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토론 자료실/ 칼럼
전두환 비자금은 없었다
독재자 김영삼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를 악랄하게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시장전제주의의 농산물 개방을 우리나라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멀리 내다보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문민 독재자 김영삼씨의 차이였다. 김영삼씨의 경제관은 농업 경제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다른 한국 대통령들처럼 그도 농사 외에는 경제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문제는 그의 농촌 개량 사업은 10조억원이라는 천문학적 돈을 흔적도 없이 날리고 농가는 농가대로 빚더미 위에 앉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문민 독재자 김영삼씨와 달리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국 농업의 미래를 위해 연해주 50만평을 한국의 농토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조용히 추진하고 계셨다. 마치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도 민간 공공사업 프로젝트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듯 전두환 전 대통령도 한국이 러시아 연해주에 진출할 수 있는 최적기에 대농장 프로젝트를 가지고 계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몫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조국에 바쳤듯이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연해주 농장이라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연해주 농장 프로젝트는 우리 민족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김영삼씨 정권 말기에 우리나라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치면 왜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는가? 그 첫번째 이유는 식량자급자족율이 30%밖에 안되는 우리나라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노무현의 반미 외교로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있는 정도에 그치지만 미친 강정구 교수 주장대로 "미국이 대한민국의 주적"이 되는 현실이 닥친다고 하자. 그것은 더 이상 미국이 한국에 식량 수입을 허락해 줄 이유가 없게 됨을 의미한다.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물려주신 산업기술로 우리나라가 먹고 살고 있지만 10년 내에 한국의 전자산업마저 중국에 추월되는 상황이 벌어져도 우리나라는 외화벌이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외화벌이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식량 수입을 할 외화가 고갈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그런 경제위기가 닥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이 역시 필요한 것이었다. 식량 자급자족--이것은 민족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그러기에 속 좁은 김영삼씨가 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해주 프로젝트를 방해하였는지 우리는 궁금해지는 것이다.

설사 그런 경제 위기나 식량 위기가 미래에 닥칠 염려가 전혀 없다 하더라도
김영삼씨가 연해주 프로젝트를 방해한 것을 국민이 안타까워할 날이 머지않아 올 듯하다. 지금처럼 대책없이 농산물 개방 시대가 오면 너무 어처구니 없게 놓쳐버린 연해주 땅을 아쉬워하지 아니하겠는가. 인구 오천 만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연해주 농장이 없으면 신자유주의 경제가 본격화되는 시대에 한국 농업은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선견지명을 가진 어른에게 돌을 던졌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단 일원도 자기를 위해 사사로이 정치자금을 사용하신 일이 없어 보인다. 정치자금이 입금되는 대로 공금으로 관리되어 왔다는 사실은 본인은 한푼도 만져본 일이 없음을 말한다. 전두환이 누구던가? 그가 군 고위장교였을 때 대쪽같은 청렴결백함으로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전두환은 부하들을 돕는데 헌신적이었던 지휘관이었다. 진급이 안되는 부하들의 진급을 도와주기도 하였으며, 부하 집에 냉장고가 없으면 자기 집 냉장고를 갖다주는 상명하애의 귀감이었다.

그런 전두환이 군에서 청렴결백함으로 악명을 떨쳤던 것은 선물을 받지 않는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깨끗한 군인이었다. 그에게 상명하애의 은혜를 입은 부하들이 선물을 드리면 뇌물이라며 거절하는 그의 군기는 엄격하였다. 광주사태가 바로 그의 청렴결백한 인간성을 증명한다. 1980년 5월 18일 일어난 광주사태는 5월 15일 10만명이 시위한 서울역 회군이 점화한 불똥이 튀긴 것이었다. 아직 광주시민이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을 때 폭동 주동자 윤상원이 당시 서울대 영어교육과 3학년 심재철 등 서울 운동권으로부터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당시 심재철과 유시민 등도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국내 언론을 통해 들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유일하게 들었다면 5월 초에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인사를 짤막하게 한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당시 시위 근거를 외신 보도에 둔다. 그 주장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실제로 운동권이 외신을 확인한 시점은 1988년 광주사태 청문회 준비를 하였을 때였기에 1980년 5월에 외신을 보고 시위를 준비하였다는 주장은 엉터리다. 그럼에도 한가닥 진실이 있었다. 실제로 전두환이란 인물을 외국에서 주의깊게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광주시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함과 동시에 전두환 소장에게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라고 했으며, 전두환이 극구 사양하자 국무위원들이 적극 추대하였으며, 전두환 소장의 상관들이었던 전군지휘자들이 "전 장군 나라를 구해 달라는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오" 하며 호소하였다.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운동권은 광주학살의 원흉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980년 5월 22일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이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으로 광주사태가 보도되었기에 타임지 등에도 운동권 주장만 실려 있었다.

그럼에도, 1981년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이 제일 먼저 초대한 국빈이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미국은 오래전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 장성들 사이에 다음 대통령에 대하여 세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 시나리오는 당시 군 최고지휘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이 대권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선거를 통해 양김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세번째, 시나리오는 전두환 소장이 새 지도자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었다. 당시 양김씨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하 전혀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었으며, 서로 정승화씨가 자기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당시 미국의 한국통에 흐르고 있었던 세번째 시나리오에 대하여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운동권의 신군부 픽션 소설은 몹시 과장되어 있다. 12.12 사태 이후에도 전두환 소장 위로 기라성같은 장성들이 있었다. 여전히 군부 권력의 핵심은 육군본부 고위장성들에게 있었으며, 계급이나 보직으로 따지면 전두환은 군부 권력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한국통은 전두환이 급격히 새 지도자감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실제 계급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 소장보다 한참 높았으며,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 소장 사이에서 이희성 대장처럼 중립을 취하는 장성들도 있었지만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은 정승화 참모총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승화 장군 측이 정규육사 출신들에 대한 공격 신호로서 먼저 전두환 소장을 거세하려 하였을 때 군부는 그들이 전두환 소장 편에 서있음을 일치 단결하여 보여주었다. 심지어 전두환 소장을 체포하라고 장태완 장군이 보낸 헌병대장이 오히려 자기 부하에게 체포되는 사태를 가리켜 사람들은 12.12 사태라고 부른다.

이처럼 정승화 장군 진영에서 있었던 하극상은 본래 전두환 소장과 아무런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배경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당시 계급으로는 정승화 장군이 가장 높았으나 그는 두가지 이유로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첫째, 그가 김재규와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었다. 김재규의 범행 당시 그가 동행하였다는 점과 그 이후의 일연의 김재규 감싸기가 그런 의혹을 증폭시켰다. 둘째, 정승화 장군이 인사권을 쥐고 있던 당시 군부는 부조리가 심하였다. 따라서 진급을 원했던 장교들이 그 부조리에서 동떨어져 있을 수 없었으면서도 그 부조리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달랐다. 해방 후 일본군 등 외국군대 장교 출신들이 6개월 훈련받고 장교가 되다가 육사 제11기부터 4년제 육사가 시작되었는데, 11기에서 전두환이 군번이 가장 빨랐다. 그리고 같은 11기도 언제나 전두환을 상관으로 대하였는데, 북한군 혹은 북한 출신 육사생도들이 자기네만이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전히 남로당이 군부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던 시대에 반공 애국 정신의 귀감이 되기 위한 하나회의 역할은 몹시 소중하였으며, 그 지도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러면 전두환이 어떤 군인이었던가? 일본육사 포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가 다시 1954년에 미국 포병학교 유학을 갔다 왔듯이 5.16군사혁명에 즈음하여 미국 특전사 학교에 유학갔다온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공수부대 여단장 시절에 그는 별 달고 공중낙하 훈련 시범을 직접하는 유별난 장군이었다. 1977년~1978년 전방1사단장 시절에 그는 Two Star 가 아침 구보 훈련 때 선봉에 서는 장군이었다. 이웃 부대들에서는 구보 훈련 때 장교는 물론 고참 병장들도 열외된다. 그러나, 1사단 전두환 장군은 Two Star 가 선봉에 서니 아무도 열외될 수 없었던 그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동료 장교들은 그의 이러한 군인정신에 질리면서도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두 여중생 사고가 난 파주군이 바로 1사단 관할지역이었으며 1978년 전방 시골에서 전두환은 아침마다 사병들과 함께 뛰는 이름없는 장성이었다. 그러나, 연초에 처음으로 복한군 땅굴을 발견하는 등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8월에 보안사령관에 임명받았다. 그리고, 그가 보안사령관이 된지 두 달 만에 10.26 사태를 당하였다. 그리고,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신속하게 김재규를 체포하여 김재규의 쿠데타 기도를 차단하였다. 당시 김재규가 군부 실세였던 시대에 감히 아무도 낼 수 없었던 용기를 그는 보여주었던 것이다. 최규하 권한대행이 김재규의 쿠데타를 성공한 쿠데타로 간주하고 그의 지시대로 끌려다녔던 데 비해, 신속한 결단과 행동을 보여준 전두환 소장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졌으며, 그가 합수부장이 되었다.

몇해전 전두환의 이미지를 아주 나쁘게 그릴 의도로 5공화국을 소재로 제작된 드라마가 있었다. 아마 그 제목이 모래성이었던 듯하며 작가는 전두환의 이미지를 나쁘게 그리려고 애썼다. 그리고 전두환을 나쁜 이미지의 대머리로 묘사할 수록 드라마 인기는 올라갔다. 그럼에도 그 드라마를 마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전두환은 자기 스스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떠밀려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누가 전두환의 위치에 있었든 떠밀려 대통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실토하였다.

그러면, 왜 전두환이었는가. 여기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 때의 일을 상기해 보자. 그때 유시민 등 서울 운동권이 5월 22일로 예정되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분위기를 띠우기 위해 주동하였던 십만 명의 시위대가 남대문에 모였었는데, 시위 학생(?) 중에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이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내무부장관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훈계하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지만 빨리 민주화일정(최규하 대통령 하야 일정)을 발표하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주겠다." 대한민국 순경들을 시위 학생들이 잔혹하게 죽였는데도, 내무부장관이 시위주동자들 앞에서 굽신굽신거려야 했다. 이미 내무부의 치안 유지 능력은 상실되었으며, 폭력 시위 자제를 위해 내무부장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시위 주동자들의 일방적 요구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시위 주동자들은 내무부장관에게 빨리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서 하야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다그쳤다. 외교가 출신이요 민주주의 행정 전문가인 최규하 대통령은 지금 선거관리 준비 중이니 선거를 통해 대권을 계승해 달라고 양김씨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양김씨는 서로 자기가 차기 대통령감이라면서 각목들고 싸우면서도 둘이 한 목소리를 내어 선거고 뭐고 필요 없으니 당장 하야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선거로 차기 대통령을 정해 놓지 않고 무조건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차마 어떻게 내무부장관이 시위대의 압박대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 동의서를 써달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날 5월 15일에 내무부장관은 이 문제를 총리에게 총리는 다시 군부에 호소하였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군부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이제 내무부는 더 이상 치안 유지 능력이 없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나라의 위기를 군부가 모르는체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십시요. 이것이 당시 국무위원들의 입장이었다. 국무위원들이 군부의 개입을 호소하였으며, 전군 지휘관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그러면, 왜 전두환이 등장하였는가?

여기서 이희성 대장을 주목해 보자. 5월 18일 광주사태 문제가 처음에는 광주시장의 문제였다가, 광주시내 파출서들 대부분이 화염병에 파괴되자, 이 문제가 전라도 도지사의 문제가 되더니, 광주사람 정웅 장군의 초기 과잉 진압으로 이 문제가 내무부 문제로 확대되다가, 다음날부터 육군본부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광주사태가 일어난지 열흘 만에 광주사태를 진압한 지휘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었다. 이희성 대장과 전두환 소장은 어떤 관계였는가? 군화로 조인트를 까면 맞아야 하며, 죽으라면 죽는체 해야 하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였다. 이희성 장군은 전두환 장군이 오래동안 직속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기에 그 군기는 더욱 엄하였다.

여기서 이희성 장군과 전두환 장군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 위해 독립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과 광복군 박정희 중위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박정희 대통령이 그 바쁜 업무 중에도 지극히 보살피고 모셨던 분이 김학규 장군이었다. 광복군 지대장으로 모신 기간이 채 일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 상경하애의 돈독한 관계는 평생 유지되었다. 바로 그런 관계가 이희성 장군과 전두환 장군의 관계였다. 전두환 소장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이희성 장군 앞에서는 졸병이었다. 운동권에 의해 알려진 하극상의 이미지와는 달리 전두환은 상관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군인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위로 기라성같은 장성들이 있었지만 그를 지지하여 주었던 것이다.

광주사태의 초기 과잉진압은 광주사람 정웅장군이 광주시장과 전라도지사의 요청으로 하였던 것이요, 광주사태 제2기에 내무부 소관이 육군본부 소관으로 옮겨가자 광주사태 진압을 총지휘하신 분은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 대장이었다. 그리고, 총기를 폭도들이 탈취하지 못하게 하라는 육본의 지시를 무시한 책임을 물어 정웅장군을 예편시킨 이도 이희성 대장이었으며, 처음부터 광주사태는 전두환 소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분명히 당시 군부 권력의 실세는 이희성 대장이었는데도 운동권은 신군부 명단에 그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전두환 소장이 했다는 픽션 소설을 쓴다. 그러나 전두환 소장이 당시 군부 실세라는 이미지는 상당히 과장되었던 것이며, 신군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면 왜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떠올랐던가? 이 이야기는 다시 10.26 사태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국무위원들이 김재규의 성공한 쿠데타로 간주하고 체념하고 있었을 때 김재규를 체포하는 결단과 행동 때문에 그는 리더십 신임을 얻고 합수부장이 되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는 새에 힘의 중심이 그에게로 옮겨오고 있었다. 북한이 남한 대통령을 죽이려고 여러번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는 안보의 위기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최규하 권한대행이 난국을 헤쳐나갈 리더십을 아직 보여주지 않았던 때에, 정승화 장군도 또 다른 군부 실세 김재규도 올바른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았던 때에 리더십의 구심점이 필요하였었다.

그런데, 그 힘의 구심점은 육사 11기 중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었다. 1945년 해방 후 1979년까지 대한민국 국군은 일본군 등 외군군 장교 출신들이 지배했었다. 그러나 육사 8기가 1961년 5.16군사혁명 주축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독립정부 수립후 첫 기수였던 사실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군부 단합을 위한 새 구심점은 이제 정규4년제 첫 기수에서 나와야 했으며, 그 중에서도 군번이 가장 빨랐던 전두환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전두환은 군부 내에서 도덕적으로 검증을 거친 인물이었다. 민간사회에서도 요즘 이헌재 장관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장관들이 부정축재 의혹 때문에 낙마하고 있다. 그것이 군부에서도 사실이었다. 5.16군사혁명 때 군부가 박정희를 중심으로 단합하였던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장교 시절에 육영수 여사는 쌀독이 쌀에 떨어져 난감해하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래사람의 딱한 처지를 보면 월급 봉투를 그대로 꺼내 전해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성품 때문에 그러했다. 바로 그점을 전두환도 닮았었다. 그는 부하를 도와주는 일에 아주 열심이었으면서도 감사의 답례를 받지 않는 대쪽같은 청렴결백함 때문에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만일 우리나라에 전직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회수하는 국법이 있다면 양김씨가 제임 기간 중에 받은 정치자금도 모두 회수하라. 그래야 법이 공평한 것이다. 똑같은 정치자금인데, 왜 전두환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만 비자금이라고 부르는가? 생각해 보라.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대쪽같은 청렴결백함 때문에 악명을 떨쳤던 인물에게 비자금이 있을리 있겠는가?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김영삼씨와 운동권이 비자금이라고 부르는 정치자금의 성격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리고, 여기서 노태우의 정치자금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분리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노태우와 양김씨가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나쁜 것이었다면 나쁜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은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흔히 국제정치학 상식이 없는 이들은 5공화국은 양김씨 정부와 유사한 정부 정도로만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요즘 한류 열풍과 반비례하여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등 외국 대학교들에서 한국학과를 폐쇄시키는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은 외국 대학교들에서 한국학 설치 열풍이 불던 시기요 그때부터 한국을 배우러 오는 유학생들이 줄을 이었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는 선진국 학생들이 많았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노빠들의 착각과 달리 전두한 대통령 정부의 경제정책이 양김씨 경제정책보다 훨씬 선진국형 정책, 그리고 선진국에서도 배워갈 만한 가치가 있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합법적으로 그리고 무료로 기술을 이전해 오는 전략이 있었듯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5대양 6대주에 수출 시장을 여는 전략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전해 온 산업기술과 전두환 대통령이 열어놓은 수출 시장으로 먹고 살고 있다.

5공화국은 한마디로 세계 유수의 경제학 브레인들이 총집결하였던 정권이었다. 무엇이 국제 사회에서의 경제 전쟁을 위한 전두환의 전략이었던가? 그것은 누가 경제 브레인이며, 경제 브레인이 어디에 있는지름 묻는 것이었다. 당시 전두환을 포진하였던 독재자 김영삼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를 악랄하게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시장전제주의의 농산물 개방을 우리나라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멀리 내다보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문민 독재자 김영삼씨의 차이였다. 김영삼씨의 경제관은 농업 경제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다른 한국 대통령들처럼 그도 농사 외에는 경제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문제는 그의 농촌 개량 사업은 10조억원이라는 천문학적 돈을 흔적도 없이 날리고 농가는 농가대로 빚더미 위에 앉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문민 독재자 김영삼씨와 달리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국 농업의 미래를 위해 연해주 50만평을 한국의 농토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조용히 추진하고 계셨다. 마치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도 민간 공공사업 프로젝트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듯 전두환 전 대통령도 한국이 러시아 연해주에 진출할 수 있는 최적기에 대농장 프로젝트를 가지고 계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몫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조국에 바쳤듯이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연해주 농장이라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연해주 농장 프로젝트는 우리 민족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김영삼씨 정권 말기에 우리나라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치면 왜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는가? 그 첫번째 이유는 식량자급자족율이 30%밖에 안되는 우리나라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노무현의 반미 외교로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있는 정도에 그치지만 미친 강정구 교수 주장대로 "미국이 대한민국의 주적"이 되는 현실이 닥친다고 하자. 그것은 더 이상 미국이 한국에 식량 수입을 허락해 줄 이유가 없게 됨을 의미한다.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물려주신 산업기술로 우리나라가 먹고 살고 있지만 10년 내에 한국의 전자산업마저 중국에 추월되는 상황이 벌어져도 우리나라는 외화벌이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외화벌이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식량 수입을 할 외화가 고갈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그런 경제위기가 닥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이 역시 필요한 것이었다. 식량 자급자족--이것은 민족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그러기에 속 좁은 김영삼씨가 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해주 프로젝트를 방해하였는지 우리는 궁금해지는 것이다.

설사 그런 경제 위기나 식량 위기가 미래에 닥칠 염려가 전혀 없다 하더라도
김영삼씨가 연해주 프로젝트를 방해한 것을 국민이 안타까워할 날이 머지않아 올 듯하다. 지금처럼 대책없이 농산물 개방 시대가 오면 너무 어처구니 없게 놓쳐버린 연해주 땅을 아쉬워하지 아니하겠는가. 인구 오천 만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연해주 농장이 없으면 신자유주의 경제가 본격화되는 시대에 한국 농업은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선견지명을 가진 어른에게 돌을 던졌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단 일원도 자기를 위해 사사로이 정치자금을 사용하신 일이 없어 보인다. 정치자금이 입금되는 대로 공금으로 관리되어 왔다는 사실은 본인은 한푼도 만져본 일이 없음을 말한다. 전두환이 누구던가? 그가 군 고위장교였을 때 대쪽같은 청렴결백함으로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전두환은 부하들을 돕는데 헌신적이었던 지휘관이었다. 진급이 안되는 부하들의 진급을 도와주기도 하였으며, 부하 집에 냉장고가 없으면 자기 집 냉장고를 갖다주는 상명하애의 귀감이었다.

그런 전두환이 군에서 청렴결백함으로 악명을 떨쳤던 것은 선물을 받지 않는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깨끗한 군인이었다. 그에게 상명하애의 은혜를 입은 부하들이 선물을 드리면 뇌물이라며 거절하는 그의 군기는 엄격하였다. 광주사태가 바로 그의 청렴결백한 인간성을 증명한다. 1980년 5월 18일 일어난 광주사태는 5월 15일 10만명이 시위한 서울역 회군이 점화한 불똥이 튀긴 것이었다. 아직 광주시민이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을 때 폭동 주동자 윤상원이 당시 서울대 영어교육과 3학년 심재철 등 서울 운동권으로부터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당시 심재철과 유시민 등도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국내 언론을 통해 들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유일하게 들었다면 5월 초에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인사를 짤막하게 한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당시 시위 근거를 외신 보도에 둔다. 그 주장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실제로 운동권이 외신을 확인한 시점은 1988년 광주사태 청문회 준비를 하였을 때였기에 1980년 5월에 외신을 보고 시위를 준비하였다는 주장은 엉터리다. 그럼에도 한가닥 진실이 있었다. 실제로 전두환이란 인물을 외국에서 주의깊게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광주시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함과 동시에 전두환 소장에게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라고 했으며, 전두환이 극구 사양하자 국무위원들이 적극 추대하였으며, 전두환 소장의 상관들이었던 전군지휘자들이 "전 장군 나라를 구해 달라는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오" 하며 호소하였다.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운동권은 광주학살의 원흉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980년 5월 22일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이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으로 광주사태가 보도되었기에 타임지 등에도 운동권 주장만 실려 있었다.

그럼에도, 1981년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이 제일 먼저 초대한 국빈이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미국은 오래전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 장성들 사이에 다음 대통령에 대하여 세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 시나리오는 당시 군 최고지휘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이 대권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선거를 통해 양김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세번째, 시나리오는 전두환 소장이 새 지도자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었다. 당시 양김씨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하 전혀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었으며, 서로 정승화씨가 자기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당시 미국의 한국통에 흐르고 있었던 세번째 시나리오에 대하여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운동권의 신군부 픽션 소설은 몹시 과장되어 있다. 12.12 사태 이후에도 전두환 소장 위로 기라성같은 장성들이 있었다. 여전히 군부 권력의 핵심은 육군본부 고위장성들에게 있었으며, 계급이나 보직으로 따지면 전두환은 군부 권력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한국통은 전두환이 급격히 새 지도자감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실제 계급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 소장보다 한참 높았으며,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 소장 사이에서 이희성 대장처럼 중립을 취하는 장성들도 있었지만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은 정승화 참모총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승화 장군 측이 정규육사 출신들에 대한 공격 신호로서 먼저 전두환 소장을 거세하려 하였을 때 군부는 그들이 전두환 소장 편에 서있음을 일치 단결하여 보여주었다. 심지어 전두환 소장을 체포하라고 장태완 장군이 보낸 헌병대장이 오히려 자기 부하에게 체포되는 사태를 가리켜 사람들은 12.12 사태라고 부른다.

이처럼 정승화 장군 진영에서 있었던 하극상은 본래 전두환 소장과 아무런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배경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당시 계급으로는 정승화 장군이 가장 높았으나 그는 두가지 이유로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 첫째, 그가 김재규와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었다. 김재규의 범행 당시 그가 동행하였다는 점과 그 이후의 일련의 김재규 감싸기가 그런 의혹을 증폭시켰다. 둘째, 정승화 장군이 인사권을 쥐고 있던 당시 군부는 부조리가 심하였다. 따라서 진급을 원했던 장교들이 그 부조리에서 동떨어져 있을 수 없었으면서도 그 부조리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달랐다. 해방 후 일본군 등 외국군대 장교 출신들이 6개월 훈련받고 장교가 되다가 육사 제11기부터 4년제 육사가 시작되었는데, 11기에서 전두환이 군번이 가장 빨랐다. 그리고 같은 11기도 언제나 전두환을 상관으로 대하였는데, 북한군 혹은 북한 출신 육사생도들이 자기네만이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전히 남로당이 군부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던 시대에 반공 애국 정신의 귀감이 되기 위한 하나회의 역할은 몹시 소중하였으며, 그 지도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러면 전두환이 어떤 군인이었던가? 일본육사 포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가 다시 1954년에 미국 포병학교 유학을 갔다 왔듯이 5.16군사혁명에 즈음하여 미국 특전사 학교에 유학갔다온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공수부대 여단장 시절에 그는 별 달고 공중낙하 훈련 시범을 직접하는 유별난 장군이었다. 1977년~1978년 전방1사단장 시절에 그는 Two Star 가 아침 구보 훈련 때 선봉에 서는 장군이었다. 이웃 부대들에서는 구보 훈련 때 장교는 물론 고참 병장들도 열외된다. 그러나, 1사단 전두환 장군은 Two Star 가 선봉에 서니 아무되 열외될 수 ? 그 군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동료 장교들은 그의 이러한 군인정신에 질리면서도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두 여중생 사고가 난 파주군이 바로 1사단 관할지역이었으며 1978년 전방 시골에서 전두환은 아침마다 사병들과 함께 뛰는 이름없는 장성이었다. 그러나, 연초에 처음으로 복한군 땅굴을 발견하는 등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8월에 보안사령관에 임명받았다. 그리고, 그가 보안사령관이 된지 두 달 만에 10.26 사태를 당하였다. 그리고,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신속하게 김재규를 체포하여 김재규의 쿠데타 기도를 차단하였다. 당시 김재규가 군부 실세였던 시대에 감히 아무도 낼 수 없었던 용기를 그는 보여주었던 것이다. 최규하 권한대행이 김재규의 쿠데타를 성공한 쿠데타로 간주하고 그의 지시대로 끌려다녔던 데 비해, 신속한 결단과 행동을 보여준 전두환 소장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졌으며, 그가 합수부장이 되었다.

몇해전 전두환의 이미지를 아주 나쁘게 그릴 의도로 5공화국을 소재로 제작된 드라마가 있었다. 아마 그 제목이 모래성이었던 듯하며 작가는 전두환의 이미지를 나쁘게 그리려고 애썼다. 그리고 전두환을 나쁜 이미지의 대머리로 묘사할 수록 드라마 인기는 올라갔다. 그럼에도 그 드라마를 마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전두환은 자기 스스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떠밀려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누가 전두환의 위치에 있었든 떠밀려 대통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실토하였다.

그러면, 왜 전두환이었는가. 여기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 때의 일을 상기해 보자. 그때 유시민 등 서울 운동권이 5월 22일로 예정되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분위기를 띠우기 위해 주동하였던 십만 명의 시위대가 남대문에 모였었는데, 시위 학생(?) 중에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이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내무부장관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훈계하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지만 빨리 민주화일정(최규하 대통령 하야 일정)을 발표하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주겠다." 대한민국 순경들을 시위 학생들이 잔혹하게 죽였는데도, 내무부장관이 시위주동자들 앞에서 굽신굽신거려야 했다. 이미 내무부의 치안 유지 능력은 상실되었으며, 폭력 시위 자제를 위해 내무부장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시위 주동자들의 일방적 요구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시위 주동자들은 내무부장관에게 빨리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서 하야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다그쳤다. 외교가 출신이요 민주주의 행정 전문가인 최규하 대통령은 지금 선거관리 준비 중이니 선거를 통해 대권을 계승해 달라고 양김씨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양김씨는 서로 자기가 차기 대통령감이라면서 각목들고 싸우면서도 둘이 한 목소리를 내어 선거고 뭐고 필요 없으니 당장 하야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선거로 차기 대통령을 정해 놓지 않고 무조건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차마 어떻게 내무부장관이 시위대의 압박대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 동의서를 써달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날 5월 15일에 내무부장관은 이 문제를 총리에게 총리는 다시 군부에 호소하였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군부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이제 내무부는 더 이상 치안 유지 능력이 없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나라의 위기를 군부가 모르는체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십시요. 이것이 당시 국무위원들의 입장이었다. 국무위원들이 군부의 개입을 호소하였으며, 전군 지휘관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그러면, 왜 전두환이 등장하였는가?

여기서 이희성 대장을 주목해 보자. 5월 18일 광주사태 문제가 처음에는 광주시장의 문제였다가, 광주시내 파출서들 대부분이 화염병에 파괴되자, 이 문제가 전라도 도지사의 문제가 되더니, 광주사람 정웅 장군의 초기 과잉 진압으로 이 문제가 내무부 문제로 확대되다가, 다음날부터 육군본부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광주사태가 일어난지 열흘 만에 광주사태를 진압한 지휘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었다. 이희성 대장과 전두환 소장은 어떤 관계였는가? 군화로 조인트를 까면 맞아야 하며, 죽으라면 죽는체 해야 하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였다. 이희성 장군은 전두환 장군이 오래동안 직속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기에 그 군기는 더욱 엄하였다.

여기서 이희성 장군과 전두환 장군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 위해 독립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과 광복군 박정희 중위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박정희 대통령이 그 바쁜 업무 중에도 지극히 보살피고 모셨던 분이 김학규 장군이었다. 광복군 지대장으로 모신 기간이 채 일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 상경하애의 돈독한 관계는 평생 유지되었다. 바로 그런 관계가 이희성 장군과 전두환 장군의 관계였다. 전두환 소장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이희성 장군 앞에서는 졸병이었다. 운동권에 의해 알려진 하극상의 이미지와는 달리 전두환은 상관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군인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위로 기라성같은 장성들이 있었지만 그를 지지하여 주었던 것이다.

광주사태의 초기 과잉진압은 광주사람 정웅장군이 광주시장과 전라도지사의 요청으로 하였던 것이요, 광주사태 제2기에 내무부 소관이 육군본부 소관으로 옮겨가자 광주사태 진압을 총지휘하였던 분은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 대장이었다. 그리고, 총기를 폭도들이 탈취하지 못하게 하라는 육본의 지시를 무시한 책임을 물어 정웅장군을 예편시킨 이도 이희성 대장이었으며, 처음부터 광주사태는 전두환 소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분명히 당시 군부 권력의 실세는 이희성 대장이었는데도 운동권은 신군부 명단에 그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전두환 소장이 했다는 픽션 소설을 쓴다. 그러나 전두환 소장이 당시 군부 실세라는 이미지는 상당히 과장되었던 것이며, 신군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면 왜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떠올랐던가? 이 이야기는 다시 10.26 사태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국무위원들이 김재규의 성공한 쿠데타로 간주하고 체념하고 있었을 때 김재규를 체포하는 결단과 행동 때문에 그는 리더십 신임을 얻고 합수부장이 되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는 새에 힘의 중심이 그에게로 옮겨오고 있었다. 북한이 남한 대통령을 죽이려고 여러번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는 안보의 위기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최규하 권한대행이 난국을 헤쳐나갈 리더십을 아직 보여주지 않았던 때에, 정승화 장군도 또 다른 군부 실세 김재규도 올바른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았던 때에 리더십의 구심점이 필요하였었다.

그런데, 그 힘의 구심점은 육사 11기 중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었다. 1945년 해방 후 1979년까지 대한민국 국군은 일본군 등 외군군 장교 출신들이 지배했었다. 그러나 육사 8기가 1961년 5.16군사혁명 주축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독립정부 수립후 첫 기수였던 사실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군부 단합을 위한 새 구심점은 이제 정규4년제 첫 기수에서 나와야 했으며, 그 중에서도 군번이 가장 빨랐던 전두환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전두환은 군부 내에서 도덕적으로 검증을 거친 인물이었다. 민간사회에서도 요즘 이헌재 장관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장관들이 부정축재 의혹 때문에 낙마하고 있다. 그것이 군부에서도 사실이었다. 5.16군사혁명 때 군부가 박정희를 중심으로 단합하였던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장교 시절에 육영수 여사는 쌀독에 쌀이 떨어져 난감해하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래사람의 딱한 처지를 보면 월급 봉투를 그대로 꺼내 전해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성품 때문에 그러했다.  바로 그점을 전두환도 닮았었다. 그는 부하를 도와주는 일에 아주 열심이었으면서도 감사의 답례를 받지 않는 대쪽같은 청렴결백함 때문에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만일 우리나라에 전직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회수하는 국법이 있다면 양김씨가 제임 기간 중에 받은 정치자금도 모두 회수하라. 그래야 법이 공평한 것이다. 똑같은 정치자금인데, 왜 전두환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만 비자금이라고 부르는가? 생각해 보라.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대쪽같은 청렴결백함 때문에 악명을 떨쳤던 인물에게 비자금이 있을리 있겠는가?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김영삼씨와 운동권이 비자금이라고 부르는 정치자금의 성격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리고, 여기서 노태우의 정치자금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분리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노태우와 양김씨가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나쁜 것이었다면 나쁜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은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흔히 국제정치학 상식이 없는 이들은 5공화국은 양김씨 정부와 유사한 정부 정도로만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요즘 한류 열풍과 반비례하여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등 외국 대학교들에서 한국학과를 폐쇄시키는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은 외국 대학교들에서 한국학 설치 열풍이 불던 시기요 그때부터 한국을 배우러 오는 유학생들이 줄을 이었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는 선진국 학생들이 많았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었는가. 노빠들의 착각과 달리 전두한 대통령 정부의 경제정책이 양김씨 경제정책보다 훨씬 선진국형 정책, 그리고 선진국에서도 배워갈 만한 가치가 있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합법적으로 그리고 무료로 기술을 이전해 오는 전략이 있었듯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5대양 6대주에 수출 시장을 여는 전략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전해 온 산업기술과 전두환 대통령이 열어놓은 수출 시장으로 먹고 살고 있다.

5공화국은 경제 브레인 인재를 널리 구하는 정권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세계의 석학들로 구성된 두터운 경제 자문팀이 있었다. 한국 전쟁 때도 병역을 기피하였던 김영삼씨는 군인은 정치를 하면 안된다는 노래를 불렀었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에게는 김영삼씨에게 없는 전략 개념이 있었다. 군 지휘관에게 작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승리와 패배와 삶과 죽음의 차이이다. 그래서 군 지휘관 출신은 전략을 소중히 여기며 좋은 작전을 위해 만전을 기한다. 양김씨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경제 정책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지시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누가 경제 전문가인지를, 그리고 그 이론이 검증된 이론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일단 좋은 전략이라는 확신이 서면 총력을 다해 밀어주었다.

1980년대 초에 아직 한국 기업은 해외 진출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때 기업인들이 세계 정세를 내다 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수출 전략을 위해 5공 경제팀은 전세계 시장을 분석하고, 어느 국가에서 어떤 업종이 경쟁력이 있는지름 분석하였다. 그리고 해당 기업에 진출을 권하였다. 그러나 관세 협정이나 비자 체결 등 개기업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 문제들을 전두환 대통령 경제팀이 다 해결해 주었다. 이 경우 기업인들은 전대통령 경제 브레인들의 덕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수출 전략 마스터 플렌에 따라 전두환 대통령이 권하는 대로 했더니 기업인들도 깜짝 놀랄 만큼 해외에서 달러들이 억수로 굴러들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수출 전략을 위한 면담이 있을 때마다 기업인들이 빈손으로 가지 않는 관행이 생겼는데, 여기 4가지 의미가 있었다. 기업인들 편에서는 첫째로, 전두환 대통령과 그 경제팀이 기업에 달러를 벌어드리게 했으니 감사의 표시를 하는 의미가 있었으며, 둘째로 해외 시장 조사, 업종 선정, 무역 및 관세 협정 등 기업이 해야할 수고를 전두환 경제팀이 대신해 주었으니 보답을 하는 의미가 있었으며, 셋째로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라고 드리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전두환 대통령이 세계 석학들로 구성된 경제팀을 유지하기 위해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편에서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정치금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과거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작은 사업 하나 하려 해도 기업인들이 여러 해당 부처에 봉투를 갖다 주어야 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 공무원들이 기업인들로부터 봉투를 받는 것을 엄금하고 정치자금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그 대신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을 공금으로 관리하여 공무원들을 격려하였으며, 정치자금이 여당과 야당 의원들에게 공평하게 전달되었다. 언제 양심씨와 노무현이 자기가 받은 정치자금을 야당 의원들에게 전해준 적이 있던가?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정치자금 사용처가 분명하다. 공금으로 관리되어 그 지출처가 명확하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비자금이란 말인가?

문제는 노태우씨와 양김씨는 수출 전략을 위한 아무런 수고 없이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노태우의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그러나 외채에 시달리던 기업들이 달러 호황을 맞게 한 대통령이 누구였던가. 국민이 개인당 나라빚에서 해방되게 한 대통령이 누구였던가. 성공적인 세계 시장 개척 전략으로 국민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준 대통령이 누구였던가. 실로 전두환 대통령의 찬란한 치적은 양김씨의 잘못된 경제 정책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정치자금 회수를 히는가? 전두환 대통령이 경제 발전과 여야 정치인 지원을 위해 쓰고 남은 자금은 노태우 대통령을 통해 그대로 김영삼씨에게로 전달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사용하지 않았던 정치자금을 김대중은 또 얼마나 전대통령에게서 받아다 썼던가.

1995년 12월 신당 창당 발표 하루 전날 밤 김영삼씨는 형사를 합천으로 보내 전두한 전 대통령을 긴급 체포하여 안양교도소에 감금시킨 다음 공소시효가 지난 12.12 사태에 대하여 위헌까지 해가면서 12.12 특별법을 제정하였을 때 삼권분립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서둘러 그 위헌성이 있는 12.12 특별법 가지고 인민재판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에게 사형이 언도되게 하고 비자금 회수를 추징하였다. 이러한 문민독재자 김영삼씨의 과오로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삼권분립 질서가 교란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50년간 우리 땅이 될 연해주 50만평을 잃었으니 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두환 대통령이 받은 정치 자금의 실제 수혜자요 사용자는 김영삼씨였는데, 김영삼씨가 사용한 몫에 대해서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추징하여 대통령 취임 이전의 재산 및 친인척 재산까지 압류하는 것이 법치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당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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