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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전화위복과 한승조의 말뜻

명의 허준의 전화위복과 한승조 교수의 말뜻

요즘 "5공화국"이 장안의 화제작이다. 그런데 5년 전에는 MBC 창사특집드라마가 그려내는 허준의 이야기가 화제작이었다. 왜 "5공화국"이 화제작인가? 그것은 전두환이란 한 인물의 이야기가 담겨 있느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여기 국가에서 받은 봉급을 자기를 위해 단 일원도 쓴 일이 없이 백 프로 국가에 사회에 환원한 인물이 있다. 그는 늘 깨끗한 공직자의 본이었다. 그럼에도 전두환 비자금이란 억울한 누명을 쓴 인물이 있다. 육사 교장 이규동씨가 전두환을 사위로 맞아드릴 때 "남자는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려면 월급 봉투를 집에 들고 오면 안된다"는 다짐을 받았다. 즉, 사위가 되는 조건도 재산을 상속받는 조건도 월급 봉투를 집에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규동 장군은 진정한 육사 장군이었다. 그는 애국 군인을 양성하고 싶어했다. 그가 원하는 사위는 애국자이지 생활인이 아니었다. 이규동 장군은 재산가였다. 그는 깨끗한 사람이었으되 깨끗하게 재산을 증식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위에게는 일체 재물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국가에 충성하도록 가르쳤다. 그런데 전두환은 장인보다 한술 더 떠 누가 선물을 가져오면 야단을 치는 대쪽처럼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부지런히 남을 도우면서도 누가 작은 감사의 표시라도 화면 화를 내었다. 선물까지 걷어차는 이였기에 군대에서 악명이 높았으며, 그 대쪽같은 청렴결백함의 악명 때문에 또한 신망이 높았다.  전두환을 헐뜯으려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실권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병역 의무를 준수하자 않았던 김대중이 군대 행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전두환은 인격적으로 신망이 높았었다.

그 인격적 신망 때문에 훗날 거의 반강제적으로 떠밀려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했던 전두환은 부패를 없애기 위해 임기초부터 정치자금 창구를 일원화했다. 그래서 5공에서는 민정당계는 정치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일원화한 정치 자금을 여야 고르게 정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똑같이 정치 자금을 나누어 주었더니 꽤 많이 비자금 가지고 있는 줄로 오해를 사서 엉터리 셈법으로 천문학적 추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임시에 전부 여야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아 주고 나머지는 노태우 대통령을 통해서 김영삼씨에게 전달해 주었다. 공적 회계가 담당하는 정치자금을 그는 한푼도 구경한 일도 만져본 일도 없이 모두 국가와 사회에 환원하였다.

5공 때 한국이 전세계에 수출 시장을 뚫을 수 있는 것도, 오늘날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것도 전두환이 세계 최고의 경제 브레인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자금을 모두 나라를 위해 썼지 단 한푼도 자기을 위해 쓴 적이 없다. 전두환이야말로 독보적인 청렴결백한 공직자이다. 그런데 지금 이순자 여사가 이규동 장군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빼앗는 도둑 심보를 가진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전두환이 이규동 장군의 사위기 된 것을 시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규동 장군이 딸에게 상속해 준 재산을 강탈하는 것은 바민주적인 처사일 수 있다.

여기 5월 26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하기 하루이틀 전쯤에서야 광주사태 소식에 접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으되 오천 명을 힉실히였다는 누명을 썼다. 사실, 5.17긴급조치 확대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의 결정이요, 전두환이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모 기자의 말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 친북좌파와 자생 간첩단들에게 보내는 무신이 미국 정보부에 포착되었다고 한다. 즉, 남한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김일성이 서울에 무혈 입성할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미국이 한국 정부에 통보하고, 5월 16일 전국학생회장연속회의차 모인 이화여대강당에 모인 학생들이 그날 오후 6시에 김대중의 5월 22일로 예정된 쿠데타 거사 계획에 대하여 경찰에 알려 주었기에 중동 순방 중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이 급히 귀국하여 5.17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계엄을 확대하였다.

5월 18일 10시경 오십 명 내지 백 명의 학생과 노동자들과 들불야학 청소년들이 전남대 앞에서 7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졌다. 경비 근무 중이던 공수부대는 이열 종대로 부동자세로 선 채로 날아오는 돌을 맞고도 피하지 않고 있었다. 7명이 무슨 학살을 하는가? 그러나 윤상원은 한편으로는 계속 돌을 던지도록 선동하면서 한편으로는 녹두서점의 전화로 전국 운동권에 공수부대가 지금 학살극을 자행하고 있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소문은 당시 서울대 3학년 유언비어 제조기들을 통해 다시 확대되어 공수부대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시민을 향해 무차별사격하고 있다고 퍼져 나갔다.

11시에 몇몇 전남대 학생들과 윤상원이 이끄는 노동자들과 들불야학 청소년들이 다시 금남로에 모였으며 그 수가 30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학생회장이 보이지 않으므로 해산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 학생회장을 죽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윤상원은 아침 8시에 박관현이 광주 외곽 산장으로 피신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거짓 유언비어를 이용해 파출서에 돌질하도록 했다. 그리고 평소에 미리 화염병 만드는 방법으로 화염병을 제조해 시위대에 나누어 주었다. 아마, 이것이 광주에서 시위 때 화염병이 처음 사용된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처음에 과잉진압을 한 공권력은 공수부대가 아니라, 경찰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한 여대생을 끌고간 것이 시위대를 더욱 자극하여 경찰들이 시위대에 폭력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부패 언론 엠비시의 "두 개의 내란"에서 숨기는 시위진압 작전 시간은 오후 5시 40분이다. 그 전에 시위대의 온종일 계속되는 방화와 파출서 파괴가 있었다. 5.18 단체들이 인정하는 완전 파괴된 파출서들의 수만 6개였다. 그리고 엠비시가 조작하듯이 게릴라 소탕 작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광주경찰서장과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의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의 정웅 소장이 2개 대대에 시위 진압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애서 벌어지는 일을 전두환이 서울에서 무슨 도리로 알고 있었겠는가? 광주시 경찰서로부터 치안 유지 능력을 상실했다는 보고를 받은 내무부가 처음에 시위 진압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두환에게 알려 주었을리 만무하다. 전두환은 적어도 광주사태 초창기에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실 전두환은 양김씨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최규하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고 있었다. 특별한 지지가 아니라 개헌 반대 시위를 반대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양김씨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그 방법은 유신헌법의 간선제 선거를 직선제 선거로 선거법 개정을 하여 민주적인 방법으로 민간 대통령이 탄생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로 자기가 대통령감이라며 각목들과 싸우던 양김씨는 똑같이 한 목소리를 내어 개헌 반대였다. 그래서 당시 운동권 시위 이슈는 개헌 반대였다. 그냥 양김씨기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 되는데 무엇하러 직선제 선거법을 제정하려 하느냐며 시위하였던 것이다.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김영삼씨 인기가 좋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학생 여론은 김대중이 장악하고 있었으되 국민 지지도는 김영삼씨가 높았던 듯하다. 4월까지는 김대중은 군부 장성들은 자기 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4월 30일 전두환이 중정 서리로 임명받으며 취임인사할 때 "불법 시위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전두환 쿠데타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전두환의 말뜻은 직선제 선거법 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막아 양김씨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하겠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선거가 있어야 새 대통령이 선출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무지한 운동권과 학생 시위대가 직선제 선거법 제정을 방해하였을 때 그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민주화 일정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최규하 대통령은 양김씨 대통령 민들기를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그의 노력의 한계였다. 5월 26일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대통령은 자기가 하야할테니 제발 이제 무기를 반납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럼에도 시위대가 거절하자 그 다음날 새벽 3시에 자위권 발동을 재가하여 주었다. 즉, 시민군이 19일 무장한 이래 그때까지는 계엄군은 시민군 총에 맞으명서도 맞대응할 수 없었으나 다시 시민군 사격이 있을 때는 10분간 맞대응할 수 있는 자위권이 발동된 것이었다. 그리고 도청진압작전은 10분만에 끝났다. 그런데, 광주사태 현장에서 양김씨에 너무 실망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으로 후계자를 바꾸었다, 대통령 될 준비를 하라는 최규하 대통령 지시에 너무 놀란 전두환은 계속 사양했지만 국무위원들이 애원하였다. 여전히 전두환이 사양하자 국무위원들은 전군지휘관들에게 전두한 장군 좀 설득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선배 장성들이 "전장군 나라를 구하게!" 하는 간절한 호소를 하였다. 이처럼 군부에서 거의 강제로 떠밀자 상관들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악독한 운동권을 전두환 쿠데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쿠데타가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도 국무위원들도 전군 지휘관들도 1980년대 초의 시대 상황에서는 전두환이 가장 대통령 적임자라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여하튼 여기에 단 한 푼도 자기를 위해서는 국가가 주는 봉급을 사용한 일이 없으면서도 전두한 비자금 누명을 쓴 사람이. 광주사태가 일어났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면서 오천명 학살이라는 누명을 쓰고 온갖 고초를 당해온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의 지지자들에게도, 그를 정적으로 여겼던 자들에게도 "5공화국 드라마"는 화제작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꼭 오년 전에 "명의 허준의 이야기"가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허준의 이야기는 바닥 인생에서 출발하는 보통 사람, 그러나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살기에 고귀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첩의 소생인 허준이 사람답게 살겠다고 어머니 손씨와 함께 고향을 멀리 떠나 산음이란 낯선 고을에 도착하나 반겨 주는 사람이 없다. 배몰미에 여독까지 겹쳐 쓰러진 어머니 손씨를 황급히 모시고 간 곳이 조선 최고 명의 유의태 의원의 집이었다.

일전에 사기 당했던 일이 오히려 복이 되어 유 의원 문하에서 약초군으로 일하며 의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허준은 자기도 그런 일을 하면서 의술을 배우겠다고 다시 유 의원 집을 다시 찾아온다. 그 집 약초군들이 짖궂게 허준을 쫓아내려 하고 허준은 한사코 유 의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므로 한바탕 싸움판이 벌어진다. 마침 유 의태와 아들 유 도지 일행이 그 곳을 지나다가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허준이 무슨 일이라도 할테니 의술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나 유도지는 차갑게 퇴짜 놓고 허준을 내쫓으려 한다. 허준 같은 사람은 의술을 배울 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 도지의 말에 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 의태는 허준을 자기 문하에 받아들인다. 여기에 기구한 삶이 결국 축복으로 바뀌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기에 머슴에서 조선 최고의 명의로 발돋음하는 이야기에 흥미와 서스펜스가 있다. 그렇다, 그 개화의 과정이 어떻든 여기서 그가 명의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록 그 과정에 고초가 있다 하더라도 열매가 단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허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 한승조 교수가 그렇게 말했으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

한승조 교수는 개화된 민족으로서 우리가 해방된 것이 전화위복이라고 말했다. 허준의 이야기가 있듯이 민족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한승조 교수는 그 과정이야 어떻든 미국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승전국이 되고 일본은 패전국이 된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친일 발언이 아니다. 그런데 오역에 앞뒤 다 잘라 버리고 한승조 교수 말을 딴 뜻으로 바꾸어 그의 인격에 인민재판을 가한 못된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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