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前後의 이승만 주변 상황

김충남 박사의 `4.19 前後의 이승만 주변 상황`

1. 이 대통령의 통일안보정책은 미국과 항상 충돌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6.25 전에도 이대통령의 군사원조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6.25전쟁에 대한 정책에서도 38선 부근에서 원상회복하는 선에서 조속히 휴전하려 했지만 휴전후의 안보를 걱정한 이 대통령은 휴전반대를 통해 한미 방위조약을 쟁취하기 위해 반공포로석방 등 미국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일본 우대정책에 대해서도 이대통령은 항상 미국을 비판했습니다. 전쟁 중 그리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 이승만 이외에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없었기에 미국은 이승만을 용인했던 것입니다.

2. 이대통령이 80세가 넘으면서 정치판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런닝 메이트로 선출하지만 한국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별도로 선거하는 이상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80세는 보통이지만 당시에 80세 노인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장면이 부통령이 되면서 기업과 공무원, 언론까지 민주당으로 쏠렸습니다. 당시 자유당 간부들은 독립운동을 하던 우국지사들이 아니라 관료출신, 법조인 출신이 많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동상  
86세가 된 이대통령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판국에 자유당간부들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지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대통령 스스로는 당선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연로하고 건강도 문제였고 해서 자유당이나 정부를 확고히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경무대는 비서가 겨우 6-7명 밖에 없었으며 자유당은 이대통령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치고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이대통령이 시킨 것도 아니고 알지도 못했지만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황궁 앞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한국 최초의 민주개혁가였습니다. 그래서 하야직전 학생 대표들을 만났을때 대모에 가담한 학생들을 "용기있는 젊은이들"이라고 창찬했고 스스로 책임지고 대통령직을 절차를 거쳐 사임했습니다. 쫒겨난 것이 아닙니다.

3. 이대통령의 삶의 배경 때문에 현실을 잘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30세에 조국을 떠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세계를 누비다가 71세의 노인으로 고국에 돌아 왔습니다. 그러니 국내실정 특히 일반주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그에게 국내에 친구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6대 독자입니다 조언을 해 줄 가까운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의 처가도 외국이었으니 처가식구와 접촉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후진적인 나라, 혼란에 쌓인 나라에 이승만은 그야말로 신과 같이 우러러 보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8.15 직후 평양에서 발간된 공산당 신문 해방일보도 "민족의 지도자 이승만박사가 돌아왔다"고 썼고 남한의 좌익계 조직이었던 인민공화국도 미국에서 돌아 오지도 않는 이승만을 최고지도자로 지명했고 이에 대항하는 한국민주주당도 그를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파의 지도자가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계속되는 민족적 위기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집권 초기에는 각료나 측근 중에 독립운동 당시의 동지들이 많았고 또 전쟁 전후에는 그의 지도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국내 정세를 잘 몰라도 문제가 적었으나 과거의 동지들도 별로 없고 연로하니 나라의 정세에 대해 더욱 어두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연로하면 걱정이 많아지는데 주변에서는 신문기사도 골라서 읽어 드리니 더욱 더 현실과 유리되었습니다.

4. 마지막으로 꼭 지적해야 할 것은 4.19의 여파입니다.

4.19세대가 야당의 주류가 되었고 지식인, 언론인 중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 독재를 들먹이며 그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정부를 공격했고 학생운동은 매년 봄 4.19를 전후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의 삶과 건국 대통령, 그리고 나라를 보위하는데 지대한 공로가 있는 이대통령을 역사의 시국창에 내던져 버렸습니다.

해방 후에 김구선생과 정치적으로 결별했지만 이승만과 김구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교육수준이 낮고 세계정세에 어두운 김구는 이승만의 외교안보적 역량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그러한 면에서는 그를 큰 형님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넘어뜨렸습니다인하대학교(이대통령의 발의와 지원으로 설립, 인천과 하와이를 따 인하대학교로 명명)와 배재대학교(배재학당의 발전) 교정에 있던 이승만동상을 백범사상 연구회 학생들이 주동하여 넘어뜨렸습니다.

김구선생이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며 철없는 젊은이들을 한탄하셨겠지요. 수백만의 동족을 죽게 하고 2천만 북한 주민을 노예로 만들고 굶어 죽게 한 김일성은 수천개의 동상이 있는데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까지 존경한 이승만대통령의 동상이 공공장소에 하나도 없다는 것은 우리 국민의 정신적 수준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작년 가을 서울을 방문하여 조찬강연회에 참석했는데 연사는 맥아더 동상 문제에 열을 올리고 청중들의 반응도 뜨거웠습니다만 저는 과연 맥아더동상이 문제냐,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 대통령들의 동상을 끌어내려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서도 오늘과 같은 결과가 올줄 몰랐느냐고 했습니다. 많은 참석자들이 공감했습니다. 민주화의 이름으로 또는 김구의 이름으로 이승만동상을 끌어 내리고 그분을 왜곡하고 폄하하는데 앞장서거나 가담한 사람들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호놀룰루에서 김충남

*그림설명

 이화장에 있는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