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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교수 글의 외교전략적 중요성
독도 문제 해법을 위한 한승조 교수 글의 중요성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16일(2005년 3월 16일)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을 제정하는 조례안을 가결했다.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선전 포고에 가까운 적대행위를 한 것이다. 노무현이 이번에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할 것인가? 아마도 이 사건은 외교의 중요성을 우리 국민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노무현이 지난해 3.1절 기념식 때 (1945년 9월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던) 용산기지를 침략의 상징으로 언급한지 꼭 1년만에 이런 일이 터졌다. 친일청산, 과거사 청산, 국가보안법 철폐 등 주로 파괴적인 말을 즐겨쓰는 노무현은 한미동맹 해체를 바라는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려는 듯 정말 빠르게 한미동맹을 약화시켰다.

왜 일본은 노무현의 대통령 임기를 틈타 독도 조례를 가결하였을까? 일본은 노무현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킨 기회를 틈탄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치적 중 하나였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무엇이던가? 그것은 어느 나라든 우리나라와 군사적 분쟁이 생기면 미국에 선전포고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조약이었다. 따라서 한미 관계가 튼튼할 수록 중국과 일본이 우리나라에 까불지 못한다. 그러나 노무현이 꼼수로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고 주한미군을 감축시키기 시작할 수록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기 시작한다.

그것을 온고지신이란 필명의 네티즌은 이렇게 표현한다: "김대중이 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를 공해상으로 내다 버리고 노무현이 든든한 우방 멀리하고 피로 언약한 친구사이 뒤틀어 놓으니 근방의 힘센 깡패들이 작고 힘없는 코리아에 린치를 가하는 형세입니다. 코리아는 적들로 둘러싸여 혼자 발버둥치는 꼴이 되었읍니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의 독도 침략은 양김씨의 경제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마치 IMF 환난이 양김씨의 합작이었듯이 일본의 독도 침략 빌미를 제공한 것도 양김씨의 합작품이었다.

자, 이 문제는 무엇이 부마사태를 일으키게 하였나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엇이 유신 프로젝트였던가? 산업혁명이었다. 반도체, 전자, 자동차, 중화학공업, 조선, 제철 등 지금 우리 국민을 먹여살리는 모든 산업이 1970년대에 세워지고 발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거의 완성될 시점에 김영삼씨가 국회의원 신분으로 미국 가서 매국노짓하였다. 그는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을 면담한 회담에서 "왜 당신네 미국은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지원해 주느냐? 더 이상 지원해 주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김영삼씨의 매국 행각이 한국 국회에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을 때는 일본은 신이 났었다. 어째서 다른 후진국들이나 개발 도상국들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한가? 그것은 공장을 지을 수 있다 하더라도 기술 이전을 해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에는 일본에서, 그리고 1970년대에는 미국에서 기술 이전을 해오셨다. 그리고 한국을 객관적으로 보던 일본은 한국이 곧 일본을 추월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친일파 김영삼씨가 미국이 한국의 산업혁명을 지원하는 것을 미국까지 가서 방해하였으니 일본은 너무너무 신났으며, 김영삼씨 지지를 위한 왜곡 방송을 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일본 방송이 시청되던 부산과 마산에서 친일파 시민들이 일본의 왜곡 방송에 현혹되어 일으킨 것이 부마사태였다.

한국인의 주산업이 본래 농업과 어업이었음은 양김씨의 경제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영삼씨가 농가개량사업을 한다며 10조억원이라는 천문학적 국가예사산을 쏟아붓고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농촌만 빚더미에 앉게 한 것도 김영삼씨의 경제 정책은 농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씨는 본래 뱃사람이었다. 그는 1997년 대선 때 목포에서 해운업을 했던 경력을 내세워 자기를 경제 대통령감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리고, 1999년 1월 22일 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이었던 노무현을 시켜 유효기간 3년의 신한일어업협정이 발효하였으며,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였던 2002년 1월 22일 한일어업협정을 자동 연장시킨 것이 오늘의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일본이 독도를 침략하는 것은 그들에게 경제 무기가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의 경제 무기에 굴복하여야 하는 사태가 온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큰 치욕이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수출은 일본의 부품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친일파 노빠들은 여전히 무엇이 경제 전략인지 모르고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남은 유신 프로젝트가 부품 기술 완전 자립이었다. 다른 산업은 이미 일본을 추월하였으므로 부품 기술 완전 자립만 실현하면 절대로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한국 국민들은 편하게 선진국의 생활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친일파들의 온갖 방해 공작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갑자기 서거하셨기 때문에 부품 기술 완전 자립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었고, 지금 한국은 경제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 있다.

현 일본의 독도 침략 문제는 김대중의 잘못된 어업 정책에 그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좌파의 민족사관에도 그 문제의 근원이 있다. 지금 "민족문제연구소" 등 좌파 단체들이 친일 청산을 주장하지만, 실은 이들 좌파 단체들이 본래 친일 단체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반미주의자들이었으며, 반미주의 논리가 바로 친일 논리였다. 반미주의자들의 민족사관에서는 우리나라를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미국이 적이 된다. 반미촛불시위가 결국은 한미동맹을 해체시키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무효화시키지는 것이었다. 무엇이 좌파의 민족사관의 의도였던가? 그것은 한국을 미국과 고립시킨 후에 다시 중국과 일본의 먹이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금 친일 청산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는 자들이 바로 한국 친일파들이었던 것이다.

2002년 10월부터 시작된 반미촛불시위 열풍 때 한국인들이 큰 목소리로 미국을 이긴 일이 있다. 본래 두 여중생 과실사고의 책임은 한국정부에 있었다. 2002년 6월 13일은 경기도 파주의 한 미군장갑차전용도로에서 북한군 탱크 저지훈련이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훈련이 사전 예고된 날에 그 지역 주민이 그 도로를 이됴용하지 말도록 한국 정부가 그 지역 주민에 알려주도록 소파 규정에 되어 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미1사단으로부터 그 공문을 받고도 주민들에게 사전 예고를 해 주지 않았고, 두 여중생도 30대의 탱크가 달리던 길가를 걷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그때 미군측은 4억원의 보상금 지급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보상의 책임을 완료하였는데도 한국 시위대는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고 또 몇차례 받아냈다.

그때는 큰 소리로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큰 목소리로 외교적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가 일본을 이기려면 한승조 교수의 말을 들어야 한다. 지금 일본의 독도 침략 문제만 해도 이것은 정치외교학 논리가 필요한 싸움이다. 지금은 한승조 교수같은 정치외교학자들의 냉철한 논리가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정치외교학 전문가들을 묶어 놓고 비전문가들이 큰 목소리로 일본과 싸우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큰 목소리는 일본이 경제무기로 때릴 때 무력하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식 큰 목소리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부품 기술 자립화 프로젝트를 방해하여 일본에 경제가 종속된 한국으로서는 논리의 힘이라도 있어야 한다.

자, 그러면 무엇이 한승조 교수의 양편 날 선 논리의 검이었던가? 한승조 교수는 객관적 논리로 일본의 정한론을 허물었다. 무식한 이들은 한승조 교수가 러시아 침략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 친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1945년 9월 13일에 미군이 입국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는 러시아에 병탄되었을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만일 러시아군에 우리 민족이 정복당했다면 러시아가 북한에 지원하던 원조도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울며 북한에 원조하였던 것은 한반도가 미국과 러시아가 어느 체제가 우월한지를 경쟁하는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단 하루도 일본군의 신분이었던 사실이 없음에도 노빠들이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박정희가 군관으로 복무하였던 만주국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그런데,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하였던 만주국의 역사가 러시아의 한반도 침략 의지가 얼마나 끈질겼는지를 말해 준다. 비록 1945년 8월에 러시아의 침략으로 망했지만 그 14년간 만주국이 어엿한 독립국으로 실제하였다는 다음 세가지의 증거가 있다:

만주국의 독립국이었다는 정치외교학적 근거는 일본이 각국에 만주국이 독립국임을 명시하여 보냈던 외교문서였다. 정치행정학적 근거는 주권이 만주국 황제 부의에게 있었으며, 정부 관리들이 만주계이든 조선계이든 일본계이든 부의 황제의 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적 근거는 독립국의 상징이 분명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일본계 만주국 국민들도 공식행사에서 먼저 만주국 국가를 부른 후에 일본 국가를 불렀으며, 만주국 황제에 대한 충성을 먼저 표시한 후에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을 표시했다. 이것은 애국가 부르기와 태극기 소지가 불법이었던 식민지 조선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한승조 교수는 안중근 의사가 갈파한 대로 일본이 러시아의 한반도 침략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였음을 진술하였다. 무엇이 러일 전쟁이었던가? 1904년대 초에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정복하려고 하였을 때 먼저 만주를 정복하고 한반도로 쳐내려오려 하였기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기 때문에 만주 여러 지방은 자주, 자치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만주 개발권을 승전국 일본에게 넘겨 주었다. 완전 점령하여 병탄하려 하였던 러시아와 달리 일본은 개발권만 원했기에 만주인들로서도 그것이 좋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철도 부설하여 주고, 자기네 자본과 기술 가지고 와 경제 투자해 주는 것이니 만주인들은 환영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1930년대에 군사강대국이 된 러시아가 다시 만주를 침략하려는 조짐이 있었을 때 일어났다. 일본으로서는 여러 해 걸려 철도 부설해 주고 경제 투자한 후에 러시아에 전부 빼앗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관동군을 북만주로 이동시켰는데 국제 사회가 반대하며 관동군의 만주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관동군의 합법적 만주 주둔이 필요하였던 것이고, 청나라 폐황제 부의는 청나라 복원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부의는 관동군의 합법적 만주 주둔을 보장하고, 일본은 만주국의 국가 승인 외교를 지원하는 거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주국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제국이 아시아 전체로 팽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중국과 만주의 정치 지도자들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탄생한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이 공산주의자들과 원수지간이었다는 한승조 교수의 통찰은 정확하다. 그러면 이런 한승조 교수의 혜안이 왜 일본의 정한론을 그 근거부터 허물어뜨리는가? 본래 일본의 정한론은 조선인은 근대화되지 못하였으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승조 교수의 논리가 정연할수록 조선인은 근대화되지 못하였다는 정한론은 설자리를 잃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한승조 교수의 글에는 일본인 독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논리가 숨어 있다. 그 논리가 무엇인가? 결국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것이다. 정치외교학 논리에서 일본이 패전국이라는 논리는 일본이 태평양전쟁 전범국가라는 논리이다. 그러기에 정치외교학 논리에서 일본은 태평양전쟁 전범 국가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한미 동맹이 견고하며, 한승조 교수와 더불어 우리가 일본은 태평양전쟁 전범 국가라는 사실을 국제 사회에서 상기시키면 일본은 말문이 막히게 되어있다. 그러기에, 일본의 독도 침략 해법은 노무현의 반미 외교가 아니라, 한승조 교수의 정치 외교학 논리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어리석은 노빠들이 그것을 거꾸로 생각하여 일을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   지금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동영상 을 클릭하시면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무지한 채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노빠들은 아직 이 영화 동영상 상영 중일 때 빨리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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