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협상과 그 종말 1

남북 협상과 그 종말 1 | 이인수의 대한민국의 건국

남북 요인의 회담은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이 먼저 북한 공산지도자에게 제의를 하였지만,146) 이때에 이미 북한에서는 헌법 제정과 새 국기를 제작하는 등 공산 정권 수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이 진행 중에 있었다. 이 회담은 남북 정치 지도자 간의 정치 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 수립을 상의하자는 것이었으나 소련군의 힘으로 이미 공산 정권을 확립해 놓고 있는 북한측에서는 남한을 공산화 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정치적 선전에 이것을 이욯하려는 의도밖에는 그 필요성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북한의 공산당은 이 회담을 남한에서 실시하려는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운동의 하나로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3.8선상의 백범 리승만은 처음부터 이 회담이 헛수고 임을 김구와 김규식에게 알려 만류하고자 하였으나 허사이었다. 그러나 세 지도자는 서로의 의견 대립이 유엔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나머지 요인 회담으로 인해 남한의 선거를 지연시키지 않는다는 양해 아래 리승만이 이 회담을 묵인하기로 하고 유엔에 보고차 떠나게 된 유엔 한국 위원단장 메논에게 세 지도자 간에 선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147)

그리하여 리승만은 이 회담을 공식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그 추이를 관망하였다.

북한의 공산 지도자들은 김구와 김규식의 회담 제기에 대하여 천영하고 있다가 3월 25일에 이르러 남북한 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 연석 회의를 평양에서 열겠다고하며 남한에서 선거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한에서 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지명하여 참가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에 응해 북한으로 간 사람들과 정당.사회단체는 4월 19일 부터 26일까지 그들의 통제를 받아가며 함께 남한의 선거를 성토하고 양군의 즉시 철병을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4월 27일 부터 30일까지의 남북 요인 회담에서는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이른바 4김 회담이 열려 회담을 마무리할 4.30 공동 성명에 4김이 조인하고 이 행사는 끝났다.

주로 김구.김규식이 제의한 원칙을 토대로 이루어진 이 성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에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서 조성된 곤란한 상태하에서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이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고 자기 군대를 남조선에서 철퇴 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지로 원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

2.남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 그들의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에 배치하는 여하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정당 사회단체들 간에 전취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 제 정당 단체들은 공동 명의로서 전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층 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 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각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 투표로서 통일적 조선 입법 기관을 선거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 기관은 조선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 정당 사회 단체들은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러한 선거로서 수립되는 단독 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1948년 4월 30일

정당 사회 단체명(생략)148)

 

 

여기에는연석 회의에 참가한 56개의 정당.사회 단체가 서명을 하였는데 이들은 북조선 노동당을 비롯한 공산당과 그 계열 단체 및 그들이 믿고 들러리로 세운 중간파 단체들의 연합이었다. 이 중에 한국 독립당, 민족 자주 연맹, 민중 동맹 등이 끼게 된 것은 그 당수들의 이 회의 참가로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이다.

이 성명의 계획이 실시된다면, 첫째 외국 군대가 즉시 철수한 후에 남한은 북에 준비된 인민군에 의해 공산화가 될 것이었다. 둘째는 이러한 침공을 하지 않겠다는 공산당의 약속을 그대로 믿는 놀라운 사실이다. 세째는 정부를 수립하게 될 56개 정당 사회 단체가 한국 독립당을 제외하고 모두 공산당과 소수의 중간파들이었으니, 새로 세월질 임시적 정부는 공산 정권이 될 수밖에 없었다.이것은 두 차례에 걸친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소련측이 늘 주장해 온 것이니 새로울 것이 없었다. 여기에 언급된 선거도 이미 공산당이 주관해서 세운 임시적 정부가 정치.경제.문화의 모든면에서 확고하게 권력을 잡은 다음의 일이니 그것이 공산당식 투표가 될것은 뻔한 일이었다. 네째로 여기에 참여한 남한의 정치 지도자와 정당.사회 단체들은 남한에 돌아가서, 선거로 세워질 정부에 대하여 소극적 내지 적극적인 반정부운동을 벌일 것이었다.

이와같이 4.30성명은 내용적으로 공산정권 수립과 남한의 정치를 교란하기 위한 계획서이었던 것이다.149) 그리하여 그 여파는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미군 철수의 주장과 정부 전복의 음모 및 반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 가운데 남북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산화 통일이 우리 민족을 위하는 길인가 하는 것이며 또한 백보를 양보하여 그것을 가능하게 할만큼 미국의 대한 정책이 공백이었던가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정책은 이미 두차례의 미.소 공위에서 미측 대표들의 취한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거니와 4.30성명은 순전히 공산당의 입장에서 소련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 데 불과하였다.

남의 나라 압제에서 해방된 민족에게 관례가 되어 있는 민족 자결의 원칙을 적용하여 자유 선거로 자기의 정부를 선택하게 하고 한국의 평화적 통일 독립을 가져오게 할 유엔의 해결 방안을 실력으로 거부하여 우리 민족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소련과 공산당인데 이 두 지도자는 이 성명으로 그들을 두호하며 조국의 공산화에 가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지도자들의 북행이 진정 애국 애족의 길이었다면 남북한을 막론하고 공산 치하에서 살기를 원치않는 우리 민족의 처절한 요구를 의식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루지도 못할 통일에 성급한 나머지 공산 정치의 실태도 모르고 패배주의에 빠진 두 지도자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그리고 김구는 이 성명서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자기가 지켜온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새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해방 후 공산당이 남한에서 획책해온 정치적 목표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리승만은 이 성명에 대해 소련이 진심으로 공정한 해결을 원한다면 먼저 북한의 공산군을 해체시켜 무장을 회수하고 유엔 감시하의 자유 분위기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게 하라고 말하였다.150)

일찌기 제1차 미.소 공위의 개최에 앞서 1946년 2월 8일에 단독 정부를 세워 북한을 공산화 해온 공산 정권은 아직도 연석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4월 29일, 그들의 소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헌법 초안을 북조선 인민회의에서 만장 일치로 통과 시켰다.151) 그리고 그들의 노동절인 5월 1일에는 이 해 2월 8일에 그 창군을 발표한 조선 인민군이 평양역에서 김구.김규식이 참관하는 가운데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주;

146) 송남헌의 앞의 책, pp. 441-449.

147) Rhee-Oliver Correspondence, Februar 12, 1948.

148) 송남헌의 앞의 책, pp. 467-468, <자료 대한민국사> 6, pp. 885-886.

149) Insoo Rhee, op. cit., pp. 278-279.

150) <자료 대한민국사> 7, p. 9.

151) 유문화 <해방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일지 1945.8-1949.3>(민주조선사,1949)

        p. 161.

*그림설명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던 중 3.8선상의 김구 일행