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협상과 그 종말 2
남북 협상파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남한의 선거와 정부 수립을 인정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지만 그중의 많은 이들에게 역시 돌아갈 곳은 바로 그 남한이었다. 5월 5일 서울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6일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4.30성명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고 그 성과를 들었다.

김일성을 따라가는 김구 .... 이 회의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 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선 단정을 반대하여 미.소 양군 철퇴를 요구하는데 의견이 일치 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 하겠다고 확언하였다.....

....공동 성명서는 양군 철퇴후 전국 정법 회의를 소집하여 통일적 임시 정부를 소집하고 전국 총 선거를 경(經)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우리 민족 통일의 기초를 전정(奠定)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며 자주적 통일 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였으며 외력의 간섭만 없다면 우리도 국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앞으로 북조선 당국자는 단전(斷電)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쾌락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과 동반하여 남행 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북조선 당국자는 금차에 실행시킬 수는 없으나 미구에 그리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152)

그리고 두 김씨는 그 후 기자 회견이나 유엔 한국 위원과의 의견 교환에서도 미.소 양군의 철퇴를 요구한 것이 회담의 성과이며 미군이 철수해도 공산군이 남한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북한지도자의 약속을 믿는다고 말하였다. 또한 연석회의 결정을 실천하는 방안을 묻는 기자 질문에 "연석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조선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투쟁 위원회를 설치하고 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바 남조선에서 종래로 합법적 투쟁을 계속하던 정당 단체는 앞으로도 합법적으로만 투쟁 할 것을 언명하였다."153)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외군 철수를 주장해도 그것을 실현할 당사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그리하여 이 회의에 참석했던 여운홍은 주최측의 지시를 받아 4월 29일 '소.미 양국에 보내는 연석 회의의 요청서'를 미 군정에 전달하였다. 전 조선 인민의 의사라고 하면서 한국의 참을 수 없는 정치 상태의 모든 책임을 미국에만 돌리고 남한 선거의 반대, 유엔 한국 위원단의 철수와 소련 정부의 제의를 실천하기 위한 양국 군대의 동시 철서를 요구한 이 요청서154)에 대해 미 군정의 반응은 5월 5일의 "하지 중장 성명서"에서 밝혀졌다.

하지는 한국인이 이 요청서에 찬성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미국은 남북간의 경제적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여기에 소련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미국은 한국을 소수의 공산주의자가 다수를 지배하려는 독재 체제에 맡길 수 없다는 점에서만은 소련에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 한국인 중 지극히 소수만이 선거를 반대한다는 사실, 소련 당국과 공산주의 주구들이 유엔 한국 위원단의 북한행을 막았기 때문에 남한만의 선거가 되었다는 것, 그들이 주장하는 공산당식 선거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 유엔 결의에는 남북한 전체에서 선거를 하여 한국에 정부가 수립된 다음에 가능한 빨리 양군이 철퇴하게 되어 있다는 것, 이 요청서대로 미군이 철병하게 되면 북한의 인민군과 조직된 공산 세력에 의해 소련의 위성국이 된다는 것 등을 말하고 "본관은 이 요청서를 역시 현재까지 본관에게 제출된 수백통에 달하는 공산주의자의 진정서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것도 그와같이 취급될 것이다."고 그의 태도를 밝혔다.

그리고 그는 "본 요청서에 서명한 정당은 본관이 현재까지 본 가운데 공산당 및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는 공산당과 동일 노선의 단체의 제일 정확한 일람표인 것이며 또 각자 정당을 대표하여 이 요청서에 서명한 자들은 그들의 조국을 공산당의 노예와 외국의 지배에 팔기를 열렬히 희망하고 있는 자들의 정확한 일람표인 것이다."라고 하였다.155)

이것으로 그동안 유엔이 결의한 남북한의 자유 선거를 통한 평화적 통일을 거부하고 한국의 공산당을 시켜 사실상 남침과 한국의 공산화 통일을 가능하게 할 요청서를 미 군정에 제출하도록 한 소련의 계책은 그 선전의 효과만을 거두고 가볍게 무시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하지의 말대로 이렇게 무시당할 진정서를 과거에 수백통이나 미 군정에 제출해온 공산당에겐 이 요청서가 애당초 그들의 정치적 선전물이었지만 지금껏 남한에서 그 정치적 비중이 컸던 두 김씨에겐 이러한 결과가 치명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공산 지도자들과 함께 작성한 4.30성명의 내용이 결국 조국의 공산화 통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것은 그들의 상식을 벗어난 정치적 무식이요 공산화를 각오한 것이라면 그들은 남한에 돌아와 그 필요성을 국민에게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하지가 성명을 발표한 다음날 기자들에게 미 군정을 비난하고 남한 선거를 가결한 유엔 국가들에 언급하면서 "그러나 나는 이네들에 반대할 방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탱크도 총도 또 원자탄도 없다. 그들 국련 36개국은 조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운명을 조선 인민의 의사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북한 당국과 소련인들은 칭찬하였다.156)

그리고 그는 "현재 민주 중공군과 협조하고 있는 조선군이 약 25만명이고 북조선 인민군이 약 25만명이다. 나는 미군이 철퇴하면 북조선군이 남조선을 석권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나는 북조선 지도자측의 내전에 돌입치 않겠다는 성명을 신빙하는 것이다."157)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연석 회의의 결정이 한국 사람 전체의 의사라고 착각하며 두 김씨가 책임져야 할 4.30성명이 결코 남침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북한 공산 지도자들의 약속을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국민의 민의는 분명히 공산화 통일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언제나 공산주의자의 혁명은 폭력에 의하는 것이어서 두 김씨가 믿고 있던 공산 지도자들의 그 방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남침을 않겠다는 보장은 크나 큰 오산이었음이 6.25동란으로 증명이 되었다.

북한에서 실지 경험으로 이와같은 공산당의 정체를 알고 넘어 온 조선 민주당에서는 두 김씨의 이러한 정치 행태를 보고 "양군 즉시 철퇴 총선거 반대가 토의 전부라면 일부러 평양까지 가지말고 경교장이나 삼청장에서 조석으로 절규하여도 좋을뻔하였다"고 담화를 발표하였다.158) 그리고 과도 정부 정무 위원회도 성명을 발표하여 "... 진정한 지도자란 민족을 생과 광명의 길로 지표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력을 가진자를 칭함이다. 과거의 명성과 관록으로만 그 품위를 유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두 김씨를 평가하였다.159)

어떻든 이 남북 협상은 남한의 일부 정치 지도자와 북한의 공산 지도자가 대화를 나누었다는데 의미를 가졌을 뿐 회담에 있어 김구.김규식의 경륜도 없고 무정견한 감상주의는 공산당에 이용만 당했을 뿐 아니라 일부 국민까지 오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은 공산당의 선전이 화려할 수록 그 뒤에 숨은 그들의 진의를 알게 되어 다가오는 선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수가 없었고 두 지도자가 성과라고 생각한 송전이나 저수지의 개방도 어느것 하나 실현되지 않아 그 약속이 허위임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주;

152) <자료 대한민국사> 7. pp. 30-31.

153) 위의 책, pp. 31-32, 37-38, 80-83.

154) 유문화, 앞의 책, pp. 164-165.

155) <자료 대한민국사> 7, pp.22-25.

156) 위의 책, pp.31-32.

157) 위의 책, p. 32: 김규식은 1948년 1월 27일 유엔 한국위원단과의 대담에서도 중공의 8로군과 함께 국부군과 싸우고 있는 한국인 지원부대가 25만에서 30만에 이른다고 말하였으며 북한군을 합치면 80만의 군대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이 만주로 부터의 명확한 보고임을 전제한 이 숫자는 대단히 과장된 것으로서 실제 중공군 내의 한국인 부대는 4만 1천명을 크게 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U.N.Document, A /AC.19/SC.2/PV.8 및 정하명외, <한국전쟁사>(서울 : 일신사, 1983), pp. 41-43.

158) <자료 대한민국사> 7, p. 25.

159) 위의 책, p.39.

*그림설명

 백범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을때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두 사람이 남북 연석회의장으로 걸어가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