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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대령과 신윤희 중령
 

  항간에는 12.12사태 발생 당시 장세동 대령(30경비단장, 경복궁 위치)이 김진영 대령(헌병대 33경비단장, 필동 수경사 외곽에 위치)에게 무장병력을 주면서 총장공관에 가서 해병대에 포위돼 있는 33헌병대를 구출해오라고 시켰다는 낭설이 있었다.  2005년의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김진영 대령이 30경비단을 향해 질주하는 탱크 앞을 막아서서 감언이설로 설득하여 탱크를 회군시켰다는 또 다른 허구가 들어 있다. 

  1994년 7월 1일 서울지검 918호 검사실은 위의 장세동과 김진영뿐만 아니라, 당시 수경사 전차대대장으로 그 반대편 입장에 있었던 차기준 중령(육사 21기)까지 불러 신문하였다.  그 신문 결과를 살피면 항간의 낭설 및 MBC 드라마 제5공화국 허구는 사실이 아님이 확인된다.  김진영 대령은 공관 앞에 동원된 부대와 부대 사이에 오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총격전을 위험을 무릅쓰고 막은 후 30경비단으로 돌아와보니, 그 사이에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에 의해 해임되어 있었으며, 자기를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장태완 사령관 명령으로 현저동에 있던 수경사 전차대대 전차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광화문 네거리를 통과하여 필동으로 달리는 소리를 듣고 더욱이나 긴장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장태완 사령관 수하의 전차들이 장세동 대령이 있는 쪽을 향하여 포를 쏘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MBC 드라마의 허구처럼 김진영 대령이 목숨을 걸고 장태완 사령관측 탱크들을 막아섰기 때문이 아니라, 장태완 장군의 무모하고 위험한 명령에 그 부하들이 복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경사 전차대대장이 차기준 중령이었는데, 그가 거느리는 전차들이 중대단위로 각 부대에 분할 배속되어 있었다.  그 상황을 쉬운 말로 표현하면 차 중령 휘하의 전차들이 장태완 장군 진영에도 장세동 대령의 30경비단에도 있었다. 만일 장태완 장군 명령대로 포를 발사하면 결국 30경비단에 있는 자기 부하들이 피를 흘리게 되니 차 중령으로서는 차마 그 무모한 명령에 빨리 복종할 수 없어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수겅사 소속이었던 신윤희 중령도 장태완 장군의 명을 따를 수 없었던 입장은 차기준 중령의 상황과 비슷했다.  소설가 천금성은 그의 소설 신군부 주역들의 ‘무용담’ 통해 본 12·12 그날 밤, 최규하의 진실에서 "전 본부장은 수경사 헌병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과 특전사 최세창 3여단장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장태완과 정병주 두 사령관을 제압하라는 것이었다"고 주장한 바 이것은 사실 성립이 불가능한 허구이다.  우선 신윤희 중령의 직속상관이 장태완 장군이 아니라, 그 전날 장군 진급 통보를 받은 조홍 대령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두환 본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차상급자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으로부터 받았다. 이렇듯 천금성의 소설은 12.12 사건의 실제 사실 및 당사자들의 실제 상황과 천양지차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마치 천금성이 사실인양 주장하는 이 소설의 허구를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12.12사건이 우발적 사건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가름하는 잣대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윤희 당시 수경사 헌병 부단장 입장에서 이 사건의 발단은 이날 저녁 장태완 당시 수경사 사령관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받은 명령이었다. 장태완 장군은 신윤희 중령에게 “정승화 총장의 진급에 불만을 품은 우경윤과 권정달 대령 등이 정승화를 불법납치했다”며 총장공관 지역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윤희 중령은 헌병 1개 소대를 인솔하여 총장공관으로 출동했다.  그 사이 장태완이 전차로 30경비단을 공격하겠다며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자서전 12.12쿠데타와 나에서 기술하듯이, 장태완은 수경사에 소집된 전 장교들에게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사살하라. 현재 30경비단에서 반란을 모의하는 자들의 명단을 발표하니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 방송국 및 각 검문소에 병력을 증강하라. 모든 전차 및 대전차 유도탄(TOW), 3.5인치 로케트 등 모든 화포는 탄약상자를 개방하여 차량에 탑재하고 출동에 대기하라. 모든 야포는 경복궁을 조준하라”고 명령했다.

  수경사 30경비단은 대통령 경호부대였다. 30경비단에 전차포와 모든 포병을 동원하여 무차별 포격을 가하라는 장태완의 명령은 대통령을 공격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장태완은 대통령 납치까지 시도하였는데, 그의 이런 일연의 행동들은 불법행위요 누군가가 나서서 저지해야만 하는 위험한 사태였는데, 이런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13일 새벽 3:30분까지 9시간 동안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승화가 대통령 시해 내란사건에 관련한 피의자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승화 연행에 이런 식으로 반발했다는 것은 장태완 스스로 자신이 김재규-정승화 편에 서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이 김재규-정승화 편에 서서 명령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나타냈을 때 그의 부하들은 순순히 그 부당한 명령에 따라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밤 9시부터 장태완의 행동을 지켜본 대다수의 수경사 장교들은 그들의 사령관 장태완의 무모하고 정신 나간 행동, 즉 자칫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행동에 대해 항명하거나 반기를 들었는데, 그의 자서전 175쪽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경복궁 포격명령을 받은 구정희 야포단장은 "사령관의 명령이니까 모든 포를 경복궁에 조준해 두겠지만 포격은 어렵다. 야포는 피아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시가전에서는 무용지물이 아니냐, 더구나 30경비단을 목표로 사격을 하려면 관측사격이 이뤄져 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에는 광화문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은 물론 민간인 피해가 말도 못할 정도로 클 텐데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몇몇 장교들은 신윤희 중령에게 헌병대에서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냐며 호소하였다.

  대다수 부하들의 반대와 만류에도 장태완은 아랑곳 하지 않고 30경비단과 합수부에 대한 공격명령을 고집했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 그는 수경사 전 장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차를 비롯하여 전장병은 전투조로 편성하라. 목표는 30 경비단과 보안사령부다. 공격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지금 즉시 공격개시선으로 전개하라. 출발은 내가 선도한다.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편성하여 모든 포를 총동원하여 양개 목표에 대해 집중사격 을 가한다. 역모자들을 포획 또는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하라.”  이때서야 윤성민 참모차장이 장태완의 무모함을 깨닫고 만류하기 시작했고, 이희성 중정부장서리도 적극 나서서 만류했다. 이에 대해 장태완은 이렇게 반응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란 말이냐, 이 제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나는 돌격한다.” 그리고 모든 병력을 아스토리아 호텔 앞으로 전지배치시켰다 (장태완, 12.12쿠데타와 나 186-8쪽).

  차상급자 장태완 장군의 명령을 받고 고심하던 신윤희 중령에게 장태완 체포 명령을 내린 이는 그의 상급자 조홍 대령이었다. 새벽 3시, 신윤희가 이끄는 체포조가 사령관실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20여명의 무장병력이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신윤희는 이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4명의 체포조를 데리고 사령관실로 갔다. 이 때 하소곤 소장이 권총을 빼들고 대항하려다 체포조가 발사한 총탄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정작 장태완은 아무런 반항 없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새벽03시30분이었다.

  1996년 11월 4일 서울고법 제9회 공판에서 검사는 김진영을 증인으로 불러 항간에 떠돌던 미확인 설을 인용하며 추궁을 했는데, 이때 김진영은 이렇게 진술했다.

30경비단은 대통령 방호부대다. 설사 수경사령관이 공격해 오더라도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 청와대 울타리 내부 경비는 55대대 (당시 임재길 중령, 육사22기)가 담당한다. 55대대의 모체부대는 30경비단이다. 외곽경비는 나머지 30경비단이 담당한다.외곽과 내곽이 뚫리면 마지막으로 경호실 경호관들이 대통령을 보호한다. 30경비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그의 예하 부대인 55대대가 경비하는 곳을 향해 진군해와도 그 예하인 55대대 대대장은 상관을 상대로 방어를 해야 한다. 여기에 하극상이란 있을 수 없다.

12월 12일 오후 4시경, 장세동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에 30단에 장군 몇 분이 오시게 되어 있다.장군들에 대한 시중을 병사들에게 맡기기도 좀 뭣하다. 차나 마신다고 하니 인사도 드릴 겸해서 나와 함게 안내하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전화를받고 나는 6시에 30경비단 단장실로 갔다. 어느 장군이 오는지, 왜 오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들은 바 없었다. 30경비단장실에는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가 앉아 그날 끝난 장군 진급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군세계에서 장군들의 진급소식은 취대의 관심사였다. 그 후 다른 장군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6시30분 경, 장세동이 장군들에게,"합수부장이 대통령 보고사항이 있어서 좀 늦는다"는 전갈을 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으로부터 받은 전화내용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늦겠다는 전갈을 받은 장군들은 장세동에게 "뭐 먹을 것 좀 없나, 있으면 좀 가져오지" 하여 초밥을 맥주와 함게 구해드렸다. 7시40분경 장세동이 허화평으로부터 받은 또 다른 전화내용을 장군들에게 알렸다." 정승화가 10.26과 관련하여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격이 있었다. 대통령 재가는 이에 관한 것이다."

이 전갈을 들은 장군들은 웅성웅성하며 놀라고 긴장했다. 곧이어 당번병 방으로 걸려온 전화를 장세동이 직접 받았다. 전화를 받은 장세동이 나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총장공관으로 갔던 33헌병대가 해병대 헌병에 포위되어 자칫 아군끼리의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걱정을 했다. 일단 총을 쏘면 다음부터는 전쟁심리가 발동되어 걷잡을 수 없는데 어찌 해야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서종철이 참모총장을 할 때 전숙부관을 했기에 총장공관과 그 주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총장공관 경비는 본부사령이 관장하며,당시 본부사령은 육사 12기 황관영 장군으로, 나와는 월남에서 같은 연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친숙해있던 사이였다. 나는 서종철 총장의 부관을 오래 했기 때문에 많은 장군들과 잘 알고 지냈다.장세동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당시 30경비단에서 이런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 밖에 없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 때 장세동은 장군들을 모셔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장세동: "절박한 상태다. 누군가가 막아야 한다. 당신이 좀 나가는 게 어떠냐?"

김진영: "그래야지요."

장세동: "손발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당신이 부대에 돌아갈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우리 5분대기조를 데려가는 게 어떠냐?"

김진영: "그러지요 저는 그냥 혼자 가려 했는데요."

이렇게 하는 데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급하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깊이 따질 여유가 없었다.이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합법적인 수사관들이 수사를 하러 갔는데 거기에서 충돌이생겼다면 이는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서 연행이 합법적인 것이고, 대통령에게도 보고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면 아주 쉽게 해결될 것이다."

총격이 벌어지는 살벌한 지역에 대령계급을 달고 혼자 간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8시30분 경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최세창과 장기오가 "비상이 걸렸으니 부대로 가봐야겠다"며 일어섰고, 나머지 장군들도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대장악을 잘 하고 있으라는 당부를 하면서 전두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장군들이 부대출동을 결심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놀라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하를 챙겼을 뿐이다. 나는 5분대기조를 인솔하여 총장공관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거기에는 본부사령실 5분대기조 40여명, 수경사 헌병, 해병대 헌병 등이 어지럽게 혼재해 우왕좌왕 했다. 공관입구에는 해병대가 엎드려쏴 자세로 총구를 높이 올린 채 "접근하면 쏜다" 식으로 협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검찰측은 이를 놓고 김진영이 장세동의 명령에 따라 5분대기조를 이끌고 총장공관으로 간 것이 전투를 하기위해 출동한 것이라고 몰고 갔다. 그러나 장세동은 육사 16기, 김진영은 17기로 1년 선후배 관계이지만 군에서는 똑같이 30단장이요, 33단장이었다. 더구나 김진영은 참모총장까지 했던 사려깊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남이 지휘하는 5분대기조를 가지고 살상을 수반할 전투에 참가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다. 더구나 김진영과 장세동은 총장공관에 얽혀있는 부대들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전투를 하려면 적의 상황부터 파악해야 한다. 전투의 목표는 이기는 것이다. 작전지역의 상황도 모르고,상대병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의 부대를 가지고 살상을 수반하는 전투를 하러가는 영관급 장교는 없다. 그는 33헌병대를 구출하러 간 것이 아니라 단지 오해로 인한 군끼리의 총격을 오해를 풀어줌으로써 중단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간 것이다. 이는 그가 인솔했던 5분대기조(80명) 인솔장교에게 내린 명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절대로 실탄을 지급하지 말 것, 공관에 진입하지 말 것, 승차상태에서 단국대 정문 앞에 대기할 것."  이 명령은 끝까지 시행되었다.

  몸집이 우람한 김진영은 혼자서 공관입구로 걸어갔다. 이 때 오상사라는 낯 모르는 군인을 만나 "여기 있는 병력은 모두 우군이다. 북에서 침투한 사람들이 아니다. 해병대 경비병이 위협사격을 하고 있으니 가서 중지시켜 보라"고 했다. 그 오상사는 정문으로 걸어가 해병을 지휘하는 중사에게 김진영의 말을 그대로 전했고, 이로써 위협사격은 중지되었다.

  판단이 빠른 김진영은 황관영 장군이 해병대 사령관 공관으로 갔을 것이라고 예측하여 육군총장공관위 정문초소로 가서 해병대 사령관 공관으로 전화를 걸어 육군 선임장교를 바꾸어 달라 하여 황관영 장군과 통화를 했다. 해병대 헌병들이 살벌하게 지키고 있는 정문초소에서 총장연행의 배경을 황장군에게 말하면 해병병사는 정문초소에서 총장연행의 배경을 황장군에게 말하면 해병 병사들이 자극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는 황관영에게 30단장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즉시 전화를 해서 상황을 파악해보라 말했다.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황관영에게 전화를 했다. 상황파악이  다 되었느냐고 묻고, 33헌병대도 포위돼 있으니 잘 보호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에 황관영은 상황파악이 다 되었으니 염려하시지 말라했다. 이것으로 상황은 종료 되었다,

  이 때 수경사 헌병단 신윤희 중령을 만났다. 신중령은 "장태완 사령관이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벌건 상태로 제게 무조건 공관으로 쳐들어 가서 총을 쏘아 적을 소탕시키라고 꾸짖는데 입장이 아주 곤란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김대령은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신중령은 "제가 자제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군요"라고 대답했다.

  30경비단으로 돌아와 보니 김진영은 장태완에 의해 해임당해 있었고, 사살명령까지 내려져 있었다. 그가 지휘하던 33경비단 1,200명은 장태완이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 헌병단도 1,200명이었다. 장세동이 지휘하는 30경비단 1,000명을 제외한 모든 병력이 장태완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장태완이 장악한 전차 2개 중대에는 전차 24대, 장갑차 50여대가 있었다. 포병단에는 토우 미사일 23문, 발칸포 100여문, 무반동총 등 대단한 화력이 있었다. 이는 훗날 장태완이 그가 장악했던 병력이 100명 정도였다고 했던 주장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이어 김진영은 변호인 질문에 따라 이렇게 술회했다.

12.12 이후 장태완은 예편해 있었다. 나는 그와 여러차례 만났다. 장태완은 12.12 때 그가 병력을 동원한 것을 후회했다. 합수부가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정의로운 애국의 길이었다고도 말했다. 장태완을 한국전산회사 사장으로 근무시켜 걱정 없이 살도록 배려해준 것에 대해 장세동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여 전해준 일이 있다. 그리고 장태완이 심근경색증을 앓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경비를 대주어서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게 해준데 대해 고맙다고 했고, 또 이 고맙다는 이야기는 장태완이 여러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안다.

실로 장태완이 예편후 장세동 등의 도움으로 한국전산회사 사장으로 근무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일 그가 참으로 장세동과 노태우를 반란군으로 여겼다면 예편후 십여년간 그들의 신세를 지며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을까?  12.12사태 때의 사건들에 대한 그의 관점은 그의 처세술만큼 변덕스러웠던 것일까.  

  이날 채동욱 검사는 김진영이 장세동의 명령을 받고 해병에게 포위돼 있는 33헌병대를 구출하려고 무장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지 않았느냐, 왜 장태완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느냐 등 군대상식에도 어긋나고, 고급장교에게 묻기에는 유치한 질문으로 문제삼으려 했지만 김진영의 대답은 일목요연하게 일관돼 있었다.  그는 "검사가 자꾸 진돗개 하나를 거론하는데 진돗개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상 징후가 있으면 연대장도 발령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검사는 김진영에게 이렇게 물었다. "증인은 참모총장까지 한 사람이다. 당신이 총장으로 있을 때 만일 33경비단장이 당신이 12.12에 취했던 조치를 취했다면 용서가 되겠는가?" 이에 대해 김진영은 충분히 이해되는 사정이라고 대답했다.

  김진영을 꺽지 못한 검사는 나중에 이렇게 쏘아 붙였다: "12.,12 사건 당시 30경비단 반란 지휘부의 일원으로 33헌병대를구출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이끌고 총장공관으로 출동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한 혐의로 이 사건의 피고인이 될 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피고인들에게 유리하게 증언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변호인이 부적당한 신문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판장은 이의를 기각했다. 그리고 김진영은 사실대로 답변했을 뿐이라고 받아쳤다. 검사가 "장태완에 의해 사살령이 내려졌다 해도 부대로 복귀하는 게 도리가 아니냐"고 추궁했다. 이에 김진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나도 부대에 가려고 장군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섰다. 그런데 방안에 있던 최고 고참인 노태우 장군이 상황이 상황이 많이 악화돼 있으니 일단 전화를 해보고 가라 했다.그래서 부대에 전화를 했더니 작전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단장이 해임되고 부단장이 대리하고 있습니다, 단장님에 대한 사살령이 내려져 있어 오시면 사살됩니다. 이어서 북악산 CP지휘소로 전화를 다시 했다. 3개 중대가 배치돼 있는 지휘소였다. 전화당번이 전화를 받더니 군수과장이 3개 중대를 인솔하여 부대를 떠나고 없다며, 더 이상 단장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렇듯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나는 부대에 갈 수 없었다.

추천 자료:  `12.12`…"당시 장교들 대부분 장태완 사령관에 불복종…그들 중 하나회 장교 없어"


* 윗글은 미완성 글이며 나중에 업데이트될 예정임.

  

12.12사태 바로 알기
질문 포인트

* 김진영 대령이 장태완 장군측 탱크들을 목숨을 걸고 막아섰다는
MBC 드라마 제5공화국 8회는 어째서 허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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