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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는 무언의 사회 계약이었다
   미국이 경제 발전의 토대가 필요하던 때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장기 집권할 특권을 부여한 미국 국민은 현명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박정희 대통령처럼 경제 정책에 뛰어난 지도자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미국 경제는 사정은 매우 나빴다. 정부가 경기 부양책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대공황의 늪에 미국 경제가 빠져들었기 때문에 정부는 시장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루즈베트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 개발을 하는 뉴디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그에게도 국민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주는 호소력이 있었으며 좋은 경제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가는 지도력이 있었다.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기 힘든 것처럼 미국에서 루즈벨트같은 대통령이 다시 나타나기 힘든 것을 안 미국 국민은 루즈벨트가 몇번이고 대선에 재출마할 수 있도록 미국판 유신 헌법 개정을 하였다.

    정권이 바뀌면 경제 정책이 바뀐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경제 발전으로 민주주의의 토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한국 국민도 박정희 대통령을 좀 더 모시고 마음껏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현명함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런 현명함이 없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으며, 1979년 10월에 마산에서 한 시민의 실수로 생긴 장갑차 압사 사고의 책임을 청와대로 넘기는 유언비어가 퍼지던 부마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부마사태는 어처구니 없게도 당시 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민족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10.16 사태로 치달았다. 그러면 김재규는 왜 박 대통령을 암살하였을까?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사건이 전해지자마자 지성인들은 "다음은 어느 장성이 등장하여 집권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가졌다. 사실, 그 물음은 안보와 경제 정책에 유능한 새 지도자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국민들의 무언의 사회 계약이기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단 국가로서 휴전 중인 한반도가 준전시 상태에 돌입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당시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안보였다. 지난 4월 7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미군보다 훨씬 수가 많은 이라크 군인들이 종적을 감쳤으며 싱겁게 전쟁이 끝났다. 지도자를 잃은 군대는 이처럼 약하기에 김일성 편에서는 남침의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10월 26일 이후 우리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더욱 궁금해 하였다.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는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보고받고도 4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우유부단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그이기에 우리는 그가 왜 김재규 체포 지시를 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그는 김재규의 구데타를 성공한 구데타라는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군부의 서열로 따진다면 그는 그럴 만한 인물이었다. 흔히 전두환 소장이 당시 계급이 가장 높았거나 군부의 실세였던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전두환 소장이 한때 지휘관이었던 1사단은 이휘성 중장이 군단장으로 있던 1군단 예하 부대였으며, 1군단은 3군사령부 예하 부대였는데, 김재규는 정보부장 되기 전에 이미 3군사령부 지휘관이었다.

    만일 김재규의 구데타가 성공한 구데타라는 것이 기정 사실이 되면 그의 편에 섰을 가능성이 많은 인물이 정승화 장군이었다. 정승화 장군은 김재규의 잠재적 공범이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의 인맥은 김재규였지 전두환 장군이 아니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예정 시간에 정승화 장군을 시해 현장 가까이로 불러내어 단 둘이 밀회를 가졌다는 사실은 그 두 인물의 친분의 두터움을 반영한다. 그리고 만일 김재규가 군부의 이 두 거장이 뭉치면 구데타의 성공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면 사실 일리 있는 판단이었다.

    본래 김재규는 쿠데타를 사전 준비하지 않았다. 정보부장으로서 그의 임무는 부마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시민의 장갑차 과실 사고가 청와대 명령이라는 유언비어 때문에 과격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김재규는 시위 현장에 직접가 본 순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는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부마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한 무능함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질책을 받는 순간 충동을 느꼈다. 군부 최고 지도자의 위치까지 올라본 그는 무능한 인물이면서도 윗자리에 대한 욕심이 컸던 듯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최규하 국무총리에 쏠리고, 자기는 무능한 자로 따돌림받으면서 차지철에 대한 시샘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사랑도 증오로 변했던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쿠데타의 기회로 삼으려는 충동을 느꼈던 듯하다.

    만일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 동기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충동이었다느 우리의 심증이 정확한 것이라면 우리는 10월 26일 상황이 빠르게 전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김재규는 정승화가 자기 동지가 되기를 바랐으며, 만일 성공한 쿠데타라는 것이 기정 사실이라면 충분히 자기 편에 서 줄 정승화 장군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최규하 국무총리 편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음에도 정승화 장군이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정승화 장군의 김재규 체포 명령 배후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었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두한 掠봉?김재규가 시해 범인이라는 사실을 국무위원들과 군부 장성들에게 신속히 알려 김재규의 쿠데타 공작이 진전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그가 체포되어야 한다는 사실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마저 최규하 국무총리처럼 정승화 참모총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면 김재규는 정승화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소장은 진정한 군인,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는 장성이었다. 물론 군부에 광대한 인맥을 가지고 있는 자는 김재규였다. 그러나, 김재규의 쿠데타와 타협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한 사람의 장성 전두환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 용기는 최규하 내각 역시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김재규의 체포를 요청하는 결단의 밑받침이 되었다.

    영웅은 위기 대처 능력에서 탄생한다. 그 전까지는 전두환은 무명의 인물이었다. 그는 공수 여단장 시절에 장성이 위험한 낙하 훈련 시범을 직접보이며, 1사단장 시절에 사단장이 구보 훈련 선두에서 뛰는 별난 장군, 그리고 뇌물은 커녕 선물조차 안 받는 대쪽같은 청렴함 때문에 인기가 없는 무명의 장성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총애하였으며, 1978년 8월 땅굴을 발견한 성실함이 그 다음 해 6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되게 하였다. 그리고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오히려 최규하 국무총리가 머뭇거림에도 분명한 입장을 강력하게 취함으로 그의 지도력이 돋보였다.

    계급이 높다고 군부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재규는 대통령 시해 후 힘으로 자기가 차지철을 제압하고 1인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르나 힘이 지도력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는 신속하게 거세되었다. 기재규가 군부와 정계 양편에서 우두머리였다면 군부의 우두머리는 정승화 참모총장이었다. 김재규의 체포와 더불어 그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엄령 국정은 일종의 군정이다. 계엄령 하에서는 권력의 중심이 계엄사령관에게 이동한다. 정승화 장군은 훗날 예비역이 된 후 자기는 정치 군인이 아니라는 말을 곧잘 하곤 했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 정책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계엄사령관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정치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 일본과 북한과 남한에서 일제히 군정이 실시되었다. 일본은 점령군 미군 군정에 지금도 뜨겁게 감사할 만큼 맥아더 장군의 군정은 휼륭하였으며, 북한에도 행정에 능한 러시아 군정사령관이 북한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지장(知將)이 아닌 용장(勇將)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장성까지 되었으나, 역사, 경제, 정치 등의 학문적 기반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군 군정 시절 우리나라가 원조는 받았지만 경제 정책이 결여되어 있었다. 물론 정승화 장군은 착한 어른이다. 그러나 국졸의 학력인 그가 계엄사령관으로서 우리나라 정치 및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였는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쿠데타로 집권할 개연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권은 실력이 있는 자에게 가게 되어 있다. 1945년 10월에 이승만씨가 귀국하자마자 여운형과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이승만씨를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빨갱이들의 수작을 이승만씨는 단호하게 거절하셨지만 그들이 이승만씨를 주석에 추대하려 했던 것은 그의 지식의 힘 때문이었다. 정권은 지식의 힘이든 경찰력이든 군사력이든 힘과 실력을 가진 자가 장악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계엄 정국에서는 경찰력보다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에 자연 힘의 중심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쏠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비록 직위로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군부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나 그의 직위 남용은 견제되어 있었다. 당시 군부의 두 힘의 축 중 하나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출신 정승화 장군 및 주로 일본군 장교 출신 등으로 구성된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요, 다른 하나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었는데,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 중심에 대한민국 육사 1기 전두환 소장이 있었다. 그리고 정승화 장군 편에서 전두환 장군을 거세할 예정임이 밝혀지면서 장교들은 결단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군부에서 누구를 지도자로 선택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군부에서 정승화 장군 견제 세력이 없어진다는 것은 계엄 정국에서는 정치적 힘의 중심도 정승화 장군에게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나라의 앞날을 결정하는 의미가 있기도 했다.

   (아마 당시 한국군 고위장교들의 실태에 대하여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군부라는 것이 있었는가? 아니다. 신군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대한민국 4년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친일파' 운동권이 헐뜯기 위하여 "신군부"라 불렀던 것이다. 정승화 장군은 해방 전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소년병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그 시대에는 팔로군이 공산당 군대라는 것보다,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이 독립군으로 여겨졌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1951년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주로 일본군 장교 및 학도병 출신들이, 그리고 박정희가 그 예이듯이 약간의 만주국군 군관 출신들이 6개월 과정의 단기교육 이후에 장교로 임관되었다. 군에서는 1951년에 정규4년제 육사 개교 이후에도 계속 일본군 출신 등 비정규 육사 출신 장성들을 30년간 예우해 주다가 언제고 터지고 말 양대 세력의 대립이 하루 동안 터진 것이 바로 12.12 사태였다. 이희성 대장이 계엄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이 그 예이듯이, 비정규 육사 출신 장성들에 대한 예우는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단지, 12.12사태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육사 출신 장교들에게도 진급의 숨통이 조금 트였던 것뿐인데, 이것을 가지고 '친일파' 운동권은 신군부의 출현이었다는 억지 주장을 해온 것이다.)

    장교들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정승화 장군의 전두환 장군 거세 예정일이 12월 13일이었기에 모든 것이 12일에 결정되어야 하는 충돌이 마침내 생겼다. 여기서 장교들은 일제히 전두환 장군 편에 섰다. 그리고 그것은 12월 12일 이전에 이미 각자 결정한 무언의 계약이었다. 만약 정승화 장군이 정규 육사 츨신 장군들을 거세하기 시작한다면 목숨을 내놓고 정규 육사 출신 장성들을 보호하겠다는 심정을 장교들은 미리부터 털어놓고 있었다. 계급으로는 정승화 장군이 가장 위였지만 장교들간에 정규 육사 출신 장성들을 보호하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참 장성들도 정승화 장군과 김재규 사이의 관계가 뭔가 이상했기에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렇듯 12.12 사태는 군부 내부의 충돌이었으며, 국군과 조국의 앞날을 위한 군 지휘관들간의 무언의 계약이 어느편을 지지할 것이지를 결정하였었다.

    더나아가, 12.12 사태는 무언의 사회 계약이었다. 12.12 사태는 정승화 장군편에서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의 중심부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거세된 사태였다. 그 이전까지는 정규 육사 출신 장성들이 그 중 다수가 중국 공산당 팔로군 출신 등 비육사 출신 선임 장성들의 위세에 눌려 있었으나 이제 군부의 힘의 중심이 하나로 모아져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선동하는 격렬한 시위가 경찰의 치안유지력을 무력화시킨 당시 상황에서는 사회 치안을 유지하는 힘도 군부로 옮겨가기 마련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군부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김재규가 전권을 장악하는 상황은 누군가가 막았어야 했다. 그리고 비록 정승화 장군이 김재규와 쿠데타 공모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재규 수사 진행 중에 아무 이유 없이 전두환 합수부장을 거세하려 했다는 데에 뭔가 수상한 점이 있었다. 만일 그가 계획대로 전두한 합수부장을 거세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계엄 정국 하에서는 사실상의 정승화 군정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람직했는가?

    만일 당시 장교들이 조국의 앞날을 위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무언의 사회 계약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의 사회 계약을 쿠데타라고 부르지 않는다. 5.18광주 사태 때 광주 시민들이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너무 격렬하게 요구하였기에 그 해 8월 하야를 발표한 최규하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으로 전두환 장군을 지명한 것은 그 무언의 사회 계약을 추인한 것이었다. 왜 국민이 전두환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한 노태우 후보를 서택하였는가? 그것은 무언의 사회 계약의 재확인이었다. 무언의 사회 계약도 약속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단임 실현과 노태우 대통령의 김영삼 후보 지원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양김씨가 훗날 그 무언의 사회 계약을 쿠데타로 단죄한 것은 실로 비열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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