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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없는 전두환 없다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5월 전두환 중정서리에게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던 이유들 중의 하나가 양김씨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원한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 어른이 침욱하는 만큼 양김씨에 대한 그의 원한은 깊은 것이었다.

한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이 위대한 대통령들이거니와 사람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위대한 면모를 간과하는 겅우가 많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전두환 대통령처럼 그도 자기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위대하였다. 민주주의 행정가로서의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의 역할을 개헌으로 보았다.

이것은 최규하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부정하여서가 아니라, 이제 유신헌법의 소임은 끝났기 때문이었다. 아마 유신 아이디어의 유래는 1930년대 초 미국의 개헌이 아닌가 생각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이라는 개발 정책을 시작하자, 미국 국민들은 경제 개발은 4년간의 단기 임기 동안에는 불가능함을, 그리고 보다 견실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대통령 임기 제한을 당분간 없애야 할 필요를 느끼고, 헌법을 개헌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주었다.

이렇듯, 본래 유신헌법의 소임은 10년 걸리는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본래 중화학공업은 서구에서는 2백년 걸려 발전하는 것이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미국에서 기술 이전을 해오는 방법이 있었으므로 한국에서 10년 내에 초고속으로 육성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임기를 그 기간 동안만 늘여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사실은 유신헌법은 우리 민족의 살길을 위한 절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1972년 10월에 포항제철이 한창 건설되고 있었지만, 한국인의 외화벌이 밥줄을 제철에만 걸 수 없었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야만 했다. 그것은 도저히 뒤로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은 아무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왜 후진국에서 산업화가 불가능한가? 그것은 후진국에서 공장을 지어도 국제 시장에서 수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후진국은 기껏해야 노동집역적 산업에 머물러 있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점점 임금이 상승되는 한국에서 언제까지나 노동집역적 산업으로 수출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1970년대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냐 했으며, 그것은 후대로 미룰 수 없는 시대의 당위성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뿌리는 김영삼씨의 망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초의 김영삼씨의 목표는 경부 고소도로 건설 방해였다. 그는 이것 지으면 나라가 망한다며 공사 현장에 누워서 고소도로 건설 방해하였다. 그리고 1979년 후반의 김영삼씨의 논리는 한국 산업혁명이 성공하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979년 가을 미국 방문 중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 정부를 지원하지 말아줄 것을 미국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으며, 그것이 타임지에 실렸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국회에서 그 책임을 물으려 하였을 때 일본 TV 방송이 이것을 왜곡 방송하였는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일본 TV 방송이 시청되는 부산과 마산에서 (친일파 시민들이) 일본 왜곡 방송에 자극받아 일으킨 것이 부마 사태였다.

이러한 김영삼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그의 독특한 외교로 미국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에 필요한 핵심 기술들을 이전해 놓으시고 서거하셨다. 따라서, 이제 유신헌법의 소임은 끝난 것이요, 따라서 포스트(Post)유신헌법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민주주의 행정 전문가로서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헌버법을 연구하여 유신헌법을 기안하였던 이도 최규하 총리였으니, 이제 그 소임을 다한 유신헌법을 개헌하는 것도 최규하 대통령의 몫이었다. 그는 이것을 자기의 시대적 소임으로 여겼으며, 그가 개헌하여 대통령 선거제를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환원하여 양김씨에 정권을 물려주겠다고 공표하였을 때 그는 많은 양보를 하였던 것이었다.

무릇 누구나 한번 집권하면 장기 집권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그런데 여기 자신의 4년 임기마저 1년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한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조속히 개헌하여 직선제 선거법을 제정하고 그 선거법에 따라 선거 관리를 하여 양김씨에게 대권을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그 어느 통치자가 이보다 더 큰 양보를 하겠는가? 그러나, 양김씨는 최규하 대통령의 그러한 약속을 환영하기는커녕 당장 하야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4공화국 정부 각료들이 모두 퇴진하면 이 나라는 무정부 상태가 된다. 그리고, 양김씨 지지자들이 서로 각목들고 싸우던 상황에서 양김씨 중 하나가 대권을 인수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선거 없이 집권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김씨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민심이 양김씨를 떠났던 이유는 그들이 배후에서 선동하였던 너무 심한 과격 시위들이 사회를 혼란시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혼란기에 경제는 곤두박칠치고 있었으며, 물가는 천정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사관이 있었다. 이것은 갓 취임한 대통령더러 하야하라고 요구하는 모독 이상의 것이었다.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개헌할 자격이 없다는 양김씨 논리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논리였다. 무조건 최규하 대통령 하야와 국무위원 퇴진을 요구한 것은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래서 김일성은 1980년 5월 하순에 남한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며 남침할 준비를 척척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운동권은 마치 광주사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대 광주시민의 대결이었던 것처럼 왜곡하였으나, 그 운동권 주장의 거짓을 최규하 대통령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 시위 구호는 분명 "최규하 대통령 하야, 신혁확 총리 퇴진"이었다. 운동권 입장에서 보면 최규하 대통령이 왜 대학생들 구호에 순종하지 않는지 불만이었겠지만, 최규하 대통령 입장에서는 끝까지 수호하여야 할 사관이 있었다. 만약 양김씨의 힘에 눌려 최규하 대통령 스스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최규하 대통령이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직선제 선거를 위한 선거버법을 서둘러 제정하려 하였던 것이요, 쿠데타로 집권하려 하였던 양김씨는 개헌도 직선제 선거법 제정도 온갖 수단을 다해 방해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최규하 대통령과 운동권의 갈등이 5월 15일 서울역 집회 때 시위대가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인 사건에서 이미 유혈 폭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5.18 광주사태로 폭발하였다.

5월 26일에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대통령은 자기가 하야할 터이니 무기를 반납하고 시위를 풀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즉, 최규하 대통령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정통성 논리가 광주사태 때 굴복당한 것이었다. 그렇다. 양김씨가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유신헌법 개헌을 할 자격이 없다고 그토록 우기니 이제 그 주장에 굴복한다. 그러나, 그 대신 그 개헌을 양김씨에게도 맡기지 않겠다. 전두환을 후계자로 세워 그에게 유신헌법 개헌을 맡기겠다. 이것이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중정 서리에게 대권 인수 명령을 내렸던 이유였으며, 취임 일성이 "단임 실현"이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양김씨가 최규하 대통령 스스로 직선제를 위한 선거법 개정을 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 소임은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말기에 노태우 장관의 입을 빌려서 한 6.29선언으로 1987년에 선거법이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첫 임기는 우리나라에 아직 연필 한 자루 생산할 능력이 없었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 기업인이란 수입상을 말하였다. 미국에서 아무리 원조해 주어도 늘어나는 것은 수입상 뿐이요, 공장 하나 짓지 않는 나라이기에 미국도 무상원조 중지를 결정하였던 때였다. 그런데, 웬일이지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한국 제품이 세계 시장을 휩쓸게 하였다. 1960년대의 가발수출과 1970년대의 섬유 및 철강 수출에 이어 본격적이 수출 시대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광주사태 이후의 세대는 1960년대의 한국 경제와 1980년대의 한국 경제가 어떻게 다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본격적으로 한국이 똑똑한 나라로 세계에 알려졌으며, 한국을 배우기 위해 세계 각국 대학교에서 한국한 개설붐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으며, 극빈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교민들로부터는 푸대접과 냉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운동권이 꾸며낸 소문과는 달리 그는 광주폭동 진압작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에도 교민들은 "그가 5천명 광주시민을 학살하였다" 는 유언비어에 그대로 속고 있었던 시절이었으니 대형 플랭카드 등으로 조국 대통령에게 이만저만한 모독을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방미 기간 동안에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는 첫 초석을 다듬었다.

지금은 삼성전자 등 한국 브랜드가 미국 시장을 석권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197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은 미국에서 기계를 들여와도 공장 엔지니어들이 영어로 적힌 사용법을 읽지 못하던 나라였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한국산 제품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시대가 열렸다. 뭐든 한국에서 생산하면 미국에 내다 팔 수 있는 시대, 가전제품은 물론 심지어 자동차까지 팔 수 있는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 공장을 짓지 않으면 공장은 저절로 지어지지 않는다. 수출 시장도 먼저 정부에서 물꼬를 터주어야 하는 시기가 있다. 그 수출의 물꼬를 터는 역할을 가장 휼륭하게 한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1979년 성탄절을 즈음하여 대통령에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이 스스로 4공화국은 과도기의 정부이며, 자신의 역할이 과도기 정부의 역할임을 잘 알고 있었듯이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의 역활을 세일즈 맨 외교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흔히 용비어천가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무식한 이들이 하는 말이다. 당시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의 공적을 그 십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과소 평가는 용비어천가가 아니다. 사람들은 당시 그를 군인의 이미지로서 생각했었으나, 뜻밖에도 그는 세일즈 맨 외교의 천재였다. '88 서울올림픽이 그 한 예이듯이 그는 한국 브랜드가 세계 브랜드가 되게 하는데 남다른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이 IT 강국이 된 것도 15년 후를 내다보고 그가 IT 산업을 육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수출 호황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돈벼락이 아니었다. 1973년 이후 근 7년간 진행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 시절에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산업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한국은 그 7년이 채 못되는 단기간에 산업후진국에서 산업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나라였으며, 유신정권 이전의 노동집약형 산업구조에서 유신정권 이후의 고부가가치 수출 시대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교훈이다. 생산 능력의 뿌리가 있어야 수출의 결실이 있다. 주로 문리대 출신인 386 운동권은 산업혁명의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에 방해하였으며, 지금 집권 세력이 되어서도 여전히 박정희 죽이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안다. 전두환 대통령의 수출전략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박정희 없는 전두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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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소 준공으로 산업혁명의 비전을 구체화시킨 박정희 대통령 ]
박대통령이 조국 근대화를 위한 용광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권력을 잡고 나서도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서 맑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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