착하였다. 저녁준비를 하는지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둘러보자 “평양사자”의 집은 일 년 전 결투가 벌어질 때 남겨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 1년 전보다 머리가 더 하얗게 희신 “평양사자”의 어머니가 얼굴을 내밀고 문밖에 서있는 우리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시였다. “아이구 못난 사람들아 아들 죽여 놓고 무슨 염치로 내 집에 왔어. 아직도 아들이 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왔어”

소대장과 함께 우리는 어머니를 끌어않고 함께 울었다. 소대장이 어머니한테 속죄를 받으려고 왔으니 우리를 죽여 달라고 하자 한참동안 서럽게 목 놓아 울던 “평양사자”의 어머니는 눈물을 그치고 오히려 치마폭으로 우리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다. 우리를 보면 따귀를 후리고 머리털을 잡아서 뽑아버릴 줄 알았는데 정말로 생각지 못했던 어머니의 자애로움이었다. . . 다음날 아침에 해가 떠오르자 어머님과 함께 준비해가지고 간 술과 음식들을 가지고 공화국영웅인 “평양사자”의 무덤을 찾아 갔다. “평양사자”는 양지바른 산기슭의 아늑한 곳에 남쪽을 향해서 누워있었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가 위쪽에 안장되어 있었고 바로 그 아래쪽에 아들인 “평양사자”의 묘가 일반사람들의 묘지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머님의 말에 의하면 “평양사자”의 장례식은 원래 평양으로 옮겨져서 치를 예정이었는데 어머니가 고향땅에 묻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하는 바람에 날자가 늦어져서 결국은 5일장으로 치러지게 됐고 중앙당에서 간부들이 직접 내려와서 엄숙하게 치렀다고 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묘지의 높이는 1.5미터가 넘어보였고 묘지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다는 외우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나의 머리에 남아있는 “평양사자” 묘비에 새겨져있는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

. . . “평양사자”와의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내려오면서 무엇인가 어머니를 도와주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소대장에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소대장도 참 좋은 생각이라며 수긍을 하였다. 소대장이 우리의 생각을 어머님께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놀다가 가는 것은 좋지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리셨다. 우리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집에 함께 머무르면서 구석구석 남자들의 손길이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정성껏 도와주었다. 공화국 2중 영웅의 집안이라 당과 국가에서 물론 알아서 책임지고 도와주고 있었지만 외롭게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자니 아무래도 마음이 걸리고 발길이 도저히 떨어지질 않았다. 묵은 지 3일째 되던 날 우리 세 명이 어머니가 겨울에 땔 장작을 하루 종일 패서 크게 무지를 가려놓고 저녁밥을 먹는데 어머니께서 장롱 문을 여시더니 두툼한 책 한권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작년 내 진갑 때 우리 아들이 평양에서 오면서 가지고 온 공책인데 날보고 어느 누구한테도 절대로 보여주지 말고 잘 건사해두라고 당부한 거네. 아들이 죽은 다음에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들여다보긴 하는데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머라고 적혀 있는지 내가 도무지 알 수가 없지. 머라고 적혀 있는지 눈이 잘 보이는 사람이 어디 한번 읽어 바”

겉 폐지는 많이 낡고 부풀어 있었지만 꽤나 두툼해 보이는 책이었다. 호기심이 당겨서 어머니께서 주시는 책을 내가 받아들고 겉 뚜껑을 펼치자 자필로 쓴 깨알 같은 작은 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첫눈에 보아도 책의 내용이 자서전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단번에 안겨왔다. 첫 머리의 내용은 필자가 어릴 때 집을 떠나 어느 무인도와 같은 섬에 가서 생활하면서 훈련을 받던 상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책에 적혀있는 내용이 범상치 않아 어머니에게 먼저 읽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하고는 절반도 안 먹은 밥숟가락을 놓고 “평양사자”가 남기고 간 자서전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밤 한잠도 안자고 새벽 첫 닭이 울 때까지 자서전을 다 읽었다. 자서전이라기보다 “평양사자”의 집안 환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집을 떠나게 된 사연, 15년 동안 특수훈련을 받던 일들과 남조선에 나가서 공작하던 내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평양사자”가 자기가 직접 활동한 내용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 실로 놀라웠고 감탄이 가는 일이었다. “평양사자”는 자기가 철없는 어린 나이에 특수훈련소에 불려간 것은 아버지의 과거 경력과 출신성분이 나빠서였다고 적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고향은 전쟁 전에 남조선이었고 국군출신이었으며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북한인민군으로 강제 편입된 사람이었다. 대남첩보기관에서 어린 나이에 그를 데려가서 대남공작원으로 훈련시킨 목적은 남조선에 있는 아버지의 친척들을 비롯해서 사회적으로 배경이 있는 인사들을 포섭할 목적이 기본이었고 그들을 이용하여 남조선에 북한의 지하조직망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평양사자”와 함께 특수훈련소에 불려온 애들은 거의가 다 부모들이 남조선에 친인척이 있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무인도에서의 15년 동안 특수훈련과정은 북한에도 저렇게 야생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데가 있긴 있는가하고 의혹이 들 정도였다. 18세기 영국소설에서 나오는 로빈손크루소가 어느 무인도에 갇혀서 28년 동안 야생인으로 살다가 극적으로 구조돼서 인간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평양사자”가 말하고 있는 북한무인도의 내용에 비하면 무색할 정도였다.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 특히 1980년 5월 달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런 식의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의 재야인사들은 이미 북조선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할 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그들의 주위에 결집되어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많은 친북한적인 세력들도 남조선에서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충분히 장성되어 있었다. 5.18광주인민봉기가 차질 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 이였다”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평양사자”의 자서전과 같은 일기를 하나하나 생각해내서 사실대로 적는다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부분들을 내 마음대로 비슷하게 만들어서 여기에 올리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고 정확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내가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다. 또한 절대로 사실관계에서 벗어나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평양사자”의 자서전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그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많이 아쉬울 뿐이다. . . . 현재 남한에서 민주화항쟁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5.18광주사건을 국가적인 전복을 시도했던 폭도들의 반란으로 성격을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굳어진 성역에 대한 도전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가항력적인 일도 결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광주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고 말하는 북한사람들의 증언을 광주사람들은 물론 친북좌파세력들을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조건 아니고 거짓이라고 부인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

진보라고 자처하며 “인권”과 “민주화”를 지금까지 우려먹고 사는 친북좌파세력들 역시도 광주사건을 사실대로 파헤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발언권이나 권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고 오직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5.18이 어느 방향에서 결론이 나던 순리대로 해결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방해를 하지 말아야 할 의무만이 전부이라는 것이다. 5.18광주의 무장폭동이 몰지각하고 여물지 못한 정치꾼이었던 김영삼 정권시기 3김의 굿판에서 정치도박의 편법적인 행위로 민주화항쟁으로 정정되고 인정된 것은 대한민국의 현대판 “아사”를 자초하는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것을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전체가 인정해야 할 일이다. 친북좌파세력들이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만들어 가지고 자기들의 생계거리 장난을 하면서 내가 일구어놓은 터 밭이기 때문에 내승인 없이 마음대로 그 영역을 침범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설쳐대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가개념에 대한 사고의식이 너무 방만하고 취약하다는 것을 힘들지 않게 엿볼 수 있다. . . 민주화세력으로 위장하여 광주를 근거지로 삼고 “해방군” 행세를 하는 친북좌파세력들에게 ‘너희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고 너희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 . 5.18광주사건의 살인자로 매도되고 있는 대한민국 국군은 하루빨리 그 치욕스러운 불명예와 수치스러운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80:1의 패싸움과정)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 (주: 5.18공화국영웅)이 주저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면서 숙이고 있던 그의 머리를 발로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목젖 부위에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부질없이 달려들어서 발길질 하던 3소대장은 끽 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뼈가 부러져서 단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평양사자”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이성을 잃어버렸고 성난 한 마리의 사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정없이 날뛰었다. 그의 발과 주먹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게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 간 사람들은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주: 이들은 다 죽었음)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성난 “평양의 사자”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게 순식간에 싸움판의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겁을 먹은 군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평양사람”은 소외양간 쪽으로 피해 달아나는 대대장에게 달려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대원들이 쓰러져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잡아다가 꿇어 앉혔다. (이후 잠시 방심한 공화국영웅은 뒤로부터 도끼 공격을 당해 죽었음) (pp. 114-115).

선글라스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 있는 너희들 여단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 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서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이놈들아. 네놈들이 저지를 죄가 얼마나 크고 그 후과가 막대한지 너희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가 설마 했었는데 그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단박에 권총을 꺼내 들더니 맨 우측에 차례로 서있는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대대장과 중대장이 벌집이 돼서 그 자리에 쓰러지자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나서서 나머지 열 명에게 귀가 멍하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댔다 (pp. 122-123).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가 위쪽에 안장되어 있었고 바로 그 아래쪽에 아들인 “평양사자”의 묘가 일반사람들의 묘지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머님의 말에 의하면 “평양사자”의 장례식은 원래 평양으로 옮겨져서 치를 예정이었는데 어머니가 고향땅에 묻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하는 바람에 날자가 늦어져서 결국은 5일장으로 치러지게 됐고 중앙당에서 간부들이 직접 내려와서 엄숙하게 치렀다고 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묘지의 높이는 1.5미터가 넘어보였고 묘지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 (pp. 128-129)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 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 특히 1980년 5월 달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런 식의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 (pp. 131-132).
 

증언 3: 한국군은 광주의 살인자가 아니다 (전 북한군 항공사령부 소속 여성고사포중대 중대장 증언)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 (pp. 154-155).

이 시기에 북한은 인민군대와 민간교도대, 노동적위대와 심지어 중·고등학생들의 비 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를 비롯해서 전 국민에게 준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전쟁준비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p. 155).

남한에 와서 확인해본데 의하면 이런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인민군 주력전투부대의 해당부서와 단위들은 광주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부터 상급지휘부대로부터 광주라는 정확한 지역까지는 통보를 받지 못했지만 남조선에서 조만간 대규모의 사건이 터진다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 받고 전투준비상태에 만반을 기하고 있었다.  우리부대에서도 미그19~21전투기들에 대한 특별정비는 물론 훈련반경을 일상적인 훈련지역보다 남쪽방향으로 더 내려간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확대했고 4대로 편성된 전투기 편대가 주야로 항상 관할지역에 대한 비행전투근무를 감당하게 조치했다. 격납고 안에서 대기상태에 있는 전투기들도 명령이 떨어지면 신속히 출격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상태로 전투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부대지휘관들과 전투기 조종사들, 정비사들과 민간노무자들까지도 집에서의 출퇴근이 금지되고 신발 끈을 묶은 상태로 병영 안에서 생활하며 지휘부로부터 출격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라고 있었다.

  상급지휘부에서 내려온 기밀문서에 대한 내용은 해당 중요부서의 고급지휘관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대대지휘부 군관들과 중대, 소대급 지휘관들은 물론 심지어 전투기를 직접 조종하는 비행사들도 긴장하게 돌아가는 부대상황과 분위기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기고 있다는 정도로만 눈치 채고 있었지 남조선에서 금방 터질 대형사건과 관련되는 전군적인 진투준비상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p. 156).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탄광과 광산 및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반정부투쟁은 우리의 공화국인민들과 그들의 통일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최고의 시기에 도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위대한 통일국면은 우리의 눈앞에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 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투명령을 하달한다.

1. 인민군무력부 산하 각 군단, 사여단 전투부대들은 만단의 전투동원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준전시 상태에 돌입할 것.

2. 교도지도국 산한 각 저격 및 경보병 여단들은 남조선의 후방을 신속히 장악하고 배후를 교란하여 제 2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작전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

3. 공군부대 산한 전투비행단들은 적진에 구축되어 있는 중요군사시설물에 대한 선제타격과 함께 공중작전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의 작전이 원만히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의 전투준비태세에 임할 것.

4. 해군부대 산하 전투함대들은 선제타격으로 해상공격권을 장악하여 신속한 기동력으로 해상육전부대들의 남한침투를 보장하며 육·해·공군 전반 무력이 입체작전으로 단시일에 남조선을 공략할 수 있도록 비상전투태세에 돌입할 것.

5. 노동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원들을 비롯한 영웅적인 전체 조선인민들은 조국통일의 대사변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예비전쟁연습에 성실히 참가하며 공화국을 내부적으로 파괴하려는 간첩 및 암해분자들의 준동에 경각성을 높이고 자기의 일터를 철옹성같이 지킬 것. (p. 157-158).

첫째, 남북이 협력하고 상호존증의 원칙에서 펑화적으로 통일하는 방법

둘째, 남조선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북한의 지원을 요청하면 북한이 개입해서 통일하는 방법

셋째, 북한이 무력으로 남한을 선제공격해서 통일하는 방법 (p. 159).

광주현장에서 죽은 것이 확인된 사람들은 일단 부대로 복귀하지 못했어도 영웅칭호를 내신하라는 당중앙위원회의 비서 국 지시가 새롭게 떨어져서 상등병의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게 되었고 맏딸인 그가 대리인으로 수훈하게 되었던 것이다 (p. 162).
 

증언 4: 술병 들고 교회를 습격한 '민주인사들'

내가 인민학교를 다닐 때 어릴 적 친구 한명 있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도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참가 했었는데 북한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자기 어머니하구 평양에 올라가서 김정일이 한 테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고 내려왔어요. . . 북한의 평양시 만경대에 있는 만경대혁명학원이란 곳은 민족간부양성기지로서 일반사람의 자녀들이 함부로 갈 수 없는 특수한 곳이었고 혁명열사의 자녀들이나 조국을 위하여 훌륭한 일들을 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국가적인 조치에 의해서 뽑혀가는 학원입니다. 나도 북한에 있을 때 5.18광주사건에 참가하기 위해서 남조선에 파견되었다가 죽은 사람들의 자녀들이 당의 조치에 의해서 평양에 있는 만경대학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실 5.18광주봉기에 북한특수부대군인들이 참가했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이 끝나고 얼마 후부터 북한에서 여러 가지 통로를 거쳐서 광범위하게 퍼진 사실입니다 (pp. 175-176).

저는 올해 1월 달에 1980년 5월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남한에 내려와서 소문 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50대의 남성분을 만나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신변상의 문제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많이 꺼리고 있지만 5.18광주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기회가 조성되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증언을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p. 183).
 

증언 5: 5·18에 숨겨진 진실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 . 그때 광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지만 그와 생활했던 중대의 구 대원들은 모두가 다 광수를 정확히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성근이를 비롯한 중대 사람들은 그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광주폭동이 가열되고 있는 장소에서 광수가 장갑차에 올라서 괴뢰군들의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인민항쟁에 어떻게 되어서 북한에 있을 사람들이 나가서 참가하고 있는지 참으로 희한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부대에서 한가마 밥을 먹던 사람이 광주에 나가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을 본 성근이네 중대 사람들은 그때부터 광주사건이 남쪽에서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만든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특수부대사람들이 나가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pp. 191-192).

저녁식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농장 작업반 실에 있는 텔레비전에 벌떼처럼 마주앉아 아침저녁으로 매일 같이 내보내는 광주사건을 관람하였다. 5.18봉기가 일어난 다음날부터 북한의 텔레비전에서는 다른 것은 방송하지 않고 매일 광주봉기에 대해서만 중대 방송을 하였다. 처음에는 5.18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남조선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과 소위 혁명적인 인민들이 남조선의 민주화와 조국을 통일을 위하여 전 인민적으로 항쟁을 궐기했다고 선전했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에 투입된 남한의 공수부대들이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머리를 해머로 까서 죽이는 장면을 비롯해서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들만 골라서 연속적으로 방영하군 하였다. 어디가 출처가 되어 말이 나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사람들 속에서는 우리의 특수부대가 광주현장에 나가서 활동하고 있으며 조국통일은 곧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p. 193).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써 광주사태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으로 돌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직접 발언한데 의하면 광주무장폭동은 그자체가 어떤 면에서도 전쟁 이상의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광주사태가 남한이 전복될 수 있는 위기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중요했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군부가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공수부대들을 진압군으로 대거 투입하는 바람에 무장폭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문제가 생각 외로 불가능해 졌다. 남조선으로 드나들 수 있는 루트는 해상뿐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데서는 큰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pp. 195-196).

공화국 영웅은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인 61저격 여단과 62저격 여단에서 상당수의 소부대들이 남조선에 파견되어 있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인솔한 사람은 대대장 이봉원이라고 까지 구체적으로 증언하였다. 북한의 강건 군관학교(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보병군관학교) 출신의 한 탈북자는 광주사건 당시 투입된 병력은 모두가 다 태천 군관학교(저격, 경보병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특수군관학교) 출신들이었다고 말한다. 광주사건에 남파되었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비석은 강원도 김화(북한군 5군단 지역) 인근에 안치되어 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책임지고 남파되었던 대대장 이봉원은 광주사건 이후 북한으로 귀대하여 김일성으로 부터 공화국 영웅칭호와 함께 일당백이라는 별도의 칭호를 받았으며 태천 군관학교 소장으로 승진했다고 하였다. . . ,남조선에 와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만일 광주의 무장폭동이 성공하여 북한의 사주를 받는 김대중을 비롯한 친북좌파들의 손에 정권이 넘어갔으면 지금쯤 한반도는 어떤 식으로든 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그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통일과는 거리가 먼 북한체제가 지향하고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적화통일이었을 것이다 (pp. 196-197).
 

자신의 실명을 밝히는 전 북한군 하사관 빅행운은 534부대와 신천복수여단 등이 광주에 침투하였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사건에 참가하였던 534부대와 신천복수여단 등 부대들은 그때 당시에 북한군 특수부대들 중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고 능력이 신비할 정도로 인정받는 최정예 게릴라 부대이기도 하였다." (210쪽). 

증언 6:  전 북한 공장 지배인

간부지침용 참고 자료집.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데 대해서 지시하였다. (....)  바로 이틀 뒤인 5월 19일 아침 노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에는 드디어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이 학수고대하던 전 인민적인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였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의 무장폭동 첫 시작부터 얼굴을 가린 광주의 계엄군들이 부녀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반복해가면서 집중적으로 내보내었고 광주무장폭동이 남조선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을 수 있는 기회라고 폭동 전 기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변을 토했었습니다 (p. 207).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은 임신을 하여 만삭인 여인의 배를 총창으로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모습과 벌거벗은 젊은 처녀의 팔을 도끼로 자르고 어떤 새파란 아가씨의 옷을 홀딱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한 목소리로, “국제적인 식인종인 미국 놈들의 식민지로 있는 남조선 괴뢰도당들은 정말 인간의 가죽을 쓴 짐승들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지독한 살인백정이라고 해도 어떻게 백주 대낮에 여자들만 골라서 발가벗기고 도끼로 내리쳐서 죽이며, 살겠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처녀의 젖가슴까지 도려낼 수 있단 말인가” 라고 규탄하면서 남조선괴뢰군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p. 208)

김일성과 김정일, 그 앞잡이들이 민족 앞에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음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광주사건은 김일성이가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평화적인 시위를 이용해서 친북좌파세력들과 짜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을 내려 보내서 만들어낸 사건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무장폭동을 전후로 북한의 민간사회에서는 별의별 이상하고 흉한 소문들이 다 나돌았습니다. 남조선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전사들이 다 죽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등 누구네 집 아들은 광주에 갔다가 죽었는데 당원증만 집으로 보내어 왔고 또 뉘 집 친척의 아들은 남조선에서 죽은 시체는 못 가져 오고 손목 하나만 잘려서 들어왔다는 식으로 참으로 광주사건과 관련된 하도 많은 이야기들이 항간에 많이 떠돌았습니다.

  당중앙위원회에서 간부들에게 보내는 지침서에서도 광주무장폭동에 참가한 동지들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크게 헌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것은 당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이고 영웅 전사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을 강력히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1만 톤 프레스와 같은 이름 있는 대형기계에 까지도 5.18광주무장폭동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5.18청년호 라는 명칭을 달아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을 만들어 냈다 (p. 209).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p. 209).  김정일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생일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다 (p. 210).


 

증언 7: 전 북한군 서해안 방어부대 군관

조직부지도원은 광주사건 당시 북한 해주시에 있는 대남연락소에서 근무하였으며 광주인민항쟁에는 소수의 대남연락소 관계자들만이 나가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 목적이 광주라는 일방적인 지역을 노렸던 제한적인 작전이 아니라 남조선 정권 전복이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만큼 특수부대에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대거 투입되어 사건을 주도했다고 이야기 하였다.
  북한 제3군단 승용차 관리소 정치부소장(남포시 연락소 초급당비서의 조카)은 동료와의 발언에서 광주사건에 개성시 연락소도 개입하였는데,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광주가 봉쇄되고 아군과 시민들의 대량적인 희생만 만들었을 뿐 최종적으로 실패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토로하였다.

.. 하였던 북한 대남부서(북한중앙당 통일전선부)는...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서 적후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북한의 전면개입을 은폐하여 광주 사건을 남한 자체 내의 갈등과 모순에 의한 내란으로 철저하게 위장하기 위해서 광주사건 참가자 중에서 극비의 인원들을 선발하여 교묘하게 교란작전을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p. 216).

북한은 북한에 구축해 놓은 강력한 특수전부대들을 비밀리에 침투시켜서 남조선의 배후를 교란하는 한편 남한 인민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새로운 선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북한은 그와 같은 대남전략 단계에서 만들어진 광주사태의 비극을 현장에서 별도로 촬영하여 실지 남조선 계엄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건이라고 속여서 북한의 텔레비전에서 매일과 같이 보도하였다.
  북한정권은 북한인민군과 인민들을 기만(남조선에 와서 북한에서 말하던 것과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하기 위해서 전두환이 공수특전단에 환각제를 먹이고 광주봉기진압에 내몰았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국군이 선량한 봉기자들, 그것도 여자들만 골라서 배를 가르고 젖가슴을 도려내고 다리 난간에 처녀들을 나체로 매달아서 죽이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내보내면서 북한인민들에게 남조선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켰다. 지금도 나는 어린 나이에 보았던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텔레비전에서는 중무장을 한 진압군들에게 병에 담긴 알지 못한 물약을 나눠주고 그것을 마신 진압군들이 미친 듯이 봉기 자들에게 달려드는 모습과 약물에 마취된 군인들의 얼굴을 확대하여 짐승처럼 보이게 하는 등,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p. 218).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광주 시내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뒤에서 조종을 하면서 광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작전을 수행하였고 광주가 해방된 다음부터 복면을 하고 주동적으로 개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국군의 장갑차며 중무기들을 노획하여 봉기군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무기와 각종장비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시가전에 맞게 주요전투들을 조직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광주의 일반적인 시위를 무장봉기로 확대하는데서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당사자 본인의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능력적으로 대학생들과 함께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를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의 효과라는 것이었다 (p. 220).

대학교에서 볼펜을 들고 공부를 하거나 가사업에 종사하던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하던 사람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하고 아무나 쉽게 다룰 수 없는 장갑차까지 몰아가면서 정규군과 맞서 싸워서 광주시를 해방시켰다는 것은 삼척동자가보아도 베후에 강력한 배후 세력이나 주직이 개입하였다는 의혹을 충분히 가지게 하는 대목이다 (221).

평양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광주 항쟁이 수일 안에 전국적인 무장 봉기로 확산될 것을 대비하여 서울에서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으라는 지시였다. 그때 우리는 남조선정권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통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멀지 않았다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p. 223).

북한시절에 제3자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 구역 남청진에 살고 있던 한 대남첩보요원 출신도 동료들에게 자신의 머리 뒷부분에 나있는 커다란 흉터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광주사태가 자기에게 선물한 표창이고 북한으로 돌아와서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받은 공화국영웅칭호의 징표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p. 224).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p. 227).

북한에서는 광주인민봉기를 가지고 남조선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괴뢰정권을 뒤집어 엎고 통일을 하려고 봉기를 일으켰으며 북한은 이런 사람들의 혁명적인 항쟁을 도우려고 특수부대 군인들을 파견하여 배후를 지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40).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p. 242).
 

증언 8: 광주의 살인자는 북한군이예요 (전 함경북도 청진시 가정주부)

외삼촌 아줌마는 1981년 일보에서 귀국할 때까지 남조선에 일본인 신분으로 세 번 정도를 직접 다녀왔으며 조총련과 연계하여 남조선의 지하조직들에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외삼촌 아줌마가 남조선에 드나들면서 김대중이를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는 제가 한번도 들은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총련의 이름으로 위장되어 남조선 쪽으로 흘러들어간 자금의 대부분이 지하조직들의 운영자금과 함께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각종 반정부운동의 배후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었고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비밀사업들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북한정권이 김대중을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49-250).

  518광주폭동 이전에 남조선의 지하조직들에 들어간 자금은 거의가 다 조총련에서 만들어져서 들어갔고 북한현지에서 직접적으로 남조선에 투입된 자금은 알지 못한다고 외삼촌 아줌마는 말했습니다. 외삼촌 아줌마는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폭동에 직접 가담한 일은 없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몇 달 전에도 남조선의 서울로 건너가서 폭동방법과 여러 가지 절차에 관한 북한쪽의 지령을 현지조직들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고 했습니다 (p. 251).

비전향 장기수들과 간첩들을 민주투사로 만들고 철없는 어린 학생들에게 빨치산을 교육시키는 것이 나라를 위한 민주화라면 친북좌파세력들은 지금의 북한체제도 민주주의 체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증언 9: 5·18은 북한의 투쟁구호 (전 문천제력소 노동자)

그러나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이 끝나고 난 이후부터는 이전의 ‘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이 아니라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이라는 새로운 내용의 단어가 등장했고 운동의 성격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북한정권이 5.18광주사건을 얼마나 대중적인 운동으로 기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부문에서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룡성기계연합소에서 만든 1만 톤 프레스를 ‘5.18청년호’로 부르는 것은 물론 땅크(남한의 탱크)에다가도 ‘5.18전진호’, 어느 일 잘하는 생산직장에다가는 ‘영예의 5.18청년직장’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게 하고 있다.
  5.18광주사건이 북한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면 그들도 생각과 머리가 있는 이상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짓을 미련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있어서 청와대습격사건도 그랬지만 5.18광주사건에 대한 내용에 있어서도 조금도 비밀에 붙이는 것이 없다. 1980년대 초반에 북한에서 나왔던 당시의 간부용 강연 자료를 보면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과 관련해서 김일성이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직접 발언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은 단순히 우리나라의 경제혁명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일어났던 영웅적인 인민항쟁의 정신을 끊임없이 이어가자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광주인민봉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우리 혁명 전사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자는 것이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속에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p. 258-259).

당위원회의 지도원은
남조선에서 광주인민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도 이미 전에 자기네 정찰부대에서는 한 개 전투조가 미리 선발되어 나가서 대기하고 있었고 항쟁이 일자마자 전투에 참가해서 남조선 인민들을 지원해 주었다고 말해주었다 (pp. 268-269).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사전에 정찰해 두었던 전라도 지역의 무기고 배치도에 근거해서 그들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시민군이라고 위장한 자들이 조직적으로 먼저 병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사람도 그들(시민군)이 먼저 죽인 것이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국가반란인 광주의 무장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되는 것을 왜 눈뜨고 보고만 있었는지 답답한 일이다 (272).

 

증언 10: 보위부 반탐부장의 고백 (전 러시아 벌목공)

5월 21일 북한군 전 부대가 완전무장 상태로 비상대기에 들어간다는 명령이 군단참모부로부터 불시에 내려온 사유
남조선의 전라도 전 지역(남한에 와서 확안한데 의하면 당시 광주시내만 시민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고 했다)이 시민군들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조만간에 남조선의 전반지역으로 무장폭동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남조선 봉기군 측에서 북한에 무력지원을 요청하여 오면 인민군 각 부대들은 일시에 군사분계선을 뚫고 밀고 내려가서 최전선지역을 무력화 시키는 동시에 봉기군과 합세해서 남조선의 전 지역을 해방한다는 계획이었다.

정치부에서는 무기전투기술기재를 정비하면서 텔레비전에서 하루 종일 내보내는 남조선 광주의 소식을 시청하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중대별로 병실에 모여 앉아 중앙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광주 시내의 전투장면들을 보면서 겉으로는 말을 못했지만 속으로 많아 놀랐었다 (p. 281).

1) 머리가 긴 사람들 여러 명이 괴뢰군 복장에 소총을 들고 군인 한 명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무참하게 두들겨 패서 실신하게 만드는(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음) 장면이 나올 때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머리가 긴 부분은 정규부대 군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군인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군인을 때려죽인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장검으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장면과 처녀의 옷을 발가벗긴 다음 자궁 안으로 장검을 깊숙이 박아 넣는 장면은 아무리 남자고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고 몸서리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죽일 일이 있어서 반드시 죽여야 된다면 깨끗하게 총으로 쏴야 죽는 사람도 죽이는 사람도 서로 편하면 되겠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그것도 남자도 아닌 여자들만 골라서 무참하게 죽이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pp. 281-282).

2)  ‘대내지휘관에 한함’이라는 등급 표제를 달아서 총정치국에서 지휘관용으로 내려 보내는 강연 자료에는 광주사건과 관련된 김일성, 김정일의 발언들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광주사건은 남조선을 통일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하고 좋은 기회였는데 남조선 인민들한테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무리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 특수부대공작조들의 배후교란 작전이 기술적으로 부족하고 크게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광주사건이 남조선의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이 기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p. 283)

3) 창고장은 북한에서 1970년대 말에 극비밀리에 조직한 특수부대인 당원사단의 출신이었다. 그들 조는 1980년 3월 말경에 남조선으로 침투할 데에 대한 임무를 받고 한 달 정도의 가상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다음 1980년 4월 말경에 출발하여 남포항에서 구소련에서 들여온 디젤잠수함에 승선하였고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안(어느 지역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음)에 상륙하여 서울시내로 침투하였다. 그와 함께 남조선으로 파견되어 내려간 인원은 총 12명이었다. 그들이 남조선침투 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자폭훈련이었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작전지역은 서울이었고 김대중의 지휘로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시위에 합류하여 배후 교란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말하자면 남조선의 수도인 서울중심에서 국가교란사태를 조종하여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번질 수 있는 뇌관으로 되게 하는 것이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받은 임무의 기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p. 298).

4)...5월 중순 북한 지휘부에서 전라도 광주로 급히 이동해서 작전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었다. 본인들은 남조선의 서울에 있으면서도 전라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감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북한에서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임무를 바꾸라고 지시를 내려 보냈던 것이다. 창고장 일행이 서울을 떠나서 광주시내로 이동했을 때는 폭동이 시작 된지 이미 이틀정도가 지난 뒤였다고 하였다. 시내는 대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의 폭동으로 마구잡이 판으로 변해 있었고 각처에서는 전두환을 타도하라는 크고 작은 프랑 카드들을 들고 데모꾼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첫눈에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 광주에서는 정권에 분노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사생결단으로 진압군에 저항하면서 국가기관을 습격하고 광주의 ‘해방군’으로 등장해 있었다고 하였다. 창고장의 일행은 광주인근지역에 있는 군수품공장을 습격해서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을 탈취할 때 북한에서 파견되어 나간 알 만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적지 않게 보았으나 적후활동에서 지켜야 할 엄격한 준수사항이 있는 관계로 서로 침묵 속에 무언의 대화만 나누었다고 한다.

탈취한 장갑차는 시민군들이 기술부족으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안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 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동성을 보장하게 하는 한편 항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p. 300).

5)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중무기를 앞세운 진압군이 공격해오자 시민군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항쟁대오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정세가 불리하게 역전되자 북한에서 파견된 소부대들에게는 전투에 가담하지 말고 시내를 탈출해서 안전한 거점에서 대기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까지는 창고장의 일행 중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빠져 나오는 과정에 진압군의 불의의 기습을 받으면서 불필요한 교전이 벌어졌고 고향이 신의주 출신인 조원 한 명이 복부에 총알을 맞고 중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였다. 부상당한 그 대원은 집에서 무남독자 외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국군복장으로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노출될 수 없었는데 상대편에서 어떻게 눈치 채고 먼저 공격을 했는지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창고장은 회상하였다. 그는 아마도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상대가 몰랐다고 해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p. 301)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이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한다. 무남독자 외아들은 북한의 잔인한 "당과 수령"을 위해서 뼈 조각 하나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26살 젊은 나이에 남조선 땅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창고장의 일행이 광주에서 빠져나오는 날 공수부대를 비롯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자들을 앞세우고 무력으로 다시 광주 시내를 무차별적으로 점령하였고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해서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확산될 뻔했던 광주사건은 아쉽게 실패했다고 한다 (p. 302).

탈취한 장갑차는 시민군들이 기술부족으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동성을 보장하게 하는 한편 항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319쪽 7줄-320쪽 2줄)

그는 아마도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상대가 몰랐다고 해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하였다 (321쪽).
 

  창고장 일행은 백령도로 건너가서 며칠 동안 잠복해 있다가 북한 대남연락소 소속의 잠수정에 의해서 남조선을 빠져나갔다고 하였다 (320~322).



증언 11: 5·18 굉주와 북한 (전 조선작가동맹 작가)

삼복은 아직 멀었지만 날씨는 한여름처럼 더웠다. 하지만 날씨보다 더 뜨거운 것은 주민들의 마음이었다. 시내의 곳곳에 각양각색 선전포스터들이 나붙고 "전두환을 찢어 죽이라"는 시커먼 글자들이 주민들의 가슴을 불을 달았다. 유선방송과 TV수상기 앞에는 항시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수시로 아나운서가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고 하며 광주의 실상을 동영상으로 내보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글부글 끓케 하였다 (pp. 308-309).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겠지. 근데 말이오. 혹시 남조선 놈들이 우리 군대가 나가면 침략자라고 할게 아니요."

"아하, 거 좀 한심한 소리 그만하오. 남조선이 뭐 외국이요?  우리가 우리 땅을 해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수령님의 교시를 좀 연구하고 다니라구요. 남조선 인민들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으니 그 때면 남으로 진격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한두 번 교시하신 것이 아니요."

그때부터 나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인줄로 알았다 (p. 313).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에 와 있는 이 순간까지 북한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광주폭동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남조선의 혁명역량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p. 316).

남한에서 만들어진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대한민국을 조롱하고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는 신성한 국군을 정면에서 원수 취급하는 영화라면 북한의 영화 '님을 향한 교향시'는 친북세력들을 통해서 대한민국에서의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부추긴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북한은 '님을 향한 교향시'에서 한국의 제도뿐만이 아니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노리는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보라고 선동한다.
...남조선의 국민들이 남한정부에 대한 반정부투쟁과 함께 반미운동을 대대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광주봉기가 실패한 원인도 올바른 혁명적 정당의 통일적이고 유일적인 지도를 받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남조선혁명의 단계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남조선 내부에서 인민대중의 동력을 얻어 반파쇼 민주화투쟁을 강력히 전개하고 이것을 반미자주화운동과 결합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 둘째는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과의 연합전선으로 미국에 의한 남한의 통치를 끝장내고 '북한식 인민주의의 통일'을 성공시켜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것을 남조선 내부에서 단계적, 자체적 절차에 의해서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로 명시하고 있다. 물론 예술작품이라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통해 그럴듯하게 선전하고 있지만 실은 그 모두가 김일성의 '교시', 김정일의 '방침'들에 쓰여있는 그대로이다.

   진실로 북한에게 필요한 것은 남한국민의 자유로운 민주화가 아니라 남한정부가 통제 불능의 무정부상태로 전락되고 북한군의 남침이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될 수 있는, 일명 공권력 부재 정국인 것이다. 북한에게 있어서 대남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북한식 사회주의 통일이고 그 방법은 언제까지나 무력에 의해서 남조선 해방을 실현하는 것이다 (p. 319-320).

   북한정권의 대남전략에 포함되어 있는 김일성의 남조선 혁명방침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항상 남조선 내부의 자생적인 폭력이 우선 기회이고 여기에 북한의 게릴라식 군사적 작전과 전략을 가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김일성은 남조선혁명에서 첫 단계는 북한식 사회주의 형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가 그것을 계기로 김대중과 같은 남조선의 민주인사가 정권을 장악케 함으로써 비 전쟁의 방법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p. 323).  

땅굴은 시멘트로 구축해서 영구화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고 규모는 탱크(북한말로 땅크)나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폭 정도는 안 되지만 순수 전투부대들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남한의 어느 지역까지 와서 갱도바깥으로 나왔는지는 한밤중이어서 지도상으로 계산해도 잘 알 수 없었다고 했고 밤중에 살펴봐도 주위가 한산한 농촌마을은 분명하였다고 하였다. 남쪽 갱도의 출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한 것은 두 늙은 내외라고 하였다. 소부대작전은 주로 대낮보다는 밤에 진행되는 것이 관례지만 23명이라는 인원이 밤길에 동시에 움직이면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분명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개 조로 분산되어 전라북도지역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p. 328).

광주사태 때 파견되었던 북한군 요원들이 병장기를 다룰 줄 모르는 남한의 대학생들에게 그 사용법까지 가르쳤다고 했다. 그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남한 대학생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요원들을 눈앞에서 접촉하면서도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330)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뻔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 정도로 생각했음)에게 무기를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뭐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여성이 자기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불안한 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 여성은 그의 정체를 충분히 의심할 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강원도 태생 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 그는 그 여성에게 자기가 강원도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돈벌이를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 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하고 젊은 여성의 뒤를 다급히 쫒아 갔다고 한다. 개인 살림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따라 여자의 뒤를 쫒던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여자가 들어간 대문밖에 도착해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가 집안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pp. 330-331).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순간 귀가 멍하고 가슴이 철렁 하였다. 적후에서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처리를 해야 하는지 그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에 만났던 젊은 여성과 그의 동료인 뜻한 남성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말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남자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총을 꺼내드는 순간 위험을 눈치 챈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담장 밖으로 도망치던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지는지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피자국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핏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따라가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몇 미터도 못가서 신음하면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총을 꺼내서 들이대자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살려두면 절대로 안 되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 (pp. 331-332).  

 

광주봉기가 끝난 후 북한에는 어느 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영웅들이 수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어 영웅이 되었냐고 물어보면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다 그곳에서 전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도당11과 대상이 되어 당과 수령이 돌봐주는 애국자로, 혁명의 핏줄을 이어나갈 세대로 지목되어 오늘도 김정일의 관심 속에 별로 근심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 (p. 343).

2)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뻔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 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뭐하고 서 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 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 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앝에 있는 여성이 자기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불안한 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 여성은 그의 정체를 충분히 의심할 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강원도 태생 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 그는 그 여성에게 자기가 강원도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돈벌이를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 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으로 젊은 여성의 뒤를 다급히 쫓아 갔다고 한다. 개인 살림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따라 여자의 뒤를 쫓던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리고 달려갔다. 여자가 들어간 대문밖에 도착해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가 집안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 보였어요.” 순간 귀가 멍하고 가슴이 철렁 하였다. 적후에서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처리를 해야 하는가 그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에 만났던 젊은 여성과 그의 동료인 뜻한(듯한) 남성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말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남자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총을 꺼내드는 순간 위험을 눈치 챈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담장 밖으로 도망치던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지는지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피자국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핏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따라가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몇 미터도 못가서 신음하면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총을 꺼내서 들이대자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살려두면 절대로 안 되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 (347쪽 5 행~349쪽 7 행).
 

증언 12: '광주의 영웅' 나의 친구의 아버지 (전 북한 김형직사범대학 학생)

  평범한 군인가족으로 살아오던 영호의 가족은 영호아버지가 광주에 내려와서 싸우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영웅의 가족으로 과거급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평양으로 불려 올라간 영호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고 집에서 부양가족으로, 가정주부로 살아오던 영호의 어머니가 함흥시 양복점 초급당비서로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 북한의 텔레비전에서도 광주봉기에 대해서 거의 매일같이 톱뉴스로 장시간을 중계하곤 하였다.
  몇 시, 몇 분에는 전라도 광주의 도청을 봉기군이 장악하였고, 또 어디 어디를 장악하였다고 하면서 시시각각으로 특종보도를 진행하였다 (p. 343).

증언 13: 5·18 굉주폭동의 살인자는 김정일이다 (전 북한 3·13공장 지배인)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울 데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
  광주인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살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이 광주사건의 내막을 증명하는 것도 물론 놀라운 일이었지만 중앙당의 한다하는 위치가 있는 간부의 입에서 광주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소리가 나왔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
pp. 357-358)

광주인민봉기에 참가한 공화국영웅
   광주인민봉기에는 그 사람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특수부대 전투원들이 참가했는데 그 사람들은 광주인민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남조선에 침투되어 들어가서 사전 준비 작업을 했었다고 했다. 광주에 참가했던 사람들마다 임무가 서로 달랐는데 그들이 광주에서 수행하여야 할 기본 임무는 남조선 인민들을 자극시켜서 봉기에 자각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특수 교란작전이었다고 하였다. 

2)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공화국영웅의 말을 빌어서 친구는 말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르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불응해서 도망가면 그 사람들 역시도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광주에서 일어났던 혁명적인 인민봉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가 있었고 요란했던 광주사건이 남조선사람들의 자체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려가서 만들고 지휘했다고 인정하였다 (p. 361-362).

밥을 먹던 일행 중의 한사람이 광주인민봉기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묻자 그 친구는 자기도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영웅이 말하는데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전투현장에서 죽은 즉시로 남조선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379~380쪽).

증언
전 북한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도 534부대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에 김정일이 북한 평강도 지구에 비밀리에 조직되어 있는 534특수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401쪽). 

증언 14: 천마산에 시체도 없이 만들어진 광주 영웅들의 묘지 (전 북한 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떼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다.  매일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 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원들이 남조선 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 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광주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때를 맞추어 대규모 특수부대가 남조선으로 침투해서 전면전을 피하면서 배후 교란작전으로 주요 시설물들을 파괴하면 사회혼란이 조성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남조선 해방은 거의 확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평양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알려주던 말대로라면 남북통일은 아무리 길어야 몇 개 월정도 안팎이라고 할 수 있었다.

  5.18광주사태가 끝난 지 30년이 다된 지금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생생한 것은 매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고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을 살인하는 장면에 무게를 두고 반복적으로 방송해가면서 남조선괴뢰군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짐승도 치를 떨 정도라고 저주를 퍼 붙던 방송원의 격앙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p. 379).

북한에는 광주사태에 참가했다가 돌아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고 제가 살던 곳에는 광주에서 죽고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영웅묘지가 있습니다.
  현재 북한 함경북도 소재 청진시 천마산 마루에는 대남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전투영웅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p. 380).

그의 말에 의하면 광주사건 당시에 무기를 탈취해서 시민군들에게 나눠주면서 진압군에게 사격을 하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왜 총을 쏴서 사람을 죽여야 되는 가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부 광주시민들은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의심하면서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고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p. 381).

증언 15: 대학시절부터 알고있는 5.18광주의 무장폭동 (전 남포시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

1) 텔레비전화면에 나오는 장면들도 이전에 보던 것과는 전혀 양상이 다른 실지 죽이고 쫓기는 장면들이었습니다. 남조선괴뢰군들이 총탁(남한의 개머리판)으로 사람들을 내리치고 발로 짓뭉개면서 실신한 사람들을 질질 끌어다 차에다 싣고 장면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고 끔찍한 일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내용은 시간이 갈수록 정상적인 사람들도 감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점차적으로 더 험악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장실에 숨어 있는 대학생인지 사회직장에서 일하는 여자인지 젊은 여성의 머리를 가격해서 두개골을 박살내고 그 자리에서 옷을 홀딱 벗기고 젓 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 한참동안 생생하게 그대로 나오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중년여성으로 보이는 임산부의 머리채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서는 치마를 찢어 버리고 팬티를 장검으로 베버리더니 긴 칼로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끌어내는 등 예술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몸서리치는 장면들이 그대로 여과 없이 생생하게 나왔습니다 (pp. 397-398).

   남한에 와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5·18사건이 한창이더 그때 남쪽에서는 광주인민봉기의 장면들을 전혀 중계하지 않아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어떻게 돼서 바로 다음날부터 남조선의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대로 텔레비전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중계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또한 광주에서 벌어진 살인 만행들은 전두환 군부가 진압에 동원된 군인들한테 공개적으로 대량의 환각제를 먹여서 투입했다고 하였으며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부녀자건 할 것아 가리자 말고 진압군에 대항하는 사람은 인정사정을 보지 말고 모조리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pp. 398-399).

3)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 인민들과 청년 학생들이 자본주의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것이 분명하지만 그 뒤에는 북한에서 내려간 특수부대 사람들이 있었고 장갑차를 몰고 괴뢰군을 깔아죽이고 각종 중무기를 다룬 것도 거의 다가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쪽의 사람들 이었다는 것이었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북한으로 돌아와서 영웅칭호를 받았다는 상세한 내용들과 어떤 사람은 중상을 당해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정체가 노출될 것을 염려한 동지들이 그를 사살하고 시체를 불태워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 등 광주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터져 나왔다 (418-419쪽).

4) 신변상 문제를 우려하는 본인의 거절로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들을 수 없었지만 그 특수부대출신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광주사건 때 비폭력시위가 무장폭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시위과정에서 진압군에 의한 자극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북한의 계획적인 수순 속에서 국가전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주학살을 대한민국 국군 쪽으로 돌리고 김정일을 감싸주고 있는 친북좌파 애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비꼬았습니다.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p. 402).
                                                                         

                                                광주사태에 대한 당시 북한의 선전 (이호재(가명)

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남쪽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30년 세월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북한 인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변으로 기억된다. 나는 2005년에 북에서 남한에 온 사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땅의 사람들은 5,18사건을 민주화 운동의 한 부문으로 기억할 뿐 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독재를 부수고 민주를 쟁취하려는 애국학생들과 애국시민들의 투쟁이라고 단순히 기억할 수만은 도저히 없는 기막힌 사건중의 사건인데도 말이다. 내가 감히 이 운동을 사건이라고 말함은 그럴만한 반증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사태에는 북한 특수군이 관여했다. 그러한 증언 자료들은 북한 전역 어디에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18사건이 있은 후 북한 전 지역은 벌 둥지를 쑤셔놓은 것처럼 소란했다. 중앙 TV와 조선중앙1,2,3방송들은 연일 남조선에서의 광주인민 봉기에 대해 대거 선전했다. 군에서 갓 제대해 나온 그때 나는 그 선전을 들으며 당장 이 땅에 전쟁의 나는 줄 알았다. 방송뿐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일제히 강연회를 열고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영웅적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에 대해 연설했다. 강연내용에는 기막힌 참상들이 생생한 화폭으로 열거돼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전달만이 아니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격분과 증오로 가슴을 불태울 가혹한 잔행들로 역어져 있었다.

강연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두환 중장은 광주사태에 대비하여 내려 보낸 ‘계엄군’ 공수부대 전 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다량 복용시켰다. 전두환의 명령은 잔혹한 명령이었다. 광주시민 70%를 죽여서라도 도시를 즉각 탈환하라는 것이었다. 5,20일 이렇듯 잔혹한 명령을 받은 수천 명의 계엄군이 탱크와 장갑차 최신무기들로 장비한 후 광주시내로 진입했다. 당시 광주는 폭동시민들의 손에 완전 장악되어 있었다. 서라는 명령에 불복하거나 겁을 먹고 뛰면 즉시 사살했다. 도시군의 항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시내의 경찰서 무기고를 점령하고 젊은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자동총으로 무장했다. 이것은 철두철미 총과 총이 대결한 가혹한 ‘내전’이라고 강연자는 격앙에 넘쳐 연설했다.

-진압현장에서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은 말 그대로 듣는 사람이 증오를 최대한 끌어내는 짐승도 낯을 붉힐 야수적 행동이었다. 그들은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낸다. 끄집어 낸 태아를 대검 끝에 꼬나들고 휘저으며 밀집된 시위 군중을 위협했다. 젊은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도려내고 철사로 포박해 군용차에 매달아 끌고 다녔다. 쇠파이프로 군중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즉사시키고 연발발포로 무차별 사살을 서슴없이 감행했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이 강연 참가자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명령만 떨어지면 단숨에 남쪽나라 광주까지 달려 나가 전두환 계엄군을 소탕할 열기로 전국이 들끓었다. 5월 25일 전 북한 전역에서는 광주참사를 주도하는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규탄 대회와 각종 모임들이 진행됐다. 사실상 광주사태에 대한 강연을 들은 사람들치고 여기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강연은 가장 반인륜적인 인간들만이 저지를 수 있는 참혹한 참살현황을 너무도 생동감 있게 엮어냈던 것이다. 어이하여 민주화를 위해 일어선 자국민들을 그렇듯 참혹한 방법으로 도살할 수 있느냐는 것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안겨왔던 것이다.

계엄군은 시내에 돌입한 후 국내외 기자들의 출입을 엄금했다. 이미 안에 있던 외신기자들이 밖으로 빠져 나올 때도 그들은 기자들이 소지한 모든 기재들과 자료들을 무조건 압수했다. 그렇듯 외부와의 연결을 완전 차단한 상태에서 광주 현황을 어떻게 그리도 생동감있게 전하는지 모두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벌어진 사태가 너무도 참혹한 것이기에 그것을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주는 시민들 손에 장악된지 10일 만에 다시 계엄군의 손에 들어갔지만 민주화를 위해 피를 바친 전 시민들의 애국적 행동은 영원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라는 연속된 강연은 전 북한 인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남한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했다, 그는 조선 영화사 작가와 의합하여 시나리오 ‘님을 위한 교향시’ 를 쓰고 이내 제작에 들어갔다. 이 영화가 북한 전역에서 대 성황리에 상영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광주폭동 진압 당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잔혹한 살인 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남한 사람들이 말하는데, 황석영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내용의 시나리오를 썼는지 의문이 깊어진다.
 
영화는 남녀 두 대학생의 사랑을 그린 영화였는데 시대를 앞서가는 젊은이들의 양심을 그린 영화다. 두 남녀가 남해의 어느 섬에서 한참 휴양을 즐기고 있을 때 광주폭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주력군이었다. 여자는 폭동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남자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 남자 대학생은 대학교 학생회장이었기에 알기만 하면 무작정 폭동현장으로 달려 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당시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 섬지기 여자의 삼촌도 광주폭동사실을 알았다. 삼촌은 이 두 남녀를 못마땅하게 지켜본다. 시대를 선도하는 젊은이들이 남들은 피 흘리며 싸우는데 한가하게 연애에 묻혀 세월을 탕진하면 역사 앞에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냐고 말한다. 얼마 후 남자도 폭동 사실을 알게 됐다. 더 지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만을 남겨놓고 시내로 들어와 폭동에 합세하여, 계엄군을 물리치려 용맹하게 싸운다. 싸움 현장은 치열했다. 위에서도 열거했지만 대검으로 찌르고 배를 가르고 옷을 벗겨 군용트럭에 끌고 다니는 등 강연회 때 선전한 모든 장면들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문제는 남한 작가였다. 남한작가가 쓴 영화의 장면이었기에 거기엔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북한 사람들은 광주폭동진압사태의 잔인성을 그대로 믿게 되었다. 환각제 복용은 말 그대로 사람을 짐승으로 돌변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두환은 자기의 정치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남조선 군부 다시 말하면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해 치를 떨었다. 과연 외세와의 싸움도 아닌 자국 국민을 상대로 저렇듯 참혹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도처에서 광주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들이 열렸다. 물론 그러한 집회들은 모두 해당 당 조직들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10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광주시민들은 도시를 장악했으나 결국 계엄군의 무차별 살육으로 다시 빼앗겼다. 수천 명의 희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를 남긴 이 폭동은 그렇게 진압되었으나 남조선 혁명에서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민족혁명이라고 북한 정부는 선전했다. 그 후 일 년 쯤 지난 81년 광주 폭동 1돌 기념 강연이라고 기억된다. 중급 간부들만의 모인 간부 강연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왔다. 연사는 도당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는데 직급은 도당 위원회 통보 과 지도원이라 소개했다. 그 사람의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현 정세는 바야흐로 조국통일의 대 사변을 준비 있게 맞이해야 할 준엄한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강사는 조목조목 실례를 들어가면서 이야기했다.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께서는 얼마 전 당 중앙정치국 위원회 기조연설에서 우리는 벌써 세 번에 걸쳐 조국통일의 기회를 제때에 활용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첫 번째가 1960년 4,19 인민봉기 때이며 두 번째는 1968년 겨울 미군 최첨단 간첩선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때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도대체 언제인가 하는 의문에 강사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 대목을 말할 때 강사의 눈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관중도 놀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5,18 광주폭동 때였다는 것이었다.

남조선 전역이, 전두환 군사 파쑈 정권을 반대하는 반정부 기운이 광주폭동과 더불어 최고도로 무르익었던 그때 인민군의 남진이 이루어 졌더라면 통일은 시간 문제였다는 대목에서 관중은 자못 긴장해졌다. 강사는 간부들뿐이기에 말한다고 했다. 광주 폭동은 전적으로 우리의 대남공작의 빛나는 승리의 결과라고 했다. 최근 남조선 정세는 우리 공화국의 의도에 맞게 아주 긍정적인 발전단계를 거쳐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반외세 애국적 투쟁으로 이름이 나있는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남조선 전역에 걸쳐 우리 공화국을 동경하고 민족의 앞길을 위대한 지름길로 이끄시는 수령님을 흠모하고 칭송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도 강경하게 울려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통일혁명당 전라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영도, 서울시 인민위원회 김종태 위원장, 그들은 이미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지만 그들이 남조선 전역에 뿌린 수령님의 위대한 사상은 이미 깊숙이 그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목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하조직, 반 지하조직들의 활발한 반정부 투쟁은 잠재단계를 벗어나 이제는 대중운동으로 전환될 시기라고 말하며 바로 광주폭동은 이 끓어오르는 군중운동을 한 계단 더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리는 우리당의 대남정책 실현이라고 말했다. 북한 노동당은 언제나, 남조선 혁명은 자국 내의 인민각성과 주권을 쟁취하려는 스스로의 운동이 폭력전쟁으로 일어나고 전개 되어야만 비로소 혁명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분산된 대중운동을 한 곬에 집결시켜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노숙한 당의 주도와 세밀한 원칙에 의거한 유일영도가 이루어 져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그러한 노선에 따라 지난 수십 년 전개된 노동당의 대남정책은 비로소 8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제 지금껏 축적한 군중운동의 힘을 한 곬에 모을 폭발적인 사변이 절실히 필요했는 바 그 실현이 바로 전라도 광주폭동이었다는 것이다.

모두는 강연을 들으면서 조였던 가슴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광주 폭동에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전국에 쫘 악 퍼져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조직적인 지시가 없었기에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발설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또 소문뿐이었지 그것을 확증 즉 증명할만한 사안들이 극히 드물었던 때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면 무엇인가 더 알고 싶어 몸살을 떤다. 이 구석 저 구석 앉으면 쉬쉬 하던 그 소문의 진가를 바로 강연 연사가 시원히 알려주자 일순간 장내는 벌 둥지를 쑤셔 놓은 것처럼 웅성거렸다. 심지어 그 좋은 통일의 기회를 왜 그렇게 속절없이 흘려보냈을까 하고 못내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게 된 데는 바로 김일성이 통일기회 세 번 중의 마지막 하나였다고 했다는 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강사는 다시 격앙에 넘쳐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꼼꼼히 들여다보며 한자라도 틀릴세라 읽던 중앙에서 인쇄한 원문을 이번에는 보지 않고 말했다. 이제 우리 공화국은 남조선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완전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우리 군 특수부대가 남파된 것은 한 개 대대 인원이었다. 잠수함과 공중으로 은밀히 전라도에 스며든 우리 군은 자정이 지난 깊은 밤 환각제를 복용한 전두환 계엄군을 광주시 교외에서 먼저 기습했다. 물론 기습할 때는 군복이 아닌 학생복과 시민들이 입는 옷으로 바꾸어 입고 사격했다. 뜻밖의 총격을 받은 계엄군은 일단 뒤로 물러났으나 잠시 후 다시 탱크와 장갑차들을 동원해 물밀듯이 시내로 진입하려 했다. 총격전으로 온통 소란스러워지자 시내에 있던 폭동군중은 모두 잠에서 깨어 대기태세로 이전했고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무등산으로 피난을 갔다.

만약 그때 우리 특수군이 계엄군을 제때에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소리 없이 숨어 든 계엄군에 의해 광주시는 말 그대로 피의 바다가 범람했을 것이라고 강연자는 말했다. 폭동군중은 시민으로 위장한 북한 군인들의 선도에 의해 이내 경찰서를 비롯한 주요 군부대 기관들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했고 시내로 진입한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곳곳에서의 저항에 의해 계엄군은 부득불 시내에서 철수하여 외곽에 모였다. 그들은 이렇게 그저 순수한 폭동자들이 무기까지 사용하며 저항할 줄 미처 몰랐던지 급히 전장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인민군은 각의한 방법으로 시위 군중에게 선전 공세를 했다. 훗날 퍼져나간 말이었지만 북한군인 여러 명도 광주에서 희생되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훗날 북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빙자료가 될 수 있었기에 그들은 그 시체를 한 곳에 모아 휘발유를 뿌리고 태워버렸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은 북한 전역에 퍼져 나갔어도 하등 문제시 되는 것은 없었다. 북한 체제가 강요했듯 당시 북한인민들의 국가관은 대단했다. 국가관이라기보다는 수령관이다. 당과 수령을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운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그것은 성스러운 일이었고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안고 수령의 기억 속에 영생하는 복 받은 삶으로 인정됐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그리고 수령님을 위해 남조선 혁명에서 한목숨 바쳐 싸웠다면 그토록 자랑스러운 일과 명예는 다시없다는 말이다.

1980년대 초반에 전 북한을 경악으로 뒤흔든 전라도 광주폭동은 날자가 흐름에 따라 ‘영명하신 수령’ 김일성에 대한 위대함으로 점차 그 기수를 바꿨다. 악명 높은 전두환 정권의 야수적 탄압에서 받은 전율보다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소문과 간부강연을 통해 그것이 이내 양상을 바꿔 김일성의 위대함과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던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통일의 위대한 성전을 승리로 맞을 수 있다는 승리의 신심으로 가슴 불태웠다는 얘기다. 이것이 국민계몽을 위해 북한 정권이 만들어낸 거짓 강연인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나 아무리 그래도 없는 사실을 오도하여 특수군 광주폭동 개입을 강연까지 해가며 선전했다는 것은 어딘가 어불성설이다.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을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흰 것도 검다고 곧잘 우겨대는 북한 정권이 행태로 봐서는 능히 그런 거짓말도 꾸며 낼 수도 있지만 당시의 환경은 절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세 번의 조국통일 기회를 놓쳤다는 김일성의 말과 관련 된다. 북한군 특수부대까지 한 개 대대 역량이나 파견하는 상황이었다면 남침도발을 벌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분명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았을 것이었다. 한 개 대대 파견은 그 진상여부를 진찰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고 전혀 내려 보내지 않았다면 이미 전라도에서 싸웠을 비밀 조직들에 미안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압과정을 겪으면서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원리를 알았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통일기회를 놓쳤다는 망언은 북한전역에서 거대한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남정책은 그러한 과정을 남조선 혁명의 단계별 성장 과정이라고 규정지으며 그러한 폭동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확산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광주폭동이 광주 한 지역에서 국한되지 않고 그 여파를 타고 남한 전 지역 봉기로 넘어갔다면 북한군이 남한으로 재깍 진격했을 것이다. 김일성 또한 그것을 바라고 광주폭동을 주도했으며 특수 군까지 파견해 각종 반인민적인 만행이 발생하도록 유도했다. 80년 당시 인민군은 비상전시태세에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반도의 남단 아래쪽에서 일어난 봉기에 왜 괜히 북쪽에서 신발 끈을 조여매고 대기 태세로 돌입했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반증이다. 그러나  북한이 바라던 대로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전국적인 반정부 기운이 무르익어 갔으나 당시 남한은 폭동 그 자체가 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세 번의 통일기회를 놓쳤다고 측근 간부들 앞에서 역설했고 전국적인 간부 강연회를 열고 그 같은 진실게임을 벌인 것이었다. 그 강연을 들은 후 간부들은 ‘내 놓고 광주폭동에 우리 군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말만 빼고’ 어느 때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통일 위업에 대비하라고 선전했다.

                                                           내가 만난 친구의 형의 증언

그 후 나는 우연히 (정확한 날짜는 기억되지 않는다.) 친구의 친구라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밝힐 수도 있으나 본인의 승인 없이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 친구의 형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되어 가지고 군에서 제대하여 집에 내려 왔는데 그가 바로 광주폭동 현장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친구를 따라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초가을에 접어드는 화창한 날이었는데 친구와 나는 그 사람이 있다는 강변에 나갔다.
 
그냥 가면 된다는 말에 빈손으로 갔는데 아늑한 풀밭에는 숯불이 이글거리고 통통 살이 찐 검은 색깔이 돼지 한 마리가 벌건 불에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자 두 명과 그 형이라는 사람과 그리고 또 한사람의 알지 못할 남자가 있었다. 통돼지를 굽고 있는 현장에 나 같은 사람은 난생 처음이어서 어안이 벙벙했지만 친구는 이미 익숙한 자리었는지 스스럼없이 나를 불 앞으로 이끌었다. 벌써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원래 고기라면 나무라지 않는 나는 벌써부터 목을 적시는 군침을 애써 삼키며 두려운 눈으로 그 사람들을 살폈다.

당시 특수 병종 군인들이라면 북한 젊은이들은 모두 무조건 선호했다. 군대에 나갈 나이가 되면 무조건 특수병종에 배치받기를 원했다. 그만큼 강한 남자에 대한 선호는 당시 젊은이들 속에서 유행되었다. 형이라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넌 어디서 군복무를 했느냐고? 나는 숨김없이 말했다. 진정 우러러 보는 사람 앞에서는 거짓이 없다.

생기기는 여자처럼 왜소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벌써 말하는 품이 상당한 무게가 있었다. 미리 가져다 놓은 술이 거나하게 돌아가자 그 형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그런데 마디마디 터놓는 말이 모두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이어서 바싹 당겨지는 구미를 느꼈다. 옆에서 시중들다시피 살뜰하게 구는 여자가 이따금 눈을 할쭉거렸으나 술잔이 하나 둘 비워질수록 그 사람이 말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헤엄쳤다. 모두 군에서 있었던 무훈담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광주봉기에 대한 말까지 튀어 나왔다. 자기는 직접 남조선까지 나갔다 온 특수 요원이었다는 것이다.

일이 그쯤 되자 나는 서슴없이 물었다. 그때는 이미 나도 어지간히 술에 취해가던 것 같았다. 진짜로 특수 군이 광주폭동에 참가했냐고 묻자 그 형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럼 내가 공연히 희떠운 소리나 하는 인물로 보이냐는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내가 손을 홰 홰 내 젖자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너 같이 2제대에서 군복무를 한 놈이 어찌 우리 같은 군인들의 무훈담을 알겠냐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광주사태를 반영한 영화 모두가 거의 진실과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엄군의 만행은 모두 북에서 들어 간 우리 특수군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요? 모두의 눈은 자연스레 그 형이 얼굴에 집중되었다. 정말 싸울만한 전투였다,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진행된 일이어서 어쩌면 재미까지 있었다는 거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겠지만 사람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총탄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결코 재미란 것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이 하는 이야기이기에 언제 그것을 탓할 경황도 없었다.

총 성이 울리게 함으로써 계엄군이 부득불 무장을 사용하게끔 유도했다는 이야기였다. 계엄군은 실지 현지에서 총격전을 치렀다. 그 사람이 말했다. 너들 영화에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을 목격했지? 그랬다고 하며 친구가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 형은 그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하며 한참 갑자르다가(말하기 거북하여 뜸들이다) ‘사실 그건 우리부대 특전사들이 한 짓’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자 그는 그래야만 시민들의 격분을 이끌어내고 과격한 행동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적후에서의 특수부대의 임무를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한 만행이 백주에 감행되자 말 그대로 시민들의 격분은 하늘을 찔렀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정치 공작임무를 맡은 인원들이 국내외 기자들에게 그 사진을 넘기며 온 세상에 이 용서 못할 만행을 고발해 달라고 부탁하는 공작도 진행했다. 그렇게 한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 결과로 전 남조선 땅에 이 처절한 실태를 알리고 세계에 이슈화함으로써 전 남조선 땅에 반정부 시위가 들끓게 하고 세계 앞에서 북한군 진입의 구실을 마련하자는 데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수령님께서 구상하신 위대한 통일 전쟁이며 한반도에서의 승리의 서곡이 될 수 있는 멋진 작전이었다고 긍지에 넘쳐 말했다. 듣는 우리 모두의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진정 역사적 순간에 진입한 사람의 심정이 되어 그 형의 다음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형이 말이 끝나자 우리 모두의 입에서는 하나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런데 왜?? 그 형이 웃었다. 독한 소주를 고뿌 채 들이키면서 울먹이며 말했다. 일이란 언제나 변수를 안고 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바라는 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바로 세상만사라는 것이었다. 만약 바라는 바대로 그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자기가 지금 여기 촌구석에 와서 이 같은 소주나 병들이 할 까닭이 있겠냐는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전쟁이었다고 했다.

전쟁?? 그럴만한 타당성이 있었다. 당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살사건이 일어 난지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12,12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가로챈 전두환 군독재 정권에 대한 남조선 인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어떤 외부의 물리적 힘이 동반된다면 능히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북한 정부의 시기론이었다. 이렇게 좋은 시기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전라도 조직으로부터 희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당시 합법적이다시피 맹활약 중이던 친북 조직은 광주폭동에 불을 지르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김일성도 이것을 기회로 봤다. 수 십 년 꿈꾸던 통일광장의 유일 대통령이 되어 전 인민의 환호를 받는 신적인 자기의 멋진 모습이 상상만 해도 즐거웠을 것이다.

광주폭동을 기점으로 남조선 전역에 4,19와 꼭 같은 민주항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처럼 멋진 기회는 다시없을 거라고 결론짓고 인민군 특수부대 파견을 서둘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광주 폭동은 그렇듯 심혈을 기울이고 특전부대까지 동원되었으나 별로 탐탁한 실효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서 진압됐고 다른 도시들에는 퍼지지 않았다. 나는 간부 강연에서 들었던 그 말이 생각났다. 조국통일의 세 번째 기회, 김일성의 그 세 번째 기회는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때 만약 60년 4,19처럼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났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또다시 한차례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만약 그때 전쟁이 일어났다면 어느 쪽이 이길 거냐를 떠나서 그 무지한 총포탄의 작렬 속에 한 민족의 가슴 아픈 참혹한 후진을 무엇으로 보상했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그때는 가슴을 울렁이며 그 형이 이야기를 격동 속에 들었지만 남한에 떳떳한 국민으로 입국해 사는 지금의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 형이 이야기가 결코 지나간 허풍으로 듣기에는 너무도 아귀가 잘 맞는 소리였다.

그 후 그 형은 다시 몸이 완쾌되어 본 부대로 돌아갔다. 가면서 다시 친구와 나를 불러놓고 신신당부했다. 어디 가서 그때들은 말은 없던 것으로 하라고,, 술기운에 뱉은 말이지만 너무도 중대한 사안이어서,,,,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이미 강연을 통해 다 알려진 일이라고, 아마 이일을 모르면 북조선 사람이 아닐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그거? 그거 말이야?? 우리 둘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안다고 철부지가 아니니 걱정 말라고, 전에 북한 주민의 영화를 보며 치를 떨었던 바로 그 장면,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 낸 천인공노할 극치의 만행을 바로 북한군의 시민감정을 유도하려 저지른 행위였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 그건 함부로 지껄일 말이 아니었다, 출처를 캐려 들면 말한 그 형은 물론 들어버린 우리 둘(그때 두 여자까지) 역시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 어느 누구나 들으면 치를 떨 만행이지만 그러한 일이 국가를 위해 어떤 정의를 위해 부득불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면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적 범죄여서 그런 것인가? 북에 살던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나는 그러한 테러적 행위가 얼마나 큰 동족말살 행위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 후부터는 남조선에서는 남침을 감행할만한 이변적인 사건들이 없었다. 없을뿐더러 북한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대 발전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광주사태 바로 알기
질문 포인트

* 누가 광주사태의 주동세력이었는가?
* 북한군 광주 침투 방법에 대하여 탈북자들은 무어라고 증언하는가?


외국서점 해외쇼핑, 국내 쇼핑 전체 카테고리 의류/속옷/패션 쇼핑몰 종합쇼핑몰 금주의 인기 할인쿠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