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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대일 청구의 진실

외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 박정희의 대일 청구

    근자에 상지대 총장이요 명색이 역사학자라는 강만길씨가 만주국은 일본이라는 발언을 하여 그의 무식을 휘황찬란하게 자랑하고 있다. 그는 1930년~40년대 세계지도에 만주국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무식하다. 그런데 만주국에 대한 강만길 교수의 무식은 한국도 우리가 바라보는 한국이 외국이 바라보는 한국이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예는 한 무식한 미국인 하지 중장의 예에서 나타난다.

사실 상지대 총장 강만길 교수는 미국 역사에서 무식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하지 중장보다도 더 무식하다. 미국 외교의 역사에서 하지 중장이 무식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는 그가 1945년 8월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인과 일본인은 다른 민족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정승화씨가 초등학교 졸업자로서 1970년대에 참모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처럼 하지 중장도 대학교육을 받은 일 없이 군부의 요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1945년에 하지 중장을 군정사령관으로 임명하였던 것은 미국의 치명적 실수로 미국 외교사에 기록될 만큼 그는 무식하였다. 그리고 그의 무식이란 조선인은 일본인과 한민족이라는 아집이었다.

사실, 일제시대의 영어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면 하지 중장의 무식도 무리가 아니었다. KOREA라는 명칭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고 한반도가 JAPAN 영토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사 연구가 비로소 꽃을 피운 것도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였으므로 그전에는 한국의 역사를 외국에 알리는 영어 책자조차 없었다. 그러기에 이승만 박사의 항일운동을 제외하고는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으며, 우리가 보는 한국과 외국의 보는 한국은 크게 달랐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우리나라와 외국이 보는 우리나라가 크게 다를 때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예가 바로 1946년 5월에 시작되어 2년 간 진행되었던 동경 전범재판에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뜻밖에도 만주국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먼저 만주국 황제 부의가 왜 태평양전쟁 전범으로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미국이 러시아를 공격하는 독일군을 후미에서 공격하였듯이 러시아도 일본군 관동군을 공격하여 달라고 요청하며 막대한 군사원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막대한 군사원조만 받아 처먹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지 않다가 일본 항복 1주일 전에 참전을 선언한 다음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만주국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주둔하였다.

사실 러시아군의 만주국 주둔이 주한미군 입국이 첫 계기였다. 러시아가 만주국을 침략하자 미국 CIA 극동지부는 러시아군의 남하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만주국 주둔에 이어 압록강을 건너 계속 남하하여 삼팔선에 이르자 미국은 더 이상 남하하지 말 것을 러시아에 강력 요청하면서 러시아군의 삼팔선이남 남하를 저지할 병력을 서둘러 한국에 보낸 것이 주한미군의 첫 역사였다. 그런데, 이때 군정사령관으로 서울에 입성한 하지 중장은 한국인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만주국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강만길 교수의 무식과 대동소이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러시아가 왜 만주국 황제 부의를 동경전범재판에 회부하였던가? 러시아는 자기네도 태평양전쟁 승전국이라는 명분거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이요, 일본의 동맹국을 무찌른 러시아는 승전국이라는 논리를 내놓았다. 그래서 국제사회에 문제가 생겼다. 만약 러시아의 논리에 손을 들어주면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는 사형을 면치 못한다. 침략의 원흉 일본황제는 살려주고 엉뚱한 황제를 사형에 처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일본은 일본대로 2차 대전 전범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논리를 내놓았다. 즉, 전범들에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주려 해도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를 잔혹하게 학대한 전범들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여론이었는데, 일본은 미군 포로 학대는 조선인들이 하였다는 논리를 내놓았다.

1946년 2월 만주국 황제 부의는 선택의 갈림길에 있었다. 자기 말 한마디에 따라 자기의 사형은 물론 만주국이 승전국 러시아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거나 영토를 빼앗기에 된다. 세계가 부의 황제의 입을 주목하였다. 그는 자기는 만주국에서 별 실권이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말 한마디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신 만주국은 일본의 허수아비였다는 불명예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부의 황제가 태평양전쟁 전범이냐 아니냐의 이슈 못지 않게 중대한 이슈가 한국인이 태평양전쟁 전범이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좌익은 외교에 대한 무식으로 친일한다. 지금 동경 전범재판의 핫이슈는 한국인이 태평양전쟁 전범이냐 아니냐의 문제였는데,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등은 전혀 무관심하였다. 해방이 되었어도 태평양전쟁 전범국으로 몰리면 우리나라는 패전국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손해 배상의 책임마저 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일본인들의 논리를 국제사회에서 무찔러야 했는데, 그들은 이승만의 외교를 방해만 하였을 뿐 도무지 동경 전범재판의 핫이슈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 교활한 일본인들은 패망 1년 전에 포로수용소 관리에 조선인들을 이용하였다. 조선인은 한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미군 병사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해야 했다. 교활한 일본인의 올가미에 걸렸던 것이다. 미국 여론은 포로수용소 책임자들에 대한 관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은 포로수용소 근무병과 책임자들은 조선인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 이 상황에서 만일 맥아더 장군마저 한국사에 대해서 하지 중장처럼 무식하였다면, 그리고 만주국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강만길 교수처럼 무식하였더라면 우리는 다시 한번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미국에, 맥아더 원수에게, 그리고 국제사회의 전범 재판관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우리는 일본 민족이 아니었음을, 우리나라는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려야 했으며, 전범재판에 회부된 한국인들 구명 운동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 일을 이승만 박사가 하고 있었다. 그는 박헌영과 여운형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한국인들 구명 운동을 하였다. 애석하게도 영친황과 일본 육군대학 동기생이었던 홍사익 장군의 구명 운동에는 실패하였으나, 한국은 결코 태평양전쟁 전범국이 아니었음을 국제사회에서 입증한 그의 외교는 찬란한 것이었다.

근자에 외교에 무식한 강만길 교수는 마치 우리나라가 대일청구권이 있었던 것처럼 떠들어댄다. 그러나 그가 해방 직후 대일청구권을 일본에 요구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없는 얘기다. 한국은 승전국이 아니기에 전쟁손해 배상금을 요구할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대일청구 요구가 어떻게 가능하여졌는가? 그 비결은 1951년 정초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일 청구협상을 하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려오던 시기에 누가 한가하게 대일청구권 협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노빠들이 모르는 외교술이 있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려오던 그 시기는 또한 유엔군 수가 가장 많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갓 독립되었던 우리나라에 미국 외에 그 어느 나라가 외교적 승인을 해주려 하였겠는가?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전에 유엔군이 참여하였을 때 한국의 외교적 무대를 넓히는 기회로 삼았다. 한국 전쟁으로 일본이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었을 때 이승만은 외교적 실리를 취하였다. 노련한 외교전략가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한미동맹을 일본에 증명할 최대의 기회였다. 한미동맹이 확실하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미국과 더불어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이라는 논리의 발판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애석하게 일본인의 농간에 홍사익 장군의 목숨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제 대일청구로 일본놈들의 버릇을 고쳐줄 기회가 왔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어서 대일 청구 그 자체가 외교적 전략이었다. 금액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태평양전쟁 전범국이라는 일본의 논리를 확실하게 끊어놓는 것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65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대일 청구 협상을 매듭지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외교적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맺었던 한미상호방위 조약은 한국이 태평양전쟁 전범국이 아니라는 확실한 보증이었다. 이제 외교적 실리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적 실리였다. 보상과 경협의 말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이러하다. 미국과 한국이 한미상호방위 조약을 맺었을 때 이익 보는 쪽은 한국이다. 우리가 미국에 어떤 방위 혜택을 해 주겠는가? 오직 우리가 미국의 방위 혜택을 누릴 뿐이다. 경제 외교도 마찬가지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협이라는 단어를 수용하였을 때 그가 바라본 것은 기술 이전이었다. 경협은 동등한 파트너, 경제 외교의 동반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서로 기술을 주고받으며 이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보상이란 용어는 보상금 외에는 일본이 기술은 덤으로 주어야 할 의무가 없음을 의미한다. 경제 외교의 동반자 시대를 연다는 것은 한국이 기술 이전을 요청할 때 일본은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합법적으로 그리고 떳떳하게 기술 이전을 해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일본에서 받아낸 보상금은 미국의 무상원조에 비하면 아주 작은 액수이다. 더구나 만약 박정희가 일제 수입을 중단시키지 않았으면 금방 일본으로 돌아갈 액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보상금 포항제철을 건설하는 것 훨씬 이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산업기술 이전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기술을 이전해 주며 세우게 한 전자산업 중에 삼성전자가 있다. 지금 한국인을 먹여 살리는 산업이 전자산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며 무형의 자산, 즉 기술의 이전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무식한 강만길 교수의 눈에는 산업 기술의 중요성이 안 보인다. 강만길 교수는 한국은 언제까지나 전자산업이 일본에 정복당해 있어야 하며 여태껏 라디오마저 일본 것을 써야 친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재빨리 합법적으로 일본 기술은 이전해 와 기술로 일본을 정복하는 것이 진정한 친일 청산이요, 항일 운동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지금 박정희 대통령 일상 모습과 새마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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