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5.18 토론자료 추천연구도서  광우사태 동영상 상영관

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
 

   2008년 11월 조갑제 기자는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제목의 글을 썼던바, 이 글 제목은 증언과 주장의 혼동을 전제하는 것이었기에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만 명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는 광주사태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인민봉기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북한에서 보고 들은 북한인민봉기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증언은 주장이 아니다.  만약 북한에서도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면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혼란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동일한 5.18사건에 대하여 남한과 북한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차차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좌파정권 시절 탈북자들이 자유롭게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을 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정권교체후 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이 학수고대되던 때에 문제의 글은 탈북자들은 입을 닫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받아들인 탈북자들이 있다. 조갑제 기자 역시 그 진심은 선의의 의도였겠으나, 탈북자들의 발언권 또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치일 것이다. 탈북자들이 근래에 광주사태에 대하여 입을 열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서울에서 학생이었던 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서울의 학생들이 광주사태의 한 당사자였던 것처럼 당시 북한군 역시 광주사태의 한 당사자였다.

   금년 9월 하순에 발간된 탈북자들의 5.18 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실체"에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조갑제 기자의 주장 중 어느 편이 옳으냐를 가름할 몇가지 핵심 내용들이 있는데, 그 중에 네가지를 꼽는다면 (1) 남한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킬 게릴라 작전을 위한 북한군 특수부대 중 상당수는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인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남파되었으며, (2) 광주인민봉기가 전국 규모의 무장봉기로 확대될 때 남침하려 했으며, (3) 그들은 잠수함을 이용하여 침투하였으며, (4) 광주에서 북한군 정체를 알아보는 자들은 모두 죽였으며, 그래도 부상 등으로 북한군 정체가 노출될 위협이 있을 때는 자폭하였다는 것이다.

   위의 핵심증언 (1)과 (2)는 광주사태 당사자들의 범주는 시민군으로 제한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당시 서울에서 학생이었던 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광주사태에는 조갑제 기자가 보지 못한 큰 그림이 있다.  조기자에게 당시 서울 대학가에도 민중봉기를 선동할 목적으로 붙었던 대자보들에서 흐르는 논리를 눈여겨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광주사태를 야기한 배후 세력의 본래의 목적(큰 그림)은 전국적 민중봉기였다는 점에서 서울의 운동권도 한 당사자였으며, 남한의 무장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즉시 남침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북한군도 한 당사자였다.

   당시 전국 대학가에 붙었던 대자보들의 첫번째 객관적 사실은 학생이 아니라 배후 세력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것이요, 둘째로 전국적으로 민중봉기를 일으키라는 논리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민무장봉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은 남한 자료들로도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아래 5월 20일자의 대자보를 살펴보자.

거듭 못박아 말하자면 "학생 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 <행동강령>무기를 제작하라!...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우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등의 살벌한 문장들로 가득한 이 대자보는 전남대생들이 제작한 것이 아니다.  전남대에는 학생 혁명군도 없었으며, 전남대생들이 20일 혹은 그 이전에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한 적도 없다.  시민군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나누어주는 총을 받았지만 시민군들조차도 5월 20일 상무대 무기 탈취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실제로 무기 탈취 작전을 주도한 북한군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당시 거의 모든 대자보들은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배후 세력이 제작한 것들이었는데, 위의 대자보의 경우 김대중 세력이 제작한 것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십중 팔구 간첩으로 남파된 북한군이 작성한 대자보였다.

그러면 위의 대자보를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발행한 아래의 5월 22일자 대자보와 비교해 보라.

http://study21.org/518/photo/5_22dajabo.jpg

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22일자의 이 대자보는 "광주시민의 민주. 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 오고 있다.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등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자, 투사회보라는 제목이 어디서 왔겠는가?  그리고, 위 대자보는 전국 규모의 시민군 군사작전 계획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조갑제 기자는 당시 광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어떻게 기자들도 모르는 정보들을 시민군 지휘부는 알고 있었을까?  더구나 승리를 장담한다.  광주사태가 전국적 무장봉기로 확산만 된다면 승리한다는 것이다. 

당시 전국적 민중봉기를 선동했던 모든 대자보들은 큰 변란이 있을 것을 예고했다.  위의 대자보에서도 "이제 승리의 날이 머지 않았다"는 장담은 광주시민군이 60만 국군을 이길 수 있다는 농담이 아니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기에 광주사태 문제는 아직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5월 27일 새벽의 도청진압작전 때도 윤상원이 자폭을 선택하였기에 광주 시민들이 죽었다.  아직 무기를 반납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선제 발포하였기에 국군 자위권이 발동된 것이었다.  시민군 선제 발포로 인한 교전에서 군인과 시민군 십 수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사건과 전혀 무관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살인마 누명을 씌우기에 앞서 윤상원이 왜 자폭을 선택하였는지를 물어야 한다.

금년 9월 하순에 출간된 탈북자들의 5.18증언록은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는 광주사태의 큰 그림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남한 논객들이 모르고 있던 구체적 사실들을 기술한다.  그 중 하나가 잠수함을 이용한 침투 방법이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74~75쪽).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88쪽).  그들 조는 1980년 3월 말경에 남조선으로 침투할 데에 대한 임무를 받고 한 달 정도의 가상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다음 1980년 4월 말경에 출발하여 남포항에서 구소련에서 들여온 디젤잠수함에 승선하였고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안(어느 지역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음)에 상륙하여 서울시내로 침투하였다 (316쪽).>> 

근 일년 전의 문제의 글에서 조갑제 기자가 제시한 또 하나의 쟁점은 북한군 목격자가 없었다는 것이요, 탈북자들의 증언은 누구든 북한군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눈치챈 자는 가차없이 죽였으며, 북한군이 교전 중 입은 부상으로 광주를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경우 자폭시켜 북한군 개입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76쪽).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82쪽).

그들이 남조선침투 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자폭훈련이었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 (317쪽).  그는 아마도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상대가 몰랐다고 해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하였다 (321쪽).

밥을 먹던 일행 중의 한사람이 광주인민봉기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묻자 그 친구는 자기도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영웅이 말하는데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전투현장에서 죽은 즉시로 남조선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380쪽).  누구는 죽고 누구는 북한으로 돌아와서 영웅칭호를 받았다는 상세한 내용들과 어떤 사람은 중상을 당해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정체가 노출될 것을 염려한 동지들이 그를 사살하고 시체를 불태워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 등 광주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터져 나왔다 (418-419쪽).>>

과연 잠수함으로 침투한 북한군이 있었으며, 침투한 북한군 중 일부가 자폭한 사실이 있었는가?  만약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제목의 지난 해 11월의 조갑제 기자의 글의 관점만을 전제로 한다면 이 증언은 허황된 이야기로 부정된다.  그러나, 역으로 "북한군이 잠수함으로 침투한 사실이 없으며, 그 어느 북한군도 남한에서 자폭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1996년 9월에도 실제로 북한군이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자폭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래의 두 뉴스 동영상은 1996년 9월 18일 MBC가 방송했던 영상 뉴스이다.

<<오늘새벽 1시를 전후해 이곳 해안으로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20명 가운데 11명은오후 2시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5km정도 떨어진 강릉시 강동면 청학산 정상부근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잔당 가운데 한명인 31살이 강수는 인근 지역에서 생포되고 8명이 현재 계속 군경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숨진 채 발견된 11명은 침투조가 아닌 승무원으로 추정되며, 비무장의 광부복장으로 머리에 총살을 입고 있어서 자살했거나 도주한 잔당들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체발견에 앞서 오전 10시 20분쯤 청학산 부근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 교전으로 한때 오인이 됐지만 이때 11명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5_6172.html)

<<처음엔 무장간첩과 군경의 교전소리로 알려졌던 이 총성은 간첩들이 자살하면서 낸 소리로 밝혀졌습니다.

● 현장목격 장병: 오전 중에 총성을 들었고 저희들은 교전중인 걸로 알았는데 교전중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라는 것을 올라와서 확인했습니다.

● 기자: 현장에는 수류탄 2발과 권총 1자루가 발견 되었습니다.

군경은 이들 무장간첩이 궁지에 몰리자 수류탄 자폭과 권총 자살 중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당한 것으로 보고 계속 현장 주변을 위주로 매복과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6_6172.html)

● 앵커: 이번 동해안 침투 간첩단 가운데 유일하게 생포된 31살 이강수는 잠수함 승무원이었으며 침투 간첩은 모두 20여명이라고 밝혔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7_6172.html)

당초 주민들이 신고한 지점들이 말해주듯이 침투한 간첩들은 최초 강동면 임곡 2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 산등성이를 따라 자살한 잠수정 승무원들과 아직 검거되지 않은 일당, 즉 공작원들 2패로 나뉘어 태백준령으로 도주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8_6172.html)  



● 신상길 준장(합참 작전차장): 금일 17시경에 육군 68사단 173연대 수색병에 의해 최초 침투지점으로부터 서남방 5km 떨어진 청학산 부근에서 북괴 무장간첩 11명이 자폭한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1명을 생포, 조사 중이며 우리 軍은 나머지 잔당을 계속 추적 중에 있습니다.

● 기자: 또 생포된 간첩의 신원은 최종적으로 인민 무력부 정찰부 소속 이강수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9_6172.html)

● 앵커: 북한 잠수함이 발견되고 나서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3시간 반이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0_6172.html)

● 기자: 오늘 발견된 잠수함은 북한이 지난 86년 기존의 상어급소형 잠수함을 변경해 자체 개발한 것입니다.

비정규전이나 특수 공작용으로 만들어진 이 잠수함은 길이가 34m, 폭이 3.8 m이고 물위에서는 7노트, 수중에서 12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특히 물위에서보다 물속에서 속도가 훨씬 빨라 침투에 용이하다는 것이 이 잠수함의 큰 특징입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 잠수함이 원산에서 발진할 경우 강릉까지는 4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1_6172.html)

부산 청사포항 무장간첩선 격침사건 등 7∼80년대에도 무장 공작원의 도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70년 이래 모두 3백여 건의 대남 침투 사례가 있었습니다.

한해에 10여건 꼴입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3_6172.html)

● 기자: 새벽 1시 35분 5km가량을 급히 달려 이진규氏는 강동파출소에 도착했고 잠수함의 위치를 경찰에 알렸습니다.

● 이진규氏(최초 신고자): 신고를 해야 되겠다고 돌고래 같은 물체가 있는걸 보니제가 잠수함은 보지도 못했는데 잠수함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3_6172.html)

자, 위의 보도대로 1980년대에도 일년에 10 여건 북한군 침투 사실일진대, 광주사태 때만 침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위의 뉴스는 무장간첩단의 침투 저지를 위해 해안경찰서가 얼마나 큰 기여를 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김영택 기자가 광주에서 본 복면부대가 출현하기 전에 먼저 목포에 출현하여 해안경찰서를 파괴한 사건을 조갑제 기자가 목격할 수 있었는지 묻고 싶다. 

그 사건을 목포 주재 박홍서 조선일보 기자가 목격하였으며, 바로 위의 문건은 당시 박 기자가 본사에 송고한 취재일지이다.  단 한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던 목포에 백 명 정도의 복면부대가 출현하여 해안경찰서를 파괴할 필요가 무엇이었겠는가?  이처럼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광주사태의 큰 그림에는 잠수함을 이용하여 목포로 침투한 사건도 포함되어 있으며, 조갑제 기자가 그가 목격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던 사건이라고 단정지을 때 반론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위의 뉴스동영상은 단 몇시간의 사건 진행과정만을 보여주나 51일간의 대간첩작전 전모는 http://cafe.daum.net/issue21/5304/110 에서 영화로 볼 수 있으며, 아래의 동영상은 위 뉴스 영상물의 북한군 11명 자폭 장면을 후에 보완된 사실을 근거로 영화로 재연한 장면이다.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광주사태 바로 알기
질문 포인트

* 누가 광주사태의 주동세력이었는가?
* 북한군 광주 침투 방법에 대하여 탈북자들은 무어라고 증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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